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35
535화. 늦었잖아요
“……방금 뭐라고 했느냐?”
인피면구를 쓴 악비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기르던 개가 갑자기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저 녀석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정체 모를 사내에게 소가주가 납치되려는 모습을 보았다면 충분히 저런 말을 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악비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귓구멍이 막혔나? 내려놓으라고. 뒈졌으면 곱게 지옥으로 꺼질 것이지, 왜 다시 기어들어 오고 지랄이야?”
상상조차 못 해 본 폭언에 악비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말을 한 상대가 청룡신협이나 염왕 같은 절세고수였더라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고작해야 가문의 양자였다. 가주의 입장에선 가문에서 기르는 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네놈……. 내가 누군지 알고 지껄이는 것이냐?”
분노가 치미는 수준을 넘어서 의문이 생겼다.
악비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던 것을 멈추고 완전히 몸을 돌렸다.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소가주는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스르륵.
주인과 잠시 헤어졌던 악가창이 스스로 움직여 악비의 손에 쥐어졌다. 절세고수의 살기가 단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사람을 깔보는 그 오만한 눈빛을 어떻게 모르겠어? 잘나신 산동악가의 가주 나리.”
그러나 악연호의 표정은 태연했다.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입매를 씰룩이며 조소를 지었다.
순간 악비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알면서도 오만방자하게 굴었단 말이지.”
“나는 처음부터 안 믿었거든.”
악연호는 처음부터 악비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눈알이 뽑히고 짓이겨진 수급은 악비와 몹시 닮아 있었지만, 악연호는 그 얼굴을 본 순간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너희는 소가주님으로 변장해 대신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날을 위해 배워 두거라.
과거 자신에게 소가주를 지켜야 한다며 화장법을 알려 주었던 가주의 수신호위.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마자 죽은 사람이 그라는 것을 확신했다.
“자기랑 닮은 사람을 수신호위로 뽑아서 데리고 다닌 이유가 그거였잖아? 평생을 헌신한 무인을 그딴 식으로 써먹으려고.”
악연호는 혐오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악비를 노려봤다.
만약에라도 악비가 다시 돌아온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같잖군.”
악비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죽은 수신호위는 끝까지 악가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어떤 개와는 달랐지.”
“키우던 개한테 물리면 얼마나 아플지 상상해 본 적 있나?”
“들어주고 있으려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콰콰콰콰콰!
악가창에 무시무시한 와류가 휘감겼다. 손 안에서 회전하기 시작해 창에서 뻗어 나간 칼날 같은 기파가 사방을 할퀴어 댔다.
악가창법 특유의 전사경(纏絲勁)이었다. 저 상태에서 손을 뻗으면 빛살처럼 쏘아진 창이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터였다.
마치 악연호가 겁먹기를 기다리듯, 악비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주에 대한 불경죄. 즉참하겠다.”
악연호도 창을 들었다. 눈을 사납게 치켜뜬 그는 두 손으로 창을 단단히 움켜쥐곤 천천히 호흡했다.
“나한테 당신은 더 이상 가주가 아니야. 나는 이제 악씨 성을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응당 가문에서 내린 은혜를 거두어 가야겠구나. 너의 무공과 목숨까지 전부 내가 준 것이니.”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을 받아 가겠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가문에서 받은 은혜라면 지금까지 충분히 갚았어.”
콰콰콰-!
악연호의 창에도 와류가 휘감겼다. 그것은 천하제일창이라 불리는 악비에 비하면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결코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듯 똑바로 상대를 겨누었다.
“하, 일섬(一閃)이면 심장이 꿰뚫릴 하잘것없는 것이.”
자신을 향하는 창끝을 바라보며, 악비의 입가에 가느다란 비웃음이 맺혔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진득한 살의가 들끓었다.
쿵!
가볍게 발을 구른 것과 동시에 악비의 신형이 사라졌다.
‘온다.’
악연호는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눈으로 쫓으면 늦는다. 지금 믿어야 할 것은 본능과 감각.
그리고 백수룡의 조언이었다.
-자기보다 하수에게 도발당했을 때, 고수들은 보통 가장 손에 익은 직선적인 초식을 펼쳐. 절세고수도 똑같아. 그러니까 넌 그걸 유도해야 해.
방금 전까지 악연호가 악비를 도발하고 조롱한 이유.
