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88
488화. 뭐가 문제야?
남궁수는 고개를 들어 싸늘한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말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기에 일찍 퇴근한 줄 알았더니, 반 시진쯤 지나 돌아와서는 궁금하지도 않은 산동악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잘 몰랐는데, 무림세가에서 양자를 들이는 게 꽤 흔한 일이라며? 특히 산동악가는 창왕이 가주가 된 이후로 규모를 키우려고 양자를 많이 들였다던데…….”
“남궁세가의 직계인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나?”
미간을 찌푸린 남궁수의 한숨 섞인 반응에, 백수룡은 한번 어깨를 으쓱이곤 물었다.
“그럼 악연호가 양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나?”
“…….”
살짝 떨리는 남궁수의 속눈썹이 대답을 대신했다.
거기까진 미처 알지 못했다고.
백수룡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연호 녀석. 어려서부터 가문에서 눈치를 많이 보고 자란 모양이야. 그래서 아까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던 거고.”
백수룡은 사무실로 돌아오기 전에 명일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중에는 차마 남궁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연호는 일곱 살 때 악가에 입양됐다더라고요. 당시 악가에서는 무공에 재능을 보이는 고아들을 많이 입양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명일오는 입술을 깨문 후 말을 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평가를 해서,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파양해서 하인으로 삼거나 하급 무사로 육성했다나 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창백해진 얼굴로 화를 내는 제갈소영과 달리, 백수룡은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연호 말로는, 자기는 운이 좋아서 악씨 성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구김살 없이 살아온 줄만 알았던 악가의 귀공자는, 생각지도 못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파양시켰다곤 해도, 결국은 산동악가에 남아 하인이 되거나 하급 무사가 되었다.
때문에 악가는 어린아이들을 내쳤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고, 대부분 가문에 남겨졌기에 소문 자체도 거의 퍼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요!
-……그래서?
똑같이 입양된 아이들의 운명은 매년 시험이 끝날 때마다 갈렸다고 했다.
그 기간이 무려 오 년.
끝까지 시험을 통과한 악연호는 정식으로 악가의 일원이 되었지만, 말해 줄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강호에 나서지 못했다고 했다.
-……가문의 한량은 무슨. 어렸을 때부터 눈치 보기 바빴겠네.
명일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백수룡은 악연호가 살아온 환경이 어땠을지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시험까지 합격한 아이들은 악가의 친족들에게로 보내졌는데, 그중 악연호를 받아들인 건 창왕 악비의 사촌인 악진헌이라는 사내라고 했다.
-양부와의 사이가 딱히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조금 서먹해 보이긴 하더라고요.
창왕 악비는 가문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많은 아이들을 데려왔지만, 정작 자신이 직접 입양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연호 그 녀석. 악가 가주님을 많이 어려워하더라고요.
-너희들, 여름방학 때 함께 창왕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나?
-사실 그것도 처음에는 거절당했어요. 연호가 형님이랑 친분이 깊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그제야 마지못해 수락해 주신 거였죠.
-…….
-그마저도 사나흘에 한번 잠깐 봐 준 정도였지, 지도라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어요. 나눈 대화도 대부분 형님에 관한 질문이었고요. 청룡신협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실제 성격은 어떤지, 집안은 어떤지 같은…….
창왕 악비에 대해서 말하는 내내, 명일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결코 무공을 지도해 준 은인을 떠올리며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아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분이었습니다.
창왕 악비.
산동악가의 가주이자, 무림십존.
창술에 있어서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창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악비에 대한 평가는 둘로 갈렸는데, 산동악가를 오대세가를 넘어 천하제일세가로 만들 뛰어난 가주라는 평가와 함께, 가문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라는 비판이 공존한다고 했다.
명일오가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 이상 자세한 사정은 악연호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연호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거지.”
백수룡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주자, 남궁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관심 없다고 말했을 텐데.”
“정말로? 난 또 아까부터 인상을 팍팍 구기고 있길래, 엄청 신경 쓰는 줄 알았지.”
“…….”
서자와 양자.
물론 현재 남궁수는 입장이 많이 달라졌지만, 가문에서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위치라는 점은 비슷했다.
잠시 말이 없던 남궁수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지?”
“내가?”
“전에는 남이 뭘 하고 다니든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여기저기 죄다 참견하고 다니는군.”
남궁수가 못마땅한 듯 표정을 찌푸리자, 백수룡이 능글맞게 웃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무 데나 끼어드는 건 아니라고.”
백수룡은 팔짱을 끼고, 뻔뻔하리만치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 중요한 사람한테만 참견하는 거지. 너랑 연호가 서로 얼굴 붉혀 봤자 청룡학관에도, 천무제에도 아무 도움도 안 되니까.”
“……그런 걸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부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남궁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오늘은 먼저 퇴근하겠다.”
“벌써?”
“사무실에선 누가 자꾸 방해를 해서 집중이 안 되는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남궁수는 서류를 챙기더니 단호하게 사무실을 떠났다.
쿵!
“……진짜로 가네?”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남궁수가 닫고 간 문을 바라봤다. 혹시 중간에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뭐, 나야 혼자 일하면 편하고 좋지.”
그러나 한동안 혼자 남아서 일하던 백수룡도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자리를 정리했다.
[별이 보이기 전에 퇴근이라니. 노을 지는 풍경을 보니 감개무량하구나.]“감개무량할 것까지야.”
창룡신검이 감격한 목소리로 검신을 부르르 떨자, 백수룡은 멋쩍은 듯 웃었다.
평소보다는 확실히 이른 퇴근길이었다. 학관 안에 남아 있는 학생들도 제법 많았는데, 대부분 같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너희 수학여행 대자보 붙은 거 봤어?!”
