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22
622화. 기연이 아니라
“과거, 천하제일을 다투는 네 명의 절세고수가 있었습니다.”
백수룡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지자, 별달리 내공을 싣지 않았음에도 일대가 고요해졌다.
꿀꺽.
누군가가 긴장감에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용봉비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이들이 백수룡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립이 되기도 전에 십존에 이름을 올린 절세고수이자, 인세에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분위기를 지닌 미남자.
청룡신협 외에도 그를 수식하는 많은 말들이 있었다.
경악할 정도로 빠르게 도달한 무공의 경지는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그의 제자들 또한 하나같이 신공절학을 익혔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비슷한 의문이 존재했을 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빨리 강해졌으며, 그 많은 신공절학을 알고 있을까?’
천하에서 가장 많은 비밀을 가진 사내가, 비로소 자신의 근원을 밝히려 하고 있었다.
백수룡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가벼운 농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명의 고수는 하나같이 콧대가 높았습니다. 성격들은 얼마나 괴팍하고 지랄 맞은지, 서로 제대로 말문을 트기까지 일 년은 걸렸다고 하더군요.”
네 사부를 떠올린 백수룡은 한번 피식 웃고는 담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결코 담백하지 않았다.
“절세고수들의 무공을 탐낸 혈교가 그들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배신과 협박, 기만에 당해 혈교의 지하뇌옥에 갇혔습니다. 혈교는 그들의 무공을 빼앗고자 온갖 고문을 했고…….”
네 명의 절세고수가 남긴 유일한 전인을 통해서, 잊혀진 진실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들!”
“저주받을 혈교 같으니!”
혈교에서 벌인 천인공노할 짓들이 언급되자 관중석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일부는 참지 못하고 욕을 했다.
반면 구파의 무인들은 당혹스러워했다. 검성과 불존, 연배가 지긋한 노인들은 무언가를 떠올리는지 미간을 좁히고 있었고, 그보다 연배가 낮은 자들은 청룡신협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에도 백수룡은 담백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 갈 뿐이었다.
“그 숱한 고문과 협박에도 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인내심을 발휘해 지하뇌옥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무려 십 년을 기다려서…… 드디어 실행에 옮기던 날.”
잠시 말을 끊은 백수룡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빙 둘러봤다.
수많은 기파가 뒤섞여 있어, 특정한 누군가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백수룡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곳 어딘가에서 옛 제자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 아이들 때문에라도, 더 이상 사부들의 역사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네 절세고수는 끝내, 혈교의 지하뇌옥을 부수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보였다. 관중석에 앉은 어린아이들, 소년 소녀들이 백수룡의 이야기에 깊게 몰입해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마치 노인이 손자들을 둘러앉혀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건 꾸며 낸 옛이야기가 아닌, 백수룡에게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연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탈출을 눈치챈 혈교가 앞을 막아섰습니다. 혈교의 수많은 병력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덤벼들었고, 끝내 혈마마저 나타났습니다. 절세고수들은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들에겐 돌아가야 할 가문, 챙겨야 할 식구들, 목숨보다 소중한 혈육,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 이야기가 뻔한 영웅담이었다면 어땠을까.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은 악한들을 물리치고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진부하고 행복한 결말이었다면.
백수룡은 이 이야기의 결말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한 어조를 유지했다.
“그 처절한 싸움 끝에, 네 절세고수는 혈교가 지닌 전력의 절반 이상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치명적인 부상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관중석 곳곳에서 안타까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백수룡의 이야기에는 듣는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흡입력이 있었다.
단순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를 가진 절세고수여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 겪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내는 듯했기에.
어느새 수많은 사람이 숨을 죽이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구멍이 뚫린 몸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부서진 단전에서는 공력이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백수룡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자주 꾸는 꿈이 있었다.
다 함께 혈교를 탈출한 후, 고향으로 돌아간 사부들이 행복하게 각자의 삶을 사는 미래.
그러다가 은사부의 혼례라든가, 맹사부의 환갑잔치 때 만나 떠들고, 모용사부의 자식도 장성해 혼례를 치르고, 가문으로 돌아간 헌원사부가 한 자루 도를 휘두르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모습.
그 곁에는 자신과, 혈교의 망령에서 벗어난 옛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네 명의 절세고수는.”
눈을 뜬 백수룡은 완성된 이야기의 결말을 조금 바꾸었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혈교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백수룡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무공을 잃고 말았습니다. 혈교의 추적을 피해 모처에 숨은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다하기 전에, 자신들이 혈교에서 겪은 일과 신공절학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 이야기 어디에도 혈교의 무공교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백수룡의 목적은 잊혀진 사부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그들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었다.
자신의 환생 같은 허황된 이야기로 신뢰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은 모용혼, 헌원후, 맹호악, 은예린입니다. 각각 검존, 파천도, 녹림투왕, 빙월신녀라 불렸던 절세고수들. 그들이 바로…….”
백수룡은 힘을 주어 짧은 이야기를 끝맺었다.
“나의 스승들입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모두 했다. 백수룡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현양자를 바라봤다.
“이제 궁금증이 풀렸나?”
“하! 대체 무슨 헛소리를……. 급조해서 꾸며 낸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믿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믿게 해 주면 될 일이었다.
백수룡은 발끈하는 현양자를 무시하고, 아직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불존과 검성을 바라봤다.
“불존과 검성에게 묻겠다.”
그것은 더 이상 무림의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진정 청룡신협이 앞서 말한 네 절세고수의 공동전인이라면, 그의 배분은 천하의 그 누구에게도 존대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당신들은 구파와 무림맹이 혈교를 무너뜨려 무림을 구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정녕 당신들의 힘만으로 그게 가능했다고 생각하나? 혈교에 쳐들어갔을 때, 적이 온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나?”
“……아미타불.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지.”
구파의 두 거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 전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서진 전각들과 생각보다 적었던 적의 숫자.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피를 흘리며 덤벼들던 광신도들.
그 당시, 두 사람은 그것이 혈교에서 벌어진 내란 때문이라고 들었다…….
백수룡은 입가에 가느다란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당시 구파의 수뇌부가 혈교의 내란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내 스승들이 만들어 낸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
“물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어. 혈교를 무너뜨린 것 또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순간, 백수룡의 무복이 부풀며 전신에서 서서히 기세가 피어났다.
화아아아악!
동시에 아직도 비무대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구파의 중견고수들에게 막대한 압력이 가해졌다.
“큭……!”
그들은 유사시에 청룡신협을 제압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그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내 앞에서 당신들의 희생으로 무림을 구했다느니 어쩌느니 떠들 자격이 없다는 건 알아 둬. 그건 내 스승들의 희생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백수룡의 냉소적인 말투에도 구파의 고수들은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기세를 견뎌 내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겠구나! 삿되고 무도하다! 세 치 혀로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 군중을 희롱하고 구파를 농락하려 들다니!”
그저 나이를 먹어 점창파의 태상장로가 된 것이 아니라는 듯, 현양자가 백수룡의 기세를 떨쳐 내며 일갈했다.
“모두 정신 차리시오! 이자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믿는단 말인가? 혈교에서 사용된 마공에 대한 변명이 옛 고수들의 신공절학을 얻은 것이라고?”
점창파 노고수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과거 사도에게 베여 생긴 상처가 함께 꿈틀댔다.
그는 청룡신협이 혈교와 관계된 인물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백수룡을 노려보는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네 말이 진실임을 확인할 증거나 증인이 있느냐? 기연이라는