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40
540화. 꼭 전하겠습니다
콰콰콰콰콰콰!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은 소용돌이였다. 화염과 냉기가 뒤섞여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데, 주변에 있는 바위와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그 안으로 사라졌다.
“으윽…….”
여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용돌이 안쪽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자세를 낮추고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휘말려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염왕과 혈교의 사도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천지를 멸할 듯한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여민의 안법으로는 화염과 냉기가 충돌하는 것만 보일 뿐, 절세고수들의 움직임을 쫓기 어려웠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구음마녀…….”
여민은 자신의 마음에 큰 빚을 남기고 떠난 무인의 별호를 중얼거렸다.
-혹시 하연 언니의 딸이니?
-우, 우리 엄마를 아세요?
악인곡에서 만났던 십대악인의 한 명.
적에게 포위된 청룡오망을 한 차례 구해 주었지만, 나중에는 광증이 도져서 여민을 죽여 음기를 취하려 했었던 악인.
-겁먹을 것 없단다. 괜찮아. 아프게 하지 않을게.
구음마녀는 광인이었다.
잘못된 빙백신공을 익힌 부작용으로 끔찍한 고통을 가진 채 살아야 했고, 그 고통 때문에 광인이자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운명.
-너희 엄마와 나는 같은 곳에서 자랐단다. 비슷한 처지의 여자아이들이 모인 곳이었어.
구음마녀는 혈교의 무공 실험장에 여민의 모친인 은하연과 구음마녀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곳에선 제대로 무공을 배우지 못하면 매를 맞고 굶어야 했어. 매주 아이들이 죽어 나갔지. 그때 하연 언니가 나를 많이 도와줬어. 자기도 배가 고플 텐데…… 내게 먹을 것을 나눠 주기도 했지.
여민은 자신을 바라보던 구음마녀의 마지막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은하연의 딸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의 눈빛과, 그녀의 음기를 흡수하고 싶어 못 견디겠는 광기가 뒤섞인, 그 혼란스러운 눈빛을.
까무룩 의식을 잃은 여민이 다시 깨어났을 때, 구음마녀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멍하니 누워 있던 여민에게 다가온 백수룡은 이렇게 말했다.
-네 몸 안에 깃든 음기에 관해서부터 이야기해 주마.
-……구음마녀가 준 거죠?
-알고 있었구나.
나중에 선생님에게 듣기론, 구음마녀는 마지막 순간 빙정을 만들어 자신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우웅.
몸 안에 깃든 빙정의 기운이 반응했다. 여민은 빙백신공을 끌어올려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돌멩이 등을 쳐 냈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여민은 빙백신공을 익히기 시작하며 속으로 맹세했다. 나중에 구음마녀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겠다고.
물론 주제도 모르고 저 싸움에 끼어들어서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여민은 입술을 깨물고 태풍 속을 노려보았다.
* * *
‘길어 봤자 이백 초식.’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기 전, 이사도는 염왕의 수준을 그렇게 예상했다. 이백 초식 안에 충분히 죽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전대 십존이라 한들,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한 염왕은 아흔에 가까운 노인의 몸. 현 무림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대한 내공을 지녔다곤 해도, 신체가 그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싸움이 길어지면서 이사도는 자신의 판단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빙백신공을 알고 있다.’
단순히 빙공에 대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빙백신공을 익힌 고수와 여러 차례 겨뤄 보고 파훼할 방법을 오랫동안 연구한 듯했다.
자신의 초식을 먼저 읽고 대응하는 상대는 수십 년만이었다. 이사도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오백, 아니 천여 합은 겨뤄야 죽일 수 있겠어.’
물론 전력을 다한다면 빠르게 결판을 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커질 것이다.
그 순간, 이사도는 일사도의 조언을 떠올렸다.
-내가 도착할 때까진 무리해서 싸우지 마라.
최근 삼사도의 예기치 못한 부상과 사사도의 실종 이후, 일사도는 전보다 더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그는 이사도에게 무리해서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조언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이사도는 힘을 온존했다. 염왕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스스로 자멸할 것이 뻔히 보였다.
그러나 염왕은 생각 이상으로 끈질기고 지독했다. 늙었지만 노련한 맹수를 보는 듯했다. 자신의 공격을 버티고 버티더니, 해가 지고나서 시작된 싸움을 명일 새벽까지 끌었다.
‘어떻게 견디는 거지?’
변화의 폭이 극히 적은 사도의 표정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늙고 쇠약한 육신. 시간이 지날수록 괴사가 진행되는 피부.
승산 따위는 없음을 알고 있을 텐데도, 염왕은 불굴의 투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기어이.
“내 혈교의 사도를 저승길 길동무로 삼아, 먼저 간 친우들에게 자랑으로 삼아야겠다.”
퍼엉! 퍼어엉! 퍼버버버버벙!
화염이 응축과 폭발을 거듭했다. 그 충격이 사도의 몸 주변을 두른 서리 방벽을 연신 두들기고 부숴 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악!
불로 뒤덮인 두 팔이 봉황의 날개처럼 거대하게 부풀더니 단숨에 사도를 집어삼켰다. 지독한 열기가 엄습했다.
사도 또한 그에 대응하기 위해 쌍장을 사방팔방으로 뿌렸다. 새하얀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열기를 밀어냈다.
콰콰콰콰콰콰콰!
빙백신공으로 인해 차가워진 공기와 열화신공으로 인해 뜨거워진 공기가 만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일으킨 절세고수들이 그 안에서 생사투를 벌였다.
