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96
496화. 어쩌면 이 순간이
“…….”
사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정말 현실인 걸까?
어쩌면 환각을 보게 만드는 술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고, 기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별다른 징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저 비현실적인 광경이 현실이란 것인데…….
* * *
떨떠름하게 미간을 구긴 백수룡은 양쪽 어깨에 학생들이 떠넘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그 높이가 백수룡의 키와 엇비슷할 정도였지만, 절세고수의 균형 감각은 그 많은 짐보따리를 들고도 흔들리지 않았고, 편안하게 운반하며 가벼운 경공까지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그의 놀라운 균형 감각에 감탄했을 학생들이, 오늘만큼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스승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선생님. 이것도 들어주세요!”
어디선가 날아온 보따리 하나가 백수룡 앞쪽으로 떨어졌다. 백수룡은 그것을 무심한 시선으로 보더니, 발끝으로 툭 차올려 짐 더미 맨 위에 정확히 안착시켰다.
“오오오오!”
“역시 무림십존!”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여기저기서 도시락, 수통, 세면도구, 간식거리 따위가 암기처럼 백수룡에게 날아들었다.
“……이것들이.”
백수룡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면서도 학생들이 던진 물건을 전부 발로 받아 냈다.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툭툭툭- 발끝에 닿는 족족 위쪽으로 차곡차곡 쌓였고, 짐 더미는 어느새 백수룡의 키보다 훨씬 높아져 있었다.
“지독하다, 지독해…….”
“기어이 저걸 다 받아 내?”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 보자고!”
오기가 생긴 학생들이 백수룡을 당황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짐을 던져 댔으나, 백수룡은 보란 듯이 전부 받아 냈다.
나중에는 허공섭물까지 사용해서 짐을 단단하게 고정시켜 놓으니, 움직이는 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쯤 되자 오히려 학생들이 더 당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을 향해, 백수룡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려먹는다더니? 겨우 이 정도였어?”
“……열 받네 진짜!”
“치사하게 무공으로 전부 해결하다니!”
재미없다며 일찌감치 명일오나 제갈소영, 곽두용 쪽으로 옮겨간 학생들도 있었다. 그쪽은 당황하는 반응들이 훨씬 정상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난이도가 가장 높은 백수룡에게 승부욕을 불태우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슬렁슬렁 백수룡에게 다가온 헌원강이 옆에서 나란히 경공을 펼치며 씨익 웃었다.
“수룡 선생. 오늘은 우리가 장난 좀 쳐도 화 안 낼 거죠?”
“……수룡 선생? 원강아, 오늘따라 혀가 많이 짧구나. 잡아당겨서 늘려 줄까?”
빙긋 웃으면서 친근하게 내뱉는 말에 오한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헌원강은 애써 무시하며 스승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퍽 때렸다.
“에헤이! 이렇게 좋은 날에 사소한 건 넘어갑시다, 쫌! 우리 수룡 선생. 이런 거에 뒤끝 있고 그러는 꼰대 아니잖아, 요?”
반말과 존댓말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헌원강의 도발에, 백수룡의 이마에 혈관이 빠직 돋아났다.
‘참자, 참아.’
출발하기 전 노군상의 재밌게 놀다 오라는 당부, 그리고 조금은 풀어줘도 된다는 매극렴의 말을 되새기며, 백수룡은 참을 인 자를 여러 번 새긴 후 애써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 즐거운 수학여행 동안에는 웬만한 장난은 넘어가 주마. 그래서, 뭘 준비했는데?”
“흐흐. 기대하고 계십쇼.”
헌원강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멀어지고 난 후,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동을 멈출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별로 인원 점검을 마친 후 점심 식사를 시작할 테니, 각 선생들은 학생들을 확인하고 내게 와서 보고하시오!”
부관주 곽철우의 말에 강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도중에 낙오하거나 사라진 학생은 없는지, 다치거나 몸 상태가 나쁜 학생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와중에 벌써부터 도시락을 까먹을 생각에 신난 학생들의 부려먹기는 계속되었다.
“선생님. 계속 뛰어왔더니 더워요. 여기 빙공으로 좀 시원하게 해 주세요.”
“얼음 좀 만들어 주세요!”
“검풍으로 벌레들 좀 쫓아내 주시면 안 돼요?”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잡다한 부탁들이 쏟아지자, 백수룡은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애들도 아니고……. 너희들 이게 얼마나 큰 인력 낭비인지 알아?”
밖에서는 무림십존으로 추앙받는 절세고수가 불만을 토로했지만, 청룡학관 학생들은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러나 모두가 백수룡을 괴롭히기 위해서만 혈안이 돼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 선생님. 이거…….”
목형우가 쭈뼛쭈뼛 다가와서 백수룡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민망한지 꺼끌꺼끌한 수염을 긁적이며 그가 말했다.
“별것 아니지만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항상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듯한 녀석도 하나쯤은 있구나.
조금 감동한 백수룡이 흐뭇하게 웃으며 목형우가 건넨 도시락을 받았다.
“고맙다. 이따가 먹을게.”
“조금이라도 따뜻할 때 드십시오. 워낙에 솜씨가 변변찮아서……. 그래야 그나마 좀 먹을 만할 겁니다.”
도시락을 열어 보니 투박한 형태의 주먹밥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백수룡은 그중 하나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음. 먹을 만하네.”
“……정말입니까?”
그 순간, 목형우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
백수룡은 자리로 돌아가는 목형우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쳇. 개방의 보약에 대한 복수였는데……. 원래 미각이 이상한 사람이었나?”
“저 자식이?”
본격적인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파파락지 회원들이 백수룡을 찾아왔다.
그들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백수룡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개를 조금만 왼쪽으로요!”
