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58
458화. 새벽녘의 연무장
“후우우…….”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입에서 새하얀 김이 새어 나온다. 땀방울을 차갑게 식히는 차가운 새벽공기.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그동안 변해 온 계절만큼 소년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쿵!
가볍게 발을 구르자 바닥에 쌓여 있던 낙엽들이 휘몰아치며 떠오른다. 헌원강은 그 순간에 맞춰 흑도를 휘둘렀다.
얼굴에 맺혔던 땀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흑도의 궤적이 낙엽을 쫓는다. 헌원강의 눈은 단 하나의 목표물도 놓치지 않았다.
사악-!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여덟의 낙엽이 열여섯으로 변해 허공에 나풀거렸다. 전부 정확히 중간이 잘린 모습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기예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칼솜씨를 보여 주고도, 헌원강은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 방금 전 동작을 천천히 다시 해 보았다.
이번에는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천천히 발을 움직이고, 팔을 뻗으며, 칼끝에 느껴지는 감각에 완전히 집중했다.
“…….”
숨조차 멈춘 채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헌원강의 눈에서 광채가 흐르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칼끝이 가속했다.
스아악-!
새벽공기를 가른 흑도가 사납게 움직이다가 급하게 제동이 걸렸다. 헌원강의 미간이 또다시 찌푸려졌다.
“이게 아니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헌원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다시 수련을 반복했다.
이른 새벽녘의 연무장.
고요한 풍경 속에서 헌원강은 홀로 도를 휘둘렀다. 선후배들이 잠에서 깨지 않게 기파를 싣지 않고, 최대한 가볍게 움직이면서도 집중력을 극한으로 유지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치미는 열기에 무복 상의는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잘 짜여진 근육이 쉴 틈 없이 꿈틀거렸다. 새하얀 김이 헌원강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조금만 더.”
헌원강은 자신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한 번만 더…….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수련을 계속한다면, 한 시진도 잘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헌원강은 그 한 시진조차 아까웠다.
‘더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헌원세가의 망나니.
요즘은 아무도 헌원강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헌원강의 마음속에는 그 시절의 후회가 깊이 남아 있었다.
‘더 빨리 시작했다면.’
몰락한 가문의 무공을 원망하며, 전부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흘려보냈던 시간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벌충해야 한다.
게으르고 나약하게 보냈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남들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노력해야 한다.
-파천도라는 별호. 제가 잇겠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 가문을 대표하는 별호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울 줄은.
-하하하하! 여러분께서 제 얼굴에 이토록 금칠을 해 주시니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그려!
지난 여름 방학, 가문의 연회장에서 즐거워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헌원세가는 광마혈사 이후 오랜 부침을 겪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일어서는 중이었다.
누구보다 백수룡의 도움이 컸지만, 그 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던 가문을 지켜낸 헌원수의 노력이 있었다.
아버지가 하북팽가를 비롯해 여러 가문에 돈을 빌리러 다니는 모습을, 헌원강은 어려서부터 보았다.
-강아. 못난 애비가 미안하구나.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네가 훨훨 날아오를 기반을 물려주지 못해서…….
-……주무세요, 아버지.
-미안하다, 미안해…….
술에 취해 자신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면, 헌원강은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앞으로는 내가 지켜야 해.’
더 이상 누구도 헌원세가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다짐하는 자신과의 맹세였다.
-승부는 다음에 내지. 천무제에서.
팽사혁의 재수없는 얼굴도 떠올랐다. 순간 도파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아아악!
발밑에서 바람이 솟구쳤다. 낙엽들이 다시 휘몰아치며 치솟았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낙엽들을 흑도가 한줄기 궤적 안에 담았다.
스아아악!
열둘의 나뭇잎이 산산조각이 나며 가루처럼 흩날렸다. 몇 조각은 땀에 젖은 어깨며 가슴에 들러붙었다. 헌원강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도를 휘둘렀다.
천재는 범인(凡人)과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범인은 열 번을 봐야 깨치는 것을 한 번 만에 깨치고, 백 번을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을 단숨에 성공한다.
