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39
539화. 미안해하지 않아도
서서히 동쪽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흐릿한 새벽빛에 어둠이 조금씩 밀려나면서 무너진 협곡 일부가 드러났다. 그곳에는 지난 수백 년을 통틀어 가장 끔찍하다고 할 만한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안 돼, 안 돼…….”
“의식을 놓으면 안 됩니다! 곧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니 정신을 차리세요!”
“거짓말이지? 나 놀래키려고 장난치는 거지? 나 진짜 화낼지도 모르니까 죽은 척 그만해…….”
어둡고 긴 밤이었다. 고함과 비명, 역한 피비린내 속에서 모두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거나, 혹은 영면에 들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싸늘한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자들과 부상에 신음하는 자들. 충혈된 눈으로 적을 찾아다니는 자들과 실성한 듯 괴소를 흘리는 자들이 혼재했다.
위지천은 인세에 지옥이 펼쳐진다면 아마도 이런 광경일 거라고 생각했다. 시체들 중에 아는 얼굴을 발견할 때면, 소년은 저도 모르게 검혼의 검파를 꽉 쥐었다.
“…….”
남궁수가 알려준 방향으로 갈수록 시체가 늘어났다.
혈교도들과 악가 무인들의 시체가 가장 많았지만, 주작학관과 청룡학관의 옷을 입은 시신들도 간혹 보였다.
‘선배들이랑 수혁이는 괜찮을까.’
청룡오망뿐만 아니라 유이란 선배도, 상검연 학생들도 걱정이 됐다. 독고준 선배와 당소소 선배, 허리를 다친 목형우 선배, 같은 수업을 듣는 선배들과 친구들, 늘 다음번에는 이겨 주겠다며 씩씩거리던 남궁석도.
-이 할애비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단다.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 할아버지가 평생 도망다녔던 곳에 자청해서 가야 하는지, 그냥 백룡장에서 함께 지내면 안 되는 건지.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어르신은 내가 반드시 구해 올 테니까.
할아버지에 이어 선생님도 혈교의 함정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함정이라도 선생님이라면 벌써 돌아왔어야 했다. 늘 그랬으니까. 위지천은 청룡신협보다 뛰어난 무인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혈교…….”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적을 향해 휘두르는 검에 맺힌 검기가 예리하다 못해 섬뜩했다. 그를 막아서는 혈교도들이 갈기갈기 난도질당했다.
“가라앉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진작 검귀로 변해 혈교도들을 사냥하고 다녔을 것이다.
연소하가 엄한 눈으로 위지천을 질책했다.
“살검. 그거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곧바로 주화입마로 이어져. 너도 알고 있잖아?”
연소하의 말에 위지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고 심호흡을 했다.
“……죄송해요.”
“바로 정신을 차리는 걸 보니 경험이 많은가 보네. 어서 가자.”
“네.”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늦게 도착할수록 피해가 더 커질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속도를 높였다. 위지천은 더 이상 시신들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휘이익!
두 사람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천재라고 해서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상처를 입고, 내공도 점점 소진되어 갔다. 쉴새 없이 달리는 것만으로도 상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력의 소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혼자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서로의 존재가 큰 위안이자 힘이 되었다. 힘겨운 와중에도 간혹 대화를 나누며 지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청룡신협 선생님 말이야.”
문득 연소하가 이야기를 꺼냈다. 위지천은 가만히 들었다.
“혈교와 항상 이런 싸움을 해 온 거야? 가장 많이 싸웠잖아.”
“……저도 다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분명…….”
또다시 앞을 막아서는 적이 있었다. 말을 멈춘 위지천은 자세를 낮추고 파고들어, 검을 아래에서 위로 베어 올렸다.
푸화아악!
심장이 베인 혈교도의 가슴에서 핏물이 터졌다. 위지천이 옆을 힐긋 보자, 연소하도 적의 목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누구보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실 거예요. 항상 그랬으니까.”
더 빨리 강해져서, 선생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중얼거린 위지천은 다시금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지가 머지않았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겠다고? 그 나이에?”
연소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년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혈교도들과 전투를 벌이는 무인들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대규모였다.
그중에서도 앞장서서 혈교도를 날려 버리는 커다란 덩치들과 귀기를 흘리는 흑도가 위지천의 눈에 띄었다.
“선배들!”
그쪽에서도 위지천을 알아보았는지,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내공을 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마치 사자후처럼 쩌렁쩌렁했다.
“천아!”
“지천아!”
“선배님들! 수혁아!”
다들 무복이 피투성이였다.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서로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상으로 기쁜 소식은 없었다.
* * *
청룡오망이 다시 뭉쳤다.
거상웅과 야수혁, 헌원강이 위지천을 반겼다. 독고준과 당소소, 목형우도 그곳에 있었다. 다들 사투를 겪었는지 청룡학관의 푸른 단체복이 붉게 변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아무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위지천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민 선배는요?”
“아직 안 왔어. 뭐, 금방 찾아오겠지.”
헌원강이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여민을 기다리는 사람이 헌원강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소하야!”
연소하도 주작학관 강사들, 그리고 학생들과 재회했다. 사마영은 달려오자마자 연소하를 덥석 끌어안곤, 다친 곳은 없냐며 여기저기 확인해 보았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은요?”
“누가 누굴 걱정해. 너만 안 보여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저만요?”
가슴을 쓸어내린 사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전부 무사하다고 알려주었다.
“다들 무사해. 부상이 심한 아이들도 있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야.”
주작학관은 천주봉 혈사라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아픔을 두 번은 반복하지 않겠다는 염왕과 강사들의 강한 의지가, 학생들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며 싸우게 만들었다.