“……왜 죽지 않지?”
이사도는 불티가 튄 무복 소매를 털어 내며 물었다. 눈처럼 하얀 무복 곳곳이 검게 그을리고, 백옥같은 피부는 붉게 달아올랐다. 처음으로 낭패를 당한 모습이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너를 내 저승길 길동무로 삼겠다고.”
불꽃 그 자체가 된 염왕이 껄껄 웃을 때마다 전신에서 화염이 이글거렸다. 방금 전까지 죽어 가던 노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생명을 불태우면서 얻은 힘은 전성기의 무위를 훌쩍 상회하게 했다. 염왕이 손을 떨칠 때마다 화염 줄기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서리로 이루어진 이사도의 호신강기가 녹아내렸다.
치이이이익…….
끔찍한 열기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호신강기를 바라보며, 이사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염왕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죽일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싸아아아아아-
이사도의 몸에서 가공할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극한의 한기가 끔찍한 열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완성에 이른 빙백신장은 공간마저 통째로 얼려 버렸다.
“무서울 정도로 시리구나. 분명 한창 때의 빙월신녀보다도 강할 터. 허나…….”
염왕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 맞서는 생사대적이, 평생 넘어서길 원했던 빙백신공의 계승자이기 때문일까.
“나 또한 과거의 사마량이 아니다.”
염왕은 쌍장을 앞으로 내밀고 휘몰아치는 냉기를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그를 휘감은 불꽃이 뒤로 긴 꼬리를 남겼다.
거대한 빛이 폭발하고, 뒤늦게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콰쾅!
이후, 두 절세고수가 만들어 낸 소용돌이가 소멸했다.
거짓말처럼 깨끗해진 새벽 하늘에서 두 절세고수가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했다.
“…….”
“…….”
그들은 낭패한 모습으로 마주 섰다.
사도는 오른쪽 소매가 완전히 불타 사라졌다. 어깨부터 팔뚝까지 끔찍한 화상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고작해야 팔 하나였나?”
염왕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몸에서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연소되고 남은 잿더미처럼 황량한 모습.
자신의 생명을 불사른 대가로 두 눈마저 멀어 버린 탓에, 염왕은 사도가 서 있는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만 끝내거라.”
염왕은 그 말을 내뱉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도의 공격은 없었다.
“……빙백무?”
의문이 깃든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는 사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사도여. 무얼 하는 것인가. 이 늙은이의 목을 꺾으란 말이다.”
염왕이 다시금 재촉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눈이 멀고 모든 감각이 희미해진 탓에, 염왕은 사도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왜 끝을 내지 않는 것이냐. 날 조롱하는 것인가? 그럴 성정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염왕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꼿꼿이 선 자세는 여전했지만, 꺼진 촛불이 마지막 온기를 잃듯 천천히 의식을 잃었다.
“몇 마디라도 남기고 올 것을 그랬군…….”
그때였다.
“지금이라도 남기시오. 그 정도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으니.”
낯선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염왕의 몸에 극양의 기운이 잠시 돌아와 꺼져 가는 불꽃을 붙들었다.
“……누구인가?”
염왕은 자신의 등에 장심을 댄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다른 목소리가 대신했다.
“관주님.”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목소리에, 염왕의 텅 빈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청룡신협. 자네인가?”
맹인이 된 염왕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적발적안의 핏빛 장포를 두른 사내와, 자신에게 극양지기를 불어넣는 노인의 모습이.
차라리 보이지 않아 다행일지도 몰랐다.
“예. 맞습니다.”
“허어, 드디어 돌아왔군. 인질은 구했나?”
“무사히 구했습니다. 곧바로 왔습니다만…… 사도였습니까?”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이었으나 염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못 본 것을 보니, 날 두고 그냥 떠난 모양이군. 하기야, 대라신선이 돌아와도 살려 낼 수 없는 몸이니.”
백수룡에게선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염왕이 그를 재촉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어서 가서 학생들을 구하게! 아직 다들 싸우고 있을 게야. 혈교의 망령들이 아이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에도, 염왕은 끝까지 학생들을 염려했다.
“……알겠습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수룡의 머리 색과 눈동자가 서서히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전하고픈 말은 없습니까?”
“말 몇 마디만 전해 주게.”
염왕은 백수룡에게 유언을 전했다. 사마영과 강사들, 주작학관 학생들에게 전하는 짧은 내용이었다.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뒷일은 제게 맡기고…… 이제 편히 쉬십시오.”
“군상이에게도 안부 전해 주게. 저승에 아직 네놈 자리는 없으니 꿈도 꾸지 말라고.”
“꼭 전하겠습니다.”
염왕의 지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가 낮고 긴 한숨을 쉬었다.
“고되군. 너무 오래 살았어. 먼저 간 친구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빙월신녀도 반겨 줄 겁니다.”
백수룡이 불쑥 말했다. 그러자 염왕이 놀라서 물었다.
“허어? 자네가 그걸 어찌 아나?”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신 괜히 또 추근대지는 마십시오. 옆에서 부군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겁니다.”
“허어! 마치 아는 사이처럼 이야기하는구나!”
“만나서 제 흉이나 보지 마십시오.”
“하하하! 반드시 자네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만!”
염왕은 청년처럼 한동안 껄껄 웃었다. 그러다 스르륵 잠에 빠져들 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편히 쉬십시오.”
염왕 사마량.
혈교와의 전투에서 향년(享年) 팔십팔 세를 일기(一期)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