때로는 그조차 건너뛰고 더 높은 영역에 도달한다. 부조리한 재능에 뼈를 깎는 노력, 치열한 고민이 더해진 결과는 스승의 예상조차 뛰어넘는다.
헌원강은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 도를 휘둘렀다. 완전히 망아(忘我)에 빠진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제자리에서 우뚝 멈춰선 헌원강은 흑도에 대고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멋대로 움직이지 마.”
수라혈천도는 헌원강의 몸에 딱 맞는 옷과 같은 무공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멋대로 도가 움직일 때가 있었다.
주로 대련 중에 승부욕이 과해질 때가 문제였다. 헌원강의 의도와는 다르게 초식에 살기가 실리는 경우가 있었다.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을 위험하게 할 뻔했어.’
요즘 헌원강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잘 싸우다가도 잠시만 방심하면 초식이 사납게 변하니, 좀처럼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최근 들어 그런 일이 빈번해졌는데, 그래서 며칠 전부터는 청룡오망과의 대련도 피하는 지경이었다.
이런 걱정 없이 마음껏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상대는 백룡장에 한 명뿐인데…….
헌원강은 형산이 있는 방향을 어림짐작으로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아주 돌아오기만 해 봐. 백수룡 조지기 이천팔십팔번으로 한 방 먹여 줄 테니까.”
잠시 투덜거린 헌원강이 다시 도를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흐암. 그러다 몸 상하겠어요.”
앳된 얼굴의 소년이 하품을 하며 연무장으로 걸어 나왔다. 잠에서 깬 위지천이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깼냐?”
헌원강이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자, 위지천이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곧 일어날 시간인데요. 구경해도 돼요?”
“마음대로 해.”
위지천은 마루에 앉아서 헌원강이 수련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으음?”
처음에는 헌원강의 도법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던 위지천은 어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법의 흐름이 뚝뚝 끊기고 있었던 것이다. 위지천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뭐?”
위지천의 훈수 아닌 훈수에, 헌원강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돌아봤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여전히 위지천이 한 수 위이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후배에게 무시당하고도 그냥 넘어갈 헌원강이 아니었다.
그런데, 평소였으면 바로 사과했을 위지천도 오늘은 단호한 표정이었다. 잠에서 완전히 깬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
“선배. 그냥 받아들여요.”
“……받아들이라니? 뭘?”
“살검(殺劍). 아니 선배는 살도(殺刀)라고 불러야겠네요.”
“뭔 소리를…….”
“말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낫겠다.”
위지천은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연무장으로 걸어와선 검을 뽑았다.
검혼이 우웅- 하고 불길하게 울었다.
동시에 위지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입매가 비틀렸다.
섬뜩.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 헌원강은 저도 모르게 위지천에게 도를 겨눴다.
“너, 그거 주화입마…….”
“키킥.”
불길한 미소를 띤 위지천은 그대로 헌원강에게 달려들었다. 검극이 향하는 곳은 헌원강의 심장이었다.
채앵!
흑도와 검혼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두 소년의 위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헌원강은 빠르게 돌아서며 두 번째 공격에 대비했다.
“인마! 정신 차려!”
“키키킥!”
저 눈빛을 한 위지천은 피를 갈구하는 검귀와 다름이 없었다. 전에도 몇 번이나 보았고, 그때마다 피가 흘렀다.
백수룡의 도움으로 주화입마는 전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다시 나타날 줄이야.
“젠장. 하필이면 선생님도 없을 때…….”
각오를 단단히 한 헌원강이 도파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는 순간, 위지천의 눈에서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뭐야?”
“보다시피 조절할 수 있어요.”
다시 눈꼬리가 강아지처럼 축 처진 위지천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과거, 위지천은 잘못된 무극검을 익히는 과정에서 주화입마를 입고 살검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무인의 피를 묻혔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던 살검을 체화해서 언제든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선배도 할 수 있어요. 아니, 해야만 해요.”