십 년 넘게 마음에 담아 두었던 감정을 쏟아 낸 것은, 백수룡이 해 준 조언을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악비는 창을 쓰지. 도발하는 데 성공한다면, 찌르기로 일합에 널 끝장내려 할 거야. 단숨에 심장을 꿰뚫어서 죽이려고 할 테지.
백수룡은 철저하게 악비를 분석했다.
전생에서 그를 살아남게 해 준 것이 바로 집요한 관찰력과 수 싸움이었다.
남궁수와의 대결을 지켜보며 차곡차곡 쌓인 정보를 토대로, 백수룡은 악연호가 악비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넌 악비를 긴장시킬 실력이 못 돼.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면 유일하게 희망적인 부분이 바로 그거야.
-……네?
상대가 자신과 비등한 절세고수라면 악비는 결코 긴장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창을 겨누는 상대가 가문의 양자. 키우던 개나 다름없이 취급해 온 존재라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악비를 분노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세고수에게 한 방 먹일 수는 없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첫 번째 일격을 피하는 거야. 문제는 연호 네 실력으로 보고 피하려면 늦는다는 거지.
-……그럼 어쩌죠?
-한 백 번 정도 죽어 보면서 감각을 익히면 돼.
-진심이에요?
뭐 그런 무책임한 말이 있냐고 따졌지만, 백수룡은 직접 경험시켜 주겠다며 창을 들어서 악연호를 겨눴다.
-지금부터 딱 백 번. 그중 한 번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백수룡은 눈앞에서 악연호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의 찌르기를 보여 주며, 그 찰나의 순간을 낚아채는 감각을 익히라고 했다.
악연호는 몇 번이고 죽음을 경험했다. 눈앞에서 일섬(一閃)이 번뜩일 때마다 창끝이 심장이나 이마, 단전 중 한 곳에 닿아 있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처음에는 피하기는커녕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절세고수의 집중된 살기와 일대를 아우르는 존재감에 압도당한 탓에.
하지만 스무 번, 서른 번이 넘어가자 아무리 예리한 살기라도 점차 익숙해졌다.
-잘 봐. 악비는 무공을 펼칠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습관이 있어. 몸을 부풀린 맹수라고 생각해. 체면과 위신. 특히 자기보다 약한 무인들을 상대할 때는 그런 것을 둘둘 감고 창을 휘두르지.
칠십 번쯤 넘게 죽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수룡의 찌르기에서 군더더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보이는 게 유일한 빈틈이야. 단 한 번. 악비가 너를 무시하고 있을 때 찌를 수 있는 빈틈.
그리고 딱 백 번째. 악연호는 아슬아슬하게 백수룡의 찌르기를 옆으로 피해 내고 반격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성공이다……!
백수룡은 희열에 벅차 몸을 떨고 있는 악연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씩 웃었다.
-실전에서 만나도 그렇게만 해. 내 찌르기도 피했는데 겨우 악비 따위한테 당하겠어?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흐릿하게 다가오는 악비의 신형이 묘하게 선명하게 보인다. 찰나를 압축할 정도로 빠른 속도일 텐데도.
‘확실해. 형님의 찌르기가 더 빨랐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악연호는 본능과 감각, 그리고 백수룡의 찌르기를 피했던 단 한 번의 경험을 떠올리며 몸을 비틀었다.
촤아아아악!
왼쪽 손등에서부터 어깨까지 길게 찢겨 나가며 핏물이 솟구쳤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깊은 상처.
한동안은 창을 휘두르는 것조차 힘들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어찌……!”
하지만 악비가 노렸던 심장에서는 한참 벗어난 위치였다. 당황한 악비의 눈동자가 커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말하지만 단 한 번이야. 피하지 못하면 넌 죽는 거야. 하지만 성공한다면…… 그땐 네 차례야.
악연호가 스르륵 움직였다. 과시하듯 몸을 부풀린 맹수의 유일한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황급히 몸을 트는 악비가 보였다.
하지만 늦었다.
그 순간, 악연호는 귓가에 백수룡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이야. 죽여 버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 일섬(一閃)이 유성처럼 하늘을 꿰뚫었다.
촤아아아아악!
핏물이 밤하늘에 번져 나갔다. 혈향을 머금은 창극이 악비의 얼굴 절반을 찢어 놓으며 지나갔다.
“……!”
