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95
394화. 몇 번으로 할까?
이살(二殺).
천살과 일살을 제외하고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 살막의 최고위 살수.
살막의 수장인 일살(一殺)이 사실상 명예직으로 혈교의 구장로가 겸임하는 것을 감안하자면, 천살을 제외하면 그보다 강한 살수는 살막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살은 백룡장의 담을 넘으며 생각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청룡신협 백수룡은 살막이 자신을 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혈교 내부에서 정보가 샌 것인지, 아니면 살막에서 정보가 샌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일단 물러나서 대책을 강구하는 하는 것이 당연할진대, 천살은 이 축제 자체가 청룡신협의 덫임을 알고도 임무를 강행시켰다.
‘하긴, 그자에겐 이 모든 것이 한낱 놀이일 뿐이니.’
살막에서 천살의 권위는 절대적.
그는 절세고수조차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살막이 중원 최고 살수 집단임을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천살이 곧 살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
때문에 이살은 백룡장에 펼쳐진 술법이 침입자를 감지하고 발동하는 것을 보면서도, 몸을 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천살이 나를 죽이겠지.’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천살의 성격을 생각하면, 결코 곱게 죽이지 않으리라. 그는 훈련받는 살수에게서도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 수 있는 자였다.
허나 다행히도, 이살이 맡은 임무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그가 자청하기도 했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나?”
바닥에 소리없이 내려선 이살은 목표물을 확인했다.
헌원강과 여민.
청룡오망이라 불리는 청룡신협의 제자들 중, 각각 도법과 빙공을 익힌 후기지수 둘.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식아!”
“……얼마나 반가운지 모를걸.”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반가워하는 둘의 기색에, 이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둘 다 묘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호기심도 잠시.
이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스르릉.
허리춤의 칼을 꺼내 든 이살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흔히 살수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비겁하게’ 기습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말하면 정체가 발각된 살수는 그리 무섭지 않은 존재이며, 암기와 독 정도만 경계하면 별 볼 일 없는 무공을 익힌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이 무림인들의 상식이자 편견.
하지만 살막의 살수들에겐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으며, 이살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살수였다.
“내가 받은 임무는 가능한 한 잔인하게, 너희를 죽이는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아, 살법(殺法)보다 본신의 무공을 깊게 갈고닦은 살수.
혈교의 도법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법인 마령도법(魔靈刀法)을 전수받은 고강한 무인이었다.
스스스슷…….
이살의 칼에서 묵빛 도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헌원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가 엄청난 도법의 고수임을 알아본 것이다.
“헌원세가의 파천도가 강호일절이라고 하던데.”
이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지금 복면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살수라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조절할 뿐.
필요한 순간에 적절하게 분출하는 감정이야말로, 무인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양분이었다.
예를 들면 ‘호승심’ 같은 것 말이다.
“오늘 그 도법을 견식할 수 있으면 좋겠군.”
후우우웅!
강풍이 불어닥치며, 이살의 신형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묵빛 도기가 그가 지나간 공간을 사납게 헤집었다.
쩌어엉!
칼을 맞댄 순간,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헌원강이 뒤로 날아갔다.
“커허억!”
“원강 선배!”
여민의 손에서 새하얀 냉기가 쏟아져 이살을 뒤덮었다. 그 눈보라는 사람 한 명쯤은 단숨에 얼려 버릴 만큼 강렬했지만, 콰콰콰콰!
단숨에 냉기를 분쇄해 버린 이살의 칼이 여민의 목을 노렸다.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얼음 알갱이를 헤치고 나타난 이살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스걱!
잘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 나풀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한 여민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동시에 자신의 목이 잘 붙어 있는지 손으로 만져 봤다.
“미친…….”
회피가 조금만 늦었으면 목이 잘렸을 것이다. 지난 학기 초에 집중적으로 수련한 경공이 여민의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제법이군.”
이살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슬쩍 웃었다.
방금 전 공격으로 둘 중 하나는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둘 다 멀쩡했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나, 이살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지금쯤 다른 곳에서도 살수들이 청룡신협의 제자들과 동료 강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터.