물론 위지천도 말처럼 쉽게 해낸 일은 아니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살검을 통제할 수 있었고, 검의 경지도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제가 보기엔, 선배의 도법은 저보다 훨씬 살기에 예민해요. 조절만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저보다 강해질지도 몰라요.
위지천은 그 말을 입 밖으로는 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원강 선배가 자만에 빠질까 봐?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스스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일지도.
위지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헌원강이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먼저 받아들여야 해요. 살기에 몸을 맡기고 마음껏 도를 휘둘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주화입마로 인해 살검에 깊이 빠져 봤기에 해 줄 수 있는, 백수룡도 해 주기 힘든 경험자의 조언.
“……이걸 마음대로 풀어 놓으라고?”
헌원강은 불안한 표정으로 흑도를 내려다보았다.
수라혈천도의 살기는 아직 소년이 감당하기엔 벅찼다.
혹시나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할까 봐, 살기에 잡아먹힐까 봐 두려웠다.
“누구도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거잖아요?”
위지천은 다시 검을 들어 헌원강을 겨눴다. 그의 수련을 도와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헌원강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끼리 하는 건 위험해. 차라리 선생님이 돌아오면 말해 볼게.”
“선배.”
피식.
위지천이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하게 올리는 모습이, 지금은 백룡장을 비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웃음이었다.
“지금 절 걱정해 주는 거예요? 선배가 아니라요?”
“……이 자식이.”
울컥한 헌원강을 향해 위지천이 검을 찔러 넣었다. 부지불식간에 대련이 시작되었다.
쩌저저정!
흑도와 검혼이 연달아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새벽녘을 가르는 궤적들이 중첩되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키킥!”
먼저 살검을 꺼낸 위지천은 헌원강이 수라혈천도를 펼치도록 계속해서 자극했다. 초반에는 조심하던 헌원강도 점점 수라혈천도의 살기를 드러냈다.
“원강 선배! 겨우 이 정도로 제 털끝 하나…….”
“조심해라.”
서걱!
위지천의 눈앞에서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나갔다. 표정이 굳은 위지천이 뒤로 물러나며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쩌엉-!
간격이 크게 벌어졌다.
제자리에 멈춰선 헌원강은 흑도를 쥔 손바닥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했다. 방금 전의 감각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이런 느낌인가?”
조금 감을 잡았는지, 씨익 웃은 헌원강이 고개를 들어 위지천을 바라봤다. 마주한 두 소년의 눈에서 비슷한 감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아침 대련 한판. 어때?”
“……좋아요.”
위지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소름 끼치는 검귀의 웃음이 아니었다. 호적수를 만나 즐거워하는 소년의 미소였다.
그리고 두 소년은 다시 격돌했다.
“흐아암-”
“저 둘은 아침부터 기운도 좋네.”
야수혁과 거상웅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걸어 나왔다. 거구들 뒤로 여민도 헝클어진 머리를 묶으며 방에서 나왔다.
세 사람은 마루에 걸터앉아 헌원강과 위지천의 대련을 구경했다.
“원강이 놈. 오늘따라 기운이 넘치는데?”
“며칠 생각이 많은지 빌빌거리더니…….”
“덕분에 아침 당번이랑 청소 당번 안 해서 좋았는데 말이다.”
“쩝. 원강 선배가 밥은 또 은근히 잘하는데.”
거상웅과 야수혁이 대련을 구경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여민은 헌원강의 달라진 움직임을 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천이가 전에 그러더라. 나중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패배할 날이 온다면, 그 상대는 아마도 원강 선배일 거라고.”
“……뭐? 정말 그랬어?”
“건방진 자식 같으니!”
그냥 별생각 없이 떠올라서 한 말이었는데, 자존심 강한 두 거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자식들! 우리만 빼놓고 니들끼리만 세지지 말라고!”
“이대로 난투 수련이다!”
연무장으로 달려나가는 두 거구의 눈에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여민이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하여간 무슨 말을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