“손가락은 섬세하게! 계란을 쥐듯이!”
“시선은 슬프게 하늘을 바라봐 주세요!”
다른 짓궂은 부려먹기에 비하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라서 순순히 승낙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얼토당토않은 요구가 많아졌다.
“무복을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게 해 주세요. 쇄골이 살짝 보이게……….”
“아예 다 벗으라고 하지?”
“정말요?! 그래 주시면 더 좋고요!”
“…….”
결국 학생회의 개입으로 파파락지 회원들이 끌려간 후에도, 이런저런 명목의 부려먹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멀리서 백수룡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호에겐 가히 충격의 연속이었다.
“…….”
옛 스승에게 모욕을 즐기는 취향이 있었던가?
아니, 그렇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모욕을 받으면 기억해 뒀다가 몇 배로 갚아주라고 가르치던 사람이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대체 왜 일부러 당해 주는 걸까?
……설마.
일부러 얕보여서 저들을 방심하게 한 후, 한 번에 몰살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
그럴듯한 가정에 자기도 모르게 납득할 뻔했으나, 이내 옛 스승이 과거와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는 사실을 떠올린 사호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호는 더 가까이서 보고자 조금씩 거리를 좁혔고, 옛 스승이 온갖 수모를 겪는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러다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지금! 백수룡 조지기 이천팔백팔십팔번으로 간다!”
헌원강의 외침과 동시에, 청룡오망이 일제히 달려들어 백수룡을 덮쳤다.
“……언제 덤비나 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덤벼드는 제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양손에 창룡신검과 적월을 나누어 들었다.
정작 당사자는 태연했으나, 사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
옛 스승을 죽이는 방법을 이천팔백팔십팔 가지나 만들었다고?
그 정도라면 과거의 자신들보다 더 지독한 원한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 아닌가.
어찌나 놀랐는지 잠시 기척을 드러내고 말았는데, 기감이 예리한 고수들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자네는 누군가?”
노군상이 스르륵 사호의 앞에 나타나 물었다.
그의 깊은 눈빛은 낯선 사내를 경계하고 있었고, 아래로 늘어뜨린 팔에는 은은한 기파가 맺히고 있었다.
“묘하군.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듯도 한데…….”
“…….”
사호는 잠시 갈등했다. 곧장 뒤로 물러날 것이냐, 아니면 노군상을 죽여서 증거를 인멸하고 사라질 것이냐.
다행히 그보다 나은 선택지가 있었다.
퍼어엉!
백수룡에게 맞아서 튕겨 나온 거상웅이 그들 주변에 떨어졌고, 벌떡 일어난 그가 사호를 알아본 것이다.
“음? 만두 사…… 형님 아니십니까?”
거상웅이 말을 바꾸며 사호에게 아는 체를 하자, 노군상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는 거상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었나?”
“예! 백수룡 선생님의 지인입니다.”
얼마 전, 백수룡은 청룡오망에게 사형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기억을 떠올린 거상웅이 사호를 백수룡의 지인이라고 둘러댄 것이다.
“지인이라……. 허허.”
노군상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사호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백수룡을 번갈아 바라봤다.
“관주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자리에 도착한 백수룡은 두 사람을 가로막으며 노군상을 돌아봤다.
설마 사호가 이렇게 쉽게, 게다가 노군상에게 기척을 들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백 선생. 마침 잘 왔네. 자네 지인이 우릴 따라온 것 같은데…… 맞소?”
노군상이 백수룡의 어깨너머로 사호를 바라보며 묻자, 사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정쩡한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려. 무엇 때문에?”
노군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지만, 깊은 현기를 품은 노인의 눈은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스윽.
사호는 주점 주인 내외가 싸 준 만두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간단한 수어를 해 보였다.
“……같이 먹으려고, 라는 뜻입니다.”
“허허. 백 선생과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여기까지 쫓아왔다?”
끄덕.
누구라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었으나, 노군상은 사호의 눈을 한동안 빤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관주님?”
“자네를 만나러 온 손님이니, 자네가 어련히 잘할 거라고 믿네.”
노군상은 백수룡의 어깨를 툭 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사호를 청룡오망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어? 여긴 웬일이슈?”
“그때 같이 축국했던 형님이잖아?”
“만두를 잔뜩 주고 가신…….”
“일단 이쪽으로 앉으세요.”
사호는 얼떨결에 백수룡, 청룡오망과 함께 둘러앉아서 점심 도시락을 나누어 먹게 되었다.
“와, 또 만두 가져왔어요?”
“저희들도 만두 싸 왔는데. 이거랑 같이 드세요.”
“…….”
어린 무인들이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게 적응되진 않았지만, 사호는 만두 외에도 다른 음식을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듣다 보니 옛 스승이 왜 잔심부름 같은 것을 하고 있는지, 백수룡 조지기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 엄청난 숫자는 헌원강이 그때그때 갖다 붙이는 것이라는 사실도.
“선생님. 밥 다 먹고 백수룡 조지기 다시 해도 돼요?”
“니들이 언제는 허락받고 덤볐냐? 마음대로…….”
평소처럼 대꾸하던 백수룡은 사호의 시선을 느끼곤 말을 아꼈다.
“…….”
물끄러미 바라보는 옛 제자의 시선이 그토록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눈빛은 왜 또 저렇게 강렬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건지.
꾸욱.
사호의 주먹이 슬그머니 쥐어지는 모습을 본 순간, 백수룡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이건 청룡학관 학생들만 할 수 있는 거다.”
“…….”
“진짜라니까?”
“…….”
백수룡이 어쩌면 이 순간이 인생에서 맞이한 가장 큰 위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휙!
백수룡과 사호의 고개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적지 않은 수의 낯선 기척이 이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