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8
57화. 빗방울이 멈췄다철모르던 어린 시절, 헌원강과 팽사혁도 친하게 지내던 때가 있었다.
-안녕……?
-안녕!
두 소년은 동갑이었고, 둘 다 가주의 아들이었으며,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목도를 가지고 놀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랑 대련할래?
-응! 좋아!
그 시절 헌원강의 아버지는 종종 아들과 함께 팽가를 찾아갔고, 어린 헌원강은 또래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헌원세가와 하북팽가가 어떤 관계인지.
아버지가 왜 그리 팽가를 자주 찾아가야만 했고, 돌아올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었는지를.
-사혁아! 나 왔어!
-강아!
어린 헌원강은 그저 또래 친구를 만나서 놀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함께 목도를 휘두르며 뒹굴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아하하! 내가 또 이겼다!
-우씨! 다음엔 내가 이길 거야!
대련은 항상 헌원강의 승리로 끝났다.
팽사혁은 질 때마다 씩씩거리면서 다음엔 자신이 이길 거라고 다짐했지만, 헌원강의 눈에는 팽사혁의 공격이 훤히 다 보였다.
-다음에 또 올게! 그때 또 놀자!
-빨리 와야 해!
-응!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헌원강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팽가 사람들은 헌원세가 사람들보다 좋은 옷을 입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며, 일하는 사람도 훨씬 많았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에는 그게 뭘 뜻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렇게 두 소년의 나이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였다.
-강! 대련하자!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좋아. 얼마든지 덤벼!
거의 반년 만에 만난 팽사혁과의 대련은 유독 힘들고 이상했다.
그때 팽사혁은 이미 가문의 절기인 오호단문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내공도 몇 배나 늘어 있었다.
헌원강도 진천도법을 배우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진본이 유실되고 겨우 절반쯤 복원된 진천도로는 오호단문도를 상대할 수 없었다.
‘절대 안 져!’
하지만 헌원강의 재능은 부족한 도법을 메우기에 충분했다.
임기응변으로 몇 차례 위험한 공격을 피한 후, 팽사혁의 비어 있는 어깨를 노리고 강하게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팽사혁도 이번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헌원강을 이기겠다며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고, 반격을 시도하려 했다.
기합과 함께 두 소년의 공격이 엇갈렸고,
-아악!
헌원강의 도가 팽사혁의 머리를 때렸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팽사혁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 비명을 듣고 팽가의 가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소가주님!
-공자님!
두 소년 다 무공이 미숙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소가주를 본 팽가의 가신들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소가주님께 살수를 쓰다니!
-은혜도 모르는 놈!
-소가주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네놈 목숨 하나로 끝날 것 같으냐!
-헌원! 이놈들이 또……!
-빨리 소가주님을 의원으로 데려가라!
자신을 둘러싼 고수들이 내뿜는 살기에, 헌원강은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한 팽사혁은 곧바로 의원으로 실려 가고, 잠시 후 하북팽가의 가주와 헌원세가의 가주가 함께 나타났다.
-……네가 내 아들에게 살수를 썼느냐?
헌원강 앞에 나타난 팽가의 가주가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헌원강은 앞선 가신들보다 그가 몇십 배는 더 무서웠다.
-저, 저는…….
어린 헌원강은 압도적인 공포에 몸을 덜덜 떨었다.
집채만 한 호랑이와 마주친 기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그대로 갈기갈기 찢길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가주님!
헌원강의 앞을 가로 막고 선 그의 아버지가, 하북팽가의 가주 앞에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 아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짓입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설마 무릎까지 꿇을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하북팽가의 가주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만큼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가주님. 두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잘 어울려 지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같이 놀아 주었다고 해서, 내 아들이 당신 아들이랑 같다고 생각한 거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같을 리가요. 모두 제 아들의 잘못입니다.
아버지의 비굴한 모습에 팽가의 가주는 혀를 찼고, 마침 의원으로 실려 간 팽사혁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팽가의 가주는 두 사람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돌아가시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겠소.
-정말 감사합니다. 팽가의 자비로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신 그 녀석을 이곳에 데려오지 마시오.
-예. 다시는 근처에 공자님 주위에 얼씬도 못 하게 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헌원강은 마차에 탄 아버지의 옆얼굴이 십 년은 더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오늘은 좀 쉬고 싶구나.