청룡신협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이곳으로 온다고 해도, 최소 반 각의 여유는 있을 것이다.
반 각이면 충분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스스스슷…….
이살의 칼을 휘감고 있던 마령기가 크기를 더욱 키웠다. 방금 전에는 속도와 정밀함에 집중하기 위해 강도를 적당히 조절했지만,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사이 헌원강과 여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내가 정면에서 막을 테니까, 넌 기회를 봐서…….”
“헛소리 말고 오른쪽 맡아. 내가 왼쪽. 알았어?”
“……넵.”
여민의 박력에 헌원강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살이 다시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쩌저저정!
흡사 작은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연무장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마귀의 형상과도 같은 끔찍한 도흔이 새겨졌다.
마령도법은 파괴력으로는 혈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도법이었다. 그 힘을 온전히 담아 내는 이살의 칼 또한 보통 칼이 아니었다. 공격 하나하나가 웬만한 무기는 적과 함께 분쇄해 버릴 만한 힘을 담고 있었다.
“하아압!”
그러나 헌원강의 흑도 또한 독각마룡의 뿔로 만든 보도(寶刀)였다.
또한 그것을 만든 장인은 혈교 최고의 야장이었던 위지열.
예기와 단단함이 어떤 보도에도 밀리지 않았기에, 힘겹지만 이살의 공격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놀랍군.”
이살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헌원강이 절세보도(絶世寶刀)의 덕을 보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살의 공격을 막거나 흘려 내는 것은 오로지 헌원강 본인이 갈고닦은 기예였다.
심지어 한 번씩 번뜩이는 역습은 이살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스악!
흑도가 스쳐 간 가슴에 핏방울이 맺혔다.
얕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이살에게 경각심을 주기엔 충분했다.
‘죽여야 한다.’
청룡오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감각을 타고난 헌원강.
매일 백수룡에게 특훈까지 받아 가며 날카롭게 벼려 낸 감각은, 살막의 최고위 살수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 해.’
같은 도객으로서, 이살은 헌원강이 얼마나 위험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다소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는 헌원강을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이살의 적은 헌원강 한 명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헌원강에게 집중하려고 할 때마다, 좌측에서 밀려드는 무시무시한 냉기가 그것을 방해했다.
여민이 펼치는 빙백신공이었다.
새하얗게 시야를 물들이는 냉기만으로도 상당히 까다로운데, 그 속에서 두 자루의 투명한 원반 같은 형태의 암기가 쏘아져 이살을 노렸다.
쩌엉! 쩌엉!
이살은 그 암기를 몇 번이나 쳐냈다.
그러나 마령기가 담긴 공격에도 암기는 부서지기는커녕,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몇 차례 쳐내면서 눈에 익숙해지니, 그것은 원반이 아니라 한 쌍의 팔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빙백환?”
여민이 날리는 암기의 정체를 알아낸 이살의 눈이 부릅떠졌다.
혈교의 무공을 익힌 살막의 고위 살수답게, 그는 빙백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저만한 냉기를 뿜은 팔찌가 달리 또 있을 리 없었다.
“……교에서 찾는 물건이 어째서 이곳에 있지?”
“기분 나쁘게 왜 한눈을 팔고 그래!”
그 사이 이살에게 접근한 헌원강이 도를 크게 휘둘렀다.
일순간 헌원강의 주변이 붉게 물든 듯한 착각이 일어났는데, 아껴 두었던 수라혈천도의 초식을 펼쳐 내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거의 동시에 여민도 전력으로 냉기를 쏟아 내면서, 빙백환을 힘껏 뿌렸다.
“하아압!”
아직 백수룡처럼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북해의 신물은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여민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흑도를 피해 물러나는 이살을 향해 절묘하게 날아간 것이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이살도 전력을 다해 마령도법을 펼쳤다.
수라혈천도와 빙백신공의 기운, 그리고 마령도법의 기운이 충돌하며, 일순간 기의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콰쾅!
연무장의 절반이 폐허가 될 정도의 충격이었다. 폭발하듯 피어오른 분진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을 정도였다.
“허억……. 허억…….”
“후우, 후우……. 해치웠나?”