“이번에 산동악가에서 고수들도 초빙한다면서?”
“난 그거보다 주작학관이랑 합동이라는 게 너무 기대돼! 작년 천무제에서 준우승했었잖아!”
다들 며칠 후면 떠나게 될 수학여행으로 잔뜩 들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괜찮을까? 소문으로는 주작학관 애들 엄청 오만하다던데…… 막 우리 무시하고 그러는 거 아냐?”
간혹 주작학관이라는 이름에 주눅든 소심한 학생들도 보였으나, 그런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까짓거 작년 준우승이 대수야? 우리는 올해에 우승이 목표인데!”
“걔네가 우릴 무시하면, 청룡오망나니가 가만히 있겠냐?”
“난 우리 선생님들이 날뛸까 봐 그게 더 걱정이야.”
“하하하! 그것도 그렇지!”
반쯤은 농담이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학생들도 청룡학관의 천무제 우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백수룡은 곳곳에서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며 학관을 가로질렀다.
‘그러고 보니, 사마영은 잘 있나 모르겠군.’
백수룡은 주작학관으로 자신을 영입하려 했던 야심 가득한 여인을 떠올렸다. 아마도 수학여행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비록 백호학관과는 일정이 안 맞아서 합동 수업이 무산됐지만…… 이번 기회에 주작학관의 수준을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백수룡은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남학생 기숙사 지붕 위에, 악연호가 어깨가 축 처진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저런 데서 궁상을 떨고 있었네.”
혀를 찬 백수룡은 가볍게 땅을 박찼다.
휘익!
단숨에 건물 벽을 타고 오른 백수룡이 악연호 옆에 사뿐하게 착지했다.
“몸이 안 좋아서 먼저 퇴근했다더니? 꾀병이었냐?”
“형님…….”
악연호가 기운 없이 웃으며 백수룡을 바라봤다.
그 맥아리 없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백수룡은 손바닥으로 악연호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끄악! 갑자기 왜 때려요!”
“무슨 병든 닭처럼 있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말한 백수룡은 악연호 옆에 털썩 앉더니,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노을로 물든 하늘에 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보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너 양자라면서?”
“……일오 형한테 들었어요? 아니, 그보다 남의 아픈 과거를 막 이렇게 대충 누워서 물어봐요?!”
따지듯이 묻는 악연호에게, 백수룡은 그게 뭐가 대수냐며 코웃음을 쳤다.
“다 큰 놈이 그깟 거 가지고 아픈 과거는 무슨. 고아가 부잣집에 입양돼서 무공 배우고, 좋은 옷 입고, 맛있는 밥 먹으면서 자랐으면 복에 겨운 줄 알아야지. 너처럼 성씨 못 받고 하인 된 애들도 많다며?”
“와, 남 이야기라고 막 하는 거 봐…….”
악연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심각한 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하는 방식이, 백수룡 나름의 위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그냥 좀 심란해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어요.”
“알면 됐어.”
“남궁수 선생님께는 내일 정식으로 사과드리려고요.”
“그래. 그 자식도 신경 안 쓰는 척은 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고 있을걸?”
“설마 저 잘리지는 않겠죠?”
“음. 일타강사의 눈 밖에 났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다행이다. 그런 거면 형님은 진작 잘렸어야 하는데, 아직 안 잘린 걸 보면 저도 괜찮겠네요.”
“……이 자식이?”
백수룡이 째려보자 악연호는 킥킥 웃더니, 똑같이 지붕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곤, 잠시 멍하니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줬으면, 어떻게 해서든 막았을 텐데…….”
“…….”
그 씁쓸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백수룡은 악연호가 아직도 무언가를 더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명일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개인적인 사정’과 관련된 것일 터. 때문에 백수룡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연호야.”
대신 백수룡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예?”
“너희 가주 말이다. 내가 흠씬 패 줄까?”
“……미쳤어요?”
산동악가의 가주를 무슨 동네 파락호 대하듯 언급하는 말에, 악연호가 기겁을 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런데 백수룡의 표정은 단순히 농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진심처럼 보였다.
“뭐가 문제야? 내가 너네 가주보다 더 셀걸? 이참에 십존말석이라는 꼬리표도 떼 버리지 뭐.”
“하…….”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백수룡의 태연함에, 악연호는 결국 “푸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가까이서 보다 보니 잊고 있었다. 백수룡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가주와 대등한 명성을 누리는 절세고수이면서, 딱히 권위를 드러내지 않는 청룡학관의 괴짜 신입 강사.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 악연호는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 잡은 가주의 존재감이 줄어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요, 형님.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악연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자, 백수룡도 더 이상 같은 화제를 언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슬슬 내려갈까?”
“예!”
그들은 기숙사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전 사무실에 좀 가 볼게요!”
악연호는 못 끝낸 업무를 처리하겠다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백수룡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것 같은 동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지. 무슨 야근을 한다고.”
[……네가 할 말이더냐?]창룡신검의 잔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김에, 백수룡은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으로 시장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봐서 백룡장으로 향했다.
담벼락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백수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들이라도 데려왔나? 멀리서부터 시끌시끌하네.”
그러나 백룡장에 가까워질수록 백수룡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고, 어느새 그는 경공까지 펼치고 있었다.
휘이익-!
질풍처럼 쏘아진 백수룡의 신형이 담장을 넘어서 무복을 펄럭이며 바닥에 내려선 순간.
“선배! 이쪽으로!”
“나한테 보내라니까!”
“진짜 미쳤어! 만두 형씨 힘이 장난이 아냐!”
“어떻게든 막아 봐!”
“…….”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한 백수룡은 양손 가득 들고 온 식재료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백룡장의 연무장 한가운데서, 사호가 청룡오망과 어울려 공을 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