-……예.
그날 이후, 헌원강은 하북팽가에 놀러 가지 않았다.
팽사혁에게서 여러 차례 편지가 왔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고 모두 찢어 버렸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열다섯이 되어 청룡학관에 입관한 후였다.
.
..
“고작 이거밖에 안 되냐?”
팽사혁은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헌원강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헌원강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끄윽…….”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입술은 터져서 피가 줄줄 흘렀다.
내상을 입었는지 얼굴색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반면 팽사혁은 소매의 옷자락이 조금 잘려나갔을 뿐,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압도적인 결과 앞에 구경꾼들이 숨을 죽였다.
“저 헌원강이 꼼짝도 못 하고 당하다니…….”
“팽사혁이 저렇게 강했어?”
“괜히 오대세가의 소가주겠어? 애초에 우리랑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그런데 왜 천무제에는 안 나가는…….”
“전부 닥쳐!”
팽사혁의 사자후에 수군거리던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팽사혁은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처음으로 헌원강을 이겼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뿌드득.
이를 간 팽사혁이 헌원강을 노려봤다.
“어릴 때랑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
“네놈이 술 처먹고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죽어라 무공을 수련했다. 네놈이 열등감에 젖어 도망치기만 할 때, 나는 더 강해지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 왔다.”
“크큭……. 물론 그러셨겠지.”
헌원강이 실없이 웃더니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말했다.
“가문에서 준 비싼 영약을 처먹고, 가문의 최고수들에게 사사하면서, 가주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대단한 무공을 익히면서 노력하셨겠지. 그러고도 나보다 약하면 그게 병신 아니냐?”
독이 묻어나올 것 같은 한마디 한마디.
시퍼렇게 뜬 눈에서는 응어리진 분노가 묻어났다.
하지만 팽사혁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 새낀 남들 무공 수련하는 시간에 혓바닥만 단련했나.”
“어. 혓바닥 놀리는 데는 영약도 비급도 잘난 가문도 필요 없거든.”
“그래서 어쩌라고.”
“……뭐?”
팽사혁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헌원강을 바라봤다.
“내가 잘난 가문에서 태어난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너 지금 그걸 몰라서……!”
헌원강이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그 순간 팽사혁의 발이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끄악! 이 개새끼가!”
복부를 감싸 쥔 헌원강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끅끅댔다.
그 앞에 선 팽사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 가지만 묻자.”
“엿이나 먹어라 이 개…….”
“네가 나보다 더 강해지면, 내가 가문의 힘으로 헌원세가를 핍박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냐?”
“…….”
헌원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마주친 팽사혁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커다란 분노와 실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네 눈에는 내가 그런 놈으로 보였냐?”
“…….”
한 번도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버지가 팽가에서 겪었던 수모와 서러운 기억.
자신을 쓰레기 보듯 하던 하북팽가의 가신들과 가주의 눈빛.
시간이 지나면 이 녀석도 결국 그들과 똑같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답해 봐. 이제 도망갈 데도 없으니까.”
팽사혁은 손을 뻗어 산발이 된 헌원강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팽사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내가 정말 그럴 사람으로 보였냐고. 이 씨발 새끼야!”
“……그야 모르지.”
퍼억!
얼굴을 얻어맞은 헌원강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잘 들어라, 헌원강. 옛 친구로서 마지막으로 해 주는 충고다.”
팽사혁의 두 눈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항상 자신을 피하기만 하던 헌원강이 처음으로 먼저 다가오기에, 뭔가 변한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녀석은 열등감으로 가득한 청룡학관에서도 가장 구제 불능의 열등감 덩어리일 뿐이다.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마라. 백 장 밖에서도 내가 보이면 알아서 피해. 또 네 면상을 보게 되면…….”
팽사혁은 옛 친구에 대한 마지막 남은 감정을 정리하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땐 진짜로 벌레처럼 밟아 버리고 싶을 것 같으니까.”
“…….”
“한심한 새끼.”
팽사혁은 홱 몸을 돌려 대연무장을 떠났다.
그를 추종하는 학생들, 그리고 구경꾼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헌원강은 대연무장 한복판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시발…….”