헌원강과 여민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폭발이 일어난 장소를 바라봤다.
둘의 모습도 결코 멀쩡하지 않았는데, 무복 곳곳이 해지고 온몸에 적지 않은 상처가 가득했다. 헌원강은 한쪽 뺨이 길게 베여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여민이 창백해진 얼굴로 헌원강의 상처를 살폈다.
“괜찮아?”
“어.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잘못하면 평생 흉터로 남게 생겼는데.”
“……역시 흉터는 좀 싫지?”
“넌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한숨을 내쉰 여민이 빙백신장으로 주변의 먼지를 날려 버렸다.
그러자 충돌이 벌어진 자리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이살이 비틀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하…….”
이살은 허탈한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두 후기지수를 바라봤다.
“……말이 안 나오는군. 설마 이렇게까지 예상을 벗어나다니.”
청룡오망 전원도 아니고 고작 둘.
분명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거늘.
‘한 명 한 명이라면 진작에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빈틈을 절묘하게 보완하며, 마치 합격술만 몇 년을 수련한 것처럼 움직였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혈교는 청룡신협만 신경 쓰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위험한 것은 저들일지도 모른다.
저런 후기지수가 하나둘도 아니고 무려 다섯.
청룡오망(靑龍五?)은 별호 그대로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였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머지않아 전부 다 무시무시한 고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무리를 하는 수밖에.’
결심을 한 이살은 어금니 안쪽에 숨겨 두었던 단약을 씹어 삼켰다.
씹는 즉시, 이살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우득, 우드득!
실핏줄이 터지며 눈이 시뻘겋게 물들고,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변화는 몸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전신의 활력이 넘치면서, 줄어들었던 내공이 두 배 가까이 불어났다.
혈교의 비전으로 만든 마령단(魔靈丹). 혈교에서도 귀한 단약의 효과였다.
물론 대가가 없는 힘은 아니었다.
“크크크…….”
순식간에 마인으로 변해 가는 이살의 모습에, 헌원강과 여민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미치겠네 진짜…….”
“일단 도망칠까?”
두 사람이 진지하게 작전상 후퇴를 고민할 때였다.
사악!
절반이 잘려나간 귓불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목을 노렸으나, 이살이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한 것이었다.
“호오.”
방금 목이 날아갈 뻔했음에도, 이살은 그저 놀랍다는 기색으로 검기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아무리 눈앞의 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곤 해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알아채지 못했다니.
그만큼 은밀하고 날카로운 검기였다.
“살막에 데려가고 싶은 재능이야.”
자연스럽게 헌원강과 여민의 시선도 같은 방향을 향했다.
그곳에는, 달빛 아래 한 자루 검을 뽑아 든 소녀가 담벼락 위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 저절로 감탄이 나올 만한 자태였다.
“허! 검의 선녀가 강림했군.”
검의 선녀라 불린 소녀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경공을 펼쳐 여민과 헌원강 사이에 내려섰다. 하늘하늘한 옷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선배들. 괜찮으세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바로 몇 시진 전에 이 모습을 보았던 둘은 소녀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왜 아직도 검무 공연 때 입었던 옷 그대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천아!”
“어떻게 된 거야?”
위지천은 둘의 시선을 피하며, 검혼을 이살에게 겨누었다. 옷과 관련된 화제는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말하자면 길어요. 일단 살수부터 처리하죠.”
위지천의 합류로 전황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이제야 좀 균형이 맞겠네.”
최소 셋 이상은 모여야 제대로 된 효과가 나오는 합격진.
헌원강. 여민. 위지천.
익숙한 진형을 짠 순간, 셋의 기가 조화를 이루었고 그들의 기세가 바뀌었다.
고오오오오!
“이, 이게 무슨…….”
상상 이상의 압박감에 이살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령단을 먹은 자신이 이 정도 압박감을 느끼다니.
설마, 저 녀석들이 절세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합격진이라도 익혔단 말인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긴 했지만, 놀랍게도 비슷했다.
“몇 번으로 할까?”
여민의 질문에, 뺨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낸 헌원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십팔번이지.”
수련의 성과를 보여 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