인피면구가 떨어진 뺨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광대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조금만 깊었어도 얼굴 한가운데에 창이 박혔을 것이다. 모골이 송연해진 악비가 고함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창을 휘둘렀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가!”
퍼억!
단 한 번의 찌르기에 모든 체력과 내공을 소진한 악연호는 저항하지 못했다. 맥없이 날아가 바위에 등을 부딪쳤다.
인피면구의 절반이 찢겨 더욱 흉신악살처럼 보이는 악비가 성큼성큼 악연호를 향해 걸어갔다.
바위에 등을 기댄 악연호는 피를 토하며 웃었다. 비록 끝장내지는 못해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앞으로 면경을 볼 때마다 떠오를걸. 기르던 개한테 물어뜯긴 자국을.”
“벌레만도 못한 것이……!”
단숨에 찔러 죽일 것이다. 아니, 난도질한 후 효수할 것이다. 그리해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만하세요!”
악연화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점혈을 억지로 풀었는지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악비를 막아섰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패륜을 저지른 가문의 죄인을 감싸는 것이냐?”
“연호를 먼저 죽이려고 한 것은 아버님입니다!”
악연화는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악비의 눈에서 노기가 치솟았다.
“네가 감히……. 비켜라.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면 소가주의 지위마저 잃게 될 것이다.”
“가져가십시오. 단 한 번도 이 자리에 욕심내 본 적이 없습니다. 대신 연호를 죽이실 것이면 저도 함께 죽이십시오.”
“누님…….”
악연호가 그러지 말라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악연화는 멈추지 않았다. 평생 두려워했던 괴물 같은 아버지를 똑바로 노려보며, 오랫동안 숨겨 왔던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해 냈다.
“일평생 단 한 번 연모의 감정을 품었던 사람입니다.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
악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소가주의 입에서 저따위 말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감히, 감히, 감히…….
똑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이를 꽉 악물고 딸의 뒤에 숨은 악연호를 노려보았다.
“그때 죽였어야 했거늘. 내 딸을 유혹해서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다니.”
악비는 창을 들어 자신의 딸을 겨누었다. 싸늘한 눈동자에선 혈육에 대한 일말의 정마저 사라진 후였다.
“가문을 위해, 이 자리에서 천륜을 끊겠다.”
그의 창에 다시금 거센 와류가 휘감길 때였다.
번쩍―!
세상이 잠시 하얗게 물들었다가 다시 밤이 되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강렬했던 순간은 모두의 뇌리에 박혔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빛의 점멸이 연거푸 이어졌다.
번쩍―!
빛이 명멸할 때마다 사방에서 난무하던 고함과 비명이 줄어든다. 전장이 고요해지고 있었다.
쿠르르릉!
벼락에 뒤이어 천둥이 울린다. 그 소리에 일부 치열한 전장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무인들이 싸움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봤다.
한 사내가 하늘에서 전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뇌신(雷神)…….”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새하얀 벼락을 장포처럼 전신에 휘감고 있는 사내.
한 손에는 검을 늘어뜨리고, 무심한 듯 싸늘한 시선으로 전장을 오시한다. 안법이 뛰어난 고수들은 그가 치미는 분노를 누르고 있음을 눈치챘다.
파지지지직!
사내를 감싼 벼락 줄기들은 언제라도 지상에 떨어질 듯 위협적으로 꿈틀댔다. 마치 더 이상의 싸움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대부분이 굳어 버린 가운데, 악연호가 홀로 안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 늦었잖아요.”
마치 그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잠시 후 남궁수는 악연호 앞에 내려섰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남궁수는 검을 들어 악비를 겨누었다.
“창왕 악비. 그대를 혈교와 내통한 혐의로 나포(拿捕)하겠다.”
“건방진……. 무슨 증거로 산동악가의 가주를 나포하겠다는 것이냐!”
“너는 청룡학관 강사에게 위해를 가했다. 나포해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또한…….”
남궁수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변했다.
심하게 다친 악연호, 오면서 본 강사들과 학생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백수룡이 남기고 떠난 서찰.
화를 참는 것만으로도 극도의 인내심이 필요했다.
“네가 혈교와 내통했다는 증거는 널 때려눕힌 후에 찾겠다.”
“미친놈…….”
악비가 욕을 지껄인 순간, 남궁수의 금안에서 벼락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