졌다.
질 거란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팽사혁의 말대로 자신이 시간이나 축내며 망나니로 살아가는 동안, 녀석은 오대세가의 후계자에 어울리는 수련을 해 왔을 테니까.
‘저 새낀 왜 청룡학관에 들어온 거야?’
다른 오대세가의 후계자들은 모두 천무학관에서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팽사혁만은 청룡학관에 입관했다.
당시에 그것만으로도 큰 화제가 돼서, 망해 버린 헌원세가의 후계자 따위가 입관한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헌원강! 오랜만이다!
불현듯 삼 년 전 입관식 날이 떠올랐다.
입관식이 시작되기 전, 멀리서 자신을 발견하고 걸어오던 팽사혁.
-몇 년 동안 뭐 하고 지냈냐? 편지 보냈는데 못 받았어? 너희 집에 놀러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못 가게 해서…….
-……꺼져.
-……뭐?
-꺼지라고.
-……야. 넌 그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할 말……. 야! 어디가!
몸을 돌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팽사혁이 뒤에서 자신을 불렀지만 무시했다.
그렇게 3년을 피해 다녔다.
처음에는 먼저 다가오던 팽사혁도, 헌원강이 자신을 계속 무시하고 피하자 점점 태도가 싸늘하게 변했다.
-어이. 헌원가의 망나니. 오늘도 어디 가서 술 처먹고 왔냐?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남이사.
-한심한 새끼. 평생 그렇게 살 거냐?
헌원강이 점점 안하무인의 망나니가 되어가는 동안, 팽사혁은 동아리연합회를 장악하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팽사혁은 학생회장 독고준과 함께 청룡학관 최고의 후기지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매년 천무제에 참가한 독고준과 달리 팽사혁은 단 한 번도 천무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뿐.
‘왜 안 나가겠어?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지.’
‘천무제에 나가면 곧바로 실력이 들통 날 테니까.’
‘여기서나 지가 왕이지. 천무제에 나가면 용봉에도 못 들걸?’
학생들은 천무제에 나가지 않는 팽사혁을 뒤에서 씹어 댔다.
용 꼬리보단 뱀 머리가 되길 선택한 소인배.
청룡학관에 입관한 것도 천무학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느니, 이곳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편하게 왕 노릇을 하려고 온 거라고.
하지만 헌원강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헛소리. 그 녀석이 경쟁이 무서워서 청룡학관에 들어왔을 리가 없잖아.’
어릴 때도 자신에게 매번 져도 언젠간 꼭 이기겠다며 계속 도전하던 녀석이다.
그런 승부욕을 가진 녀석이, 경쟁이 무서워서 천무학관 대신 청룡학관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근데 왜…….’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다.
그렇다면 팽사혁은 왜 청룡학관에 왔단 말인가.
그러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들었다.
-네 눈에는 내가 그런 놈으로 보였냐?
‘설마 나 때문에?’
말도 안 된다.
겨우 어릴 때 잠깐 친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따라 청룡학관에 입관했단 말인가.
-내가 정말 그럴 사람으로 보였냐고. 이 씨발 새끼야!
설마.
그걸 물어 보려고.
“하. 그럴 리가 없잖아…….”
헌원강은 대연무장에 누운 채 멍한 표정으로 흐린 하늘을 올려봤다.
툭, 툭툭…….
갑자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쏴아아아…….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얻어맞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푸흐흐…….”
정말로 개 같은 날이다.
헌원강은 팔로 얼굴을 가려 쏟아지는 비를 막았다.
빗물이 상처로 들어가 온몸이 쓰라렸지만, 지금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안녕?
-나랑 대련할래?
-우씨! 다음엔 내가 이길 거야!
-빨리 와야 해!
-아악!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멋대로 떠오른다.
이 기억들이 빗물에 모두 씻겨 내려갔으면.
그리고 나도 이 빗물에 녹아서 없어져 버렸으면.
헌원강이 비를 맞으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얼굴로 떨어지던 빗물이 멈췄다.
쏴아아아아…….
빗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었지만, 얼굴에 떨어지던 빗방울은 멈췄다.
그리고.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머리 위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헌원강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한 남자가 우산을 쓰고 그를 물끄러미 내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