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26
425화. 허. 이거 참…….
왕손이 떠난 뒤에도, 백수룡은 방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사파 회합이라…….”
개방 입장에서야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우려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백수룡의 생각은 달랐다.
‘다시 생각해 봐도 솔깃한데.’
정파는 항상 대의명분을 먼저 따지며, 결정을 내려도 좀처럼 곧바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조금 과장하면, 회합 장소가 누구 문파에 더 가까운지 따위로 신경전을 벌이느라 시간을 허비할 자들이 정파였다.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무거운 엉덩이를 쉽게 움직이지 않을 터.
‘하지만 사파는 다르지.’
혈교처럼 특수한 광신도들의 집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파는 지극히 속물적인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즉,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강자에게 얼마든지 자존심을 굽힐 줄도 알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위험부담이 있긴 하지만…….
‘미리 대비해 두면 되지.’
백수룡이 생각하기엔,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단점이었다.
‘일단 악인곡에 먼저 연락을 해 봐야겠군.’
백수룡은 그 자리에서 벽안귀에게 보내는 서찰을 적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전한 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악인곡의 이름으로 사파 세력의 회합을 추진할 것.
“흐음…….”
그런데 적다 보니, 아무래도 악인곡 하나만으로는 회합을 성사시키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주최자가 적어도 십대악인 정도는 되어야 다른 사파의 거두들도 관심을 보일 것 같은데, 새 악인곡주인 벽안귀의 명성은 전 곡주였던 혈수귀옹에 비하면 많이 처졌다.
“적어도 한 군데 정도는 더 나서 줘야 할 것 같은데…….”
백수룡의 목표는 굵직한 사파 세력을 모아 혈교를 견제할 새로운 전력을 구축하는 것.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파 세력의 주인들을 불러모으려면, 그만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거나 쉽게 거절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인물의 입김이 필요했다.
‘아까 왕손이 말한 세력들이 어디였더라. 악인곡, 모산파, 흑사련, 녹림…… 녹림?’
답은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드르렁- 피유우우-
옆방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백수룡은 백룡장에 녹림의 아들이 있다는 것을 잊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녹림에서 한 손에 꼽히는 염라채의 채주이자, 십대악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녹의수사의 양아들이 말이다.
“내일 한번 얘기해 봐야겠군.”
* * *
다음 날.
제자들의 새벽 수련이 끝나자마자, 백수룡은 야수혁을 따로 불러냈다.
“수혁아. 잠깐 따로 얘기 좀 하자.”
“예?”
웬만해서는 혼자 불려오는 일이 없는지라, 백수룡 앞에 마주 앉은 야수혁의 표정은 괜히 불안해 보였다.
“왜 저만……?”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 순간, 야수혁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심지어 그 산만 한 덩치로 바들바들 떨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젠장. 결국 이렇게……!”
갑자기 분통을 터트리는 제자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백수룡이었다.
“갑자기 뭐가 그렇게 억울한 표정인데?”
캬아-!
야수혁의 어깨에 찹쌀떡처럼 붙어 있던 은호가 작은 입을 쩍 벌리고 하품했다. 청룡오망과 함께 새벽 수련을 해서 피곤한 모양이었다.
은호를 떼어낸 야수혁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머지 공부 시키려고 부른 거잖아요. 어제 독고 선배한테 본 기초교양 시험에서 점수가 미달돼서…… 잠깐. 그런데 왜 나만?!”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하냐?”
백수룡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청룡오망이 다른 학생들에게 기초교양을 배운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아직도 낙제 수준을 못 면하고 있을 줄이야.
‘이러다가 천무제 못 나가는 거 아냐?’
설마 무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론 수업에서 낙제했다는 똥멍청이들 같은 이유로?
백수룡은 작은 희망을 담아 물었다.
“점수 미달은 너 혼자야?”
“당연히 원강 선배도요. 지천이는 아슬아슬하게 통과했어요.”
백수룡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군. 너랑 원강이가 쌍벽을 이룰 줄 알았다.”
그 와중에도 야수혁이 울컥해서 반박했다.
“제가 원강 선배보다는 조금 더 나은데요?”
“……그래 봤자 개똥이냐 소똥이냐 정도의 차이겠지. 하여튼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본론을 꺼냈다.
“네 양아버지 말이다. 녹의수사 주표.”
“예? 예.”
양부의 이름이 나오자 야수혁의 태도도 진지해졌다.
백수룡이 양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나를 산채에 초대해 주셨는데. 그거 아직도 유효한 거냐?”
“……예. 물론이죠.”
“다행이네. 조만간 한번 뵈러 가겠다고 말씀드려라. 겸사겸사 이것도 같이 전해 드리고.”
백수룡은 품에서 지난 밤에 쓴 서찰을 꺼냈다.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도, 봉인된 종이의 두께가 제법 두툼했다.
“답신을 최대한 빨리 부탁드린다고도 꼭 전하고.”
“이게 뭔데요?”
녹의수사 주표.
녹림칠십이채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세력이 강한 염라채의 주인이자, 십대악인의 일인.
그러나 백수룡에겐 그저 학부모 중 한 명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지금까지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고.
하지만 이제는 녹림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자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자세히 설명하면 긴데, 녹림에 해가 될 일은 절대 아니다. 신경이 쓰이면 네가 직접 읽어 보고 나서 보낼지 말지 판단해도 된다.”
“……보낼게요.”