청룡학관도 사정은 비슷했다. 강사들이 앞에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인솔한 덕분에, 학생들의 피해는 기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연소하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선생님들의 시신을 봤어요.”
“싸움이 모두 끝나면, 함께 선생님들을 수습해 주자.”
“……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애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죽은 무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였다.
위지천과 연소하는 악연화를 찾아가 남궁수의 말을 전했다.
“협곡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찾았어요. 남궁수 선생님이 혼자서 그곳을 지키고 계세요. 혈교의 주력으로 보이는 적들과 싸우면서…….”
“그곳이 어딥니까?”
강사들도 함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고, 회의라고 할 것도 없이 즉시 결론이 내려졌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중상자들은 들것에 실어서 이동하고, 학생들은 부상자들을 지키면서 진형 안쪽에 위치시켜 주십시오.”
산동악가, 청룡학관, 주작학관이 함께 움직이는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다. 방진을 형성한 채 웅크리고 있던 그들이 한데 모여 움직이자, 혈교도들의 공격이 거세졌다.
사방에 흩어진 혈교도들이 산발적으로 덤벼들었고, 통제를 잃은 혈강시들과 피에 취한 마인들도 공격을 해 왔다. 피와 시체를 이용해 펼치는 술법도 종종 목격되었다.
“멈추지 마라!”
“좌측에 혈강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병장기에 기를 실을 수 없으면 물러나라!”
점점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새운 전투가 종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혈교의 병력은 하나로 뭉치면서도 점점 퇴각하고 있었는데, 그 방향에서 연신 뇌성벽력이 몰아치고 있었다.
“모두 힘을 내게! 저곳이 우리의 마지막 전장이 될 것이야!”
청룡학관 부관주, 곽철우가 강사들을 독려했다. 혈교의 마인에게 왼쪽 눈을 잃은 그는 급조한 안대를 차고 있었다. 도를 휘두를 때마다 안대에 핏물이 배었다.
“……관주님.”
곽철우는 고개를 돌려 무너진 협곡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멀어서 희미하지만, 그곳에서는 지금도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노군상이 불사마존에 맞서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를 도우러 갈 만한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저희가 안전하게 대피시킬 테니……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 말을 들은 강사들이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학관 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은 먼 하늘에 생겨난 소용돌이를 수시로 힐긋거렸다.
콰콰콰콰콰콰!
인간이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소용돌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처럼 맹렬하게 회전했다. 염왕은 저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할아버지도요.”
작게 중얼거린 사마영은 곧바로 화염을 만들어 전면의 적들에게 뿌렸다.
지금은 서로의 무운(武運)을 빌어줄 뿐이었다.
* * *
콰콰콰콰콰콰!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몰아치는 강풍의 한 가운데서, 염왕은 생각했다.
‘고되구나.’
지금 동경을 들여다 본다면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다. 주홍빛 장포는 찢어져 너덜너덜했고, 정성껏 기른 수염도 엉망이 되어 있을 터.
손바닥과 손가락에서는 더이상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법을 부딪칠 때마다 지독한 한기가 침투했는데, 그걸 열화신공의 열기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피부가 얼어붙고 녹아내리길 반복하면서 괴사가 시작되었다.
검게 변한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본 염왕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주변을 휘감던 불꽃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과연 혈교의 사도군. 그래도 빙공을 상대로라면 승산이 있다고 여겼거늘…….”
“자신할 만하다. 너는 제법 강했다.”
새하얀 바람을 전신에 두른 여인이 말했다.
눈처럼 흰 무복에 소매만 붉게 물들인 모습으로, 고고하게 하늘에 떠 있었다.
염왕과 달리 크게 낭패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소매의 끝부분이 조금 타 버린 정도만 제외하면.
“빙백신공을 상대하기 위해 연구라도 한 것인가. 진작 죽었어야 했건만, 아직까지 버티고 있군.”
오만하다기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해 말하는 듯했다. 무기질적인 표정과 목소리 탓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오래전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서 말일세.”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염왕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문득 아주 오래된 옛일이 떠올라서였다.
-나와 무공을 겨루자고?
-극양지기를 다루는 내 무공과 극음지기를 다루는 당신의 무공! 둘 중 누가 더 위인지 가려 봅시다!
-정말 그게 전부?
-그, 그리고 비무가 끝나면 서로의 무공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해 보는 게 어떨지…….
-어디서 개수작이니?
태어나서 처음 맛본 압도적인 패배.
그날 이후 열흘간 계속 도전했으나 모조리 패배했다.
처음에는 잘 보이고 싶어서였고,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였지만, 결국에는 순수하게 무인으로서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빙월신녀 은예린.
잊을 수 없는 별호와 이름을 떠올린 염왕이 사도에게 물었다.
“너는 빙월신녀의 후인인가?”
이후에도 강호를 주유하며 수많은 고수를 만나고 겨뤄 보았지만, 염왕이 자신의 목표로 두고 절차탁마한 대상은 언제나 빙월신녀였다.
십존이 되어 만인의 추앙을 받을 때도 그 목표는 변치 않았다. 비록 두 사람이 다시 만나 겨루는 일은 없었음에도.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빙월신녀’가 언급된 순간 내내 미동도 않던 사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사도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싸아아아아-
대신 소름 끼치는 냉기가 그녀의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북해의 눈보라를 모조리 불러온 듯했다. 반대편에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염왕의 불꽃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염왕은 오히려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군. 그녀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어.”
“……무슨 소리지?”
사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염왕은 스스로를 불태워 생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렸다.
화아아아아아악!
거푸집에 풀무질을 한 것처럼, 화염이 한순간에 크게 부풀어 올라 염왕의 전신을 휘감았다.
부풀었던 화염은 이내 서서히 가라앉아 불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너를 내 길동무로 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