야수혁은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고 서찰을 품에 넣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백수룡이 녹림에 해가 될 일을 할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백수룡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 답장이 오면 알려 줘. 그럼 이만 나가 봐라.”
“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야수혁의 커다란 등에, 백수룡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리고 교양 공부는 오늘 나 퇴근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이따가 원강이도 데려와.”
“예에…….”
방을 나서는 야수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백수룡도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이쪽 밑그림은 어느 정도 그렸고……. 다른 쪽도 확인해 봐야겠군.”
* * *
백수룡은 청룡학관으로 출근하자마자 남학생 기숙사 방향으로 향했다.
“……저기 계시네.”
아침부터 기숙사 앞에 나와 슥슥 비질을 하는 사내가 보였다. 가벼운 옷차림에 대충 머리를 묶고 나온 모습은 영락없는 한량이었는데, 빼어난 용모는 그것조차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게 했다.
최근 청룡학관 여학생들이 남학생 기숙사를 자꾸만 기웃거리게 만든, 그리하여 많은 남학생들이 쓸데없는 오해와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원흉.
“아버지.”
“음?”
아들을 발견한 백무흔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빗자루를 벽에 세우고 걸어왔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길 다 찾아오고. 웬일이냐?”
보통은 점심시간이나 업무가 끝난 후에 찾아오는 아들이었기에, 백무흔은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그런데, 은근슬쩍 기숙사 사감 자리에 눌러앉으신 거예요?”
백수룡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백무흔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게 무슨 소리냐. 그냥 잠깐 도와드리는 거다. 알다시피 네 외조부께서 아직 편찮으시잖으냐.”
“어제 뵈었을 땐 다 나으신 거 같던데…….”
“네가 뭘 안다고. 병수발 경력만 삼십 년이 넘는 이 애비가 보기엔 아직 멀었다. 그 연세에 너처럼 회복이 빠른 줄 알아?”
“……잘 빠져나간다니까.”
원래는 매극렴이 남학생 기숙사 사감을 겸하고 있었는데, 부상을 당한 이후로는 백무흔이 임시로 일을 돕고 있었다.
“하여튼 무슨 일로 온 거냐? 물어볼 게 있다며?”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버지, 청룡학관 졸업한 거 확실해요?”
“……무, 물론이지.”
백무흔은 처음에는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졸업장만 안 받았을 뿐이지, 사 학년 교과 과정까지 모두 이수했다.”
“그런데 왜 졸업식 전에 도망쳤어요?”
“졸업식이 끝나면 네 외할아버지가 다시는 약빙을 못 만나게 하려고 할 것 같아서, 먼저 선수를 치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참나…….”
아들 앞에서 아내와 야반도주한 사실을 저렇게 당당하게 밝히는 아버지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백무흔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약빙과 죽어도 헤어지기 싫었단다. 약빙도 같은 생각이었지. 어느 날은 함께 은린호에 갔는데, 입술이 참 예쁘더구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커흠! 이런 이야기는 네가 더 나이가 들면 해 주마.”
백수룡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는 아버지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스물여덟인데요?”
“서른 전에는 좀 이르지.”
“아니, 본인은 학생일 때 야반도주한 양반이…….”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의 아버지는 반백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아내바라기였다.
“아무튼 졸업장만 안 받았다 이거죠? 그럼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거냐?”
백무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백수룡은 씩 웃었다.
“그때 못 받은 졸업장. 저랑 지금 받으러 가자고요.”
“……지금? 그걸 갑자기 왜?”
백무흔이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백수룡이 어깨를 으쓱였다.
“졸업생이니까 당연히 졸업장이 있어야죠. 아버지 성격에 직접 달라고 하진 못할 거 아니에요?”
“그건…….”
백무흔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들의 말이 맞았다.
마음속으로는 늘 청룡학관 졸업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졸업식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제야 졸업장을 달라고 할 만큼 그는 뻔뻔한 성격은 못되었다.
“……녀석. 다 컸구나.”
백무흔이 촉촉해진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그 작고 연약했던 아이가 이토록 장성한 것도 놀라운데, 삼십 년 전에 못 받은 아비의 졸업장을 받아 주겠다니.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했다.
“됐다. 이제 와서 번잡스럽게 졸업장은 무슨. 괜한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그래서 거절하려 했는데.
“그리고 저한테도 아버지 졸업장이 필요하거든요.”
“……네가 왜?”
“저랑 함께 천무제에 가셔야죠. 설마 안 갈 거예요?”
아들의 은근히 섭섭한 표정에, 백무흔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참석하는데, 물론 보러 가야지. 하지만 그게 내 졸업장과 무슨 상관이냐?”
“천무제에 참가하려면 졸업장이 필요하다더라고요.”
“……옛날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는데?”
백수룡이 분명 ‘참가’라고 말했지만, 백무흔은 그것이 설마 졸업생이 대회에 나간다는 의미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구경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그리고 백수룡은 그런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일단 졸업장부터 받아 내는 것이 먼저였다.
“올해는 규정이 좀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여튼 아버지랑 함께 천무제에서 추억을 만들려면, 졸업장이 꼭 필요하다고요.”
백수룡은 아버지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의 눈에서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졸업장 받는 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아버지는 옆에서 보고만 계세요.”
“허. 이거 참…….”
결국 아들에게 반쯤 끌려가는, 얼떨떨한 표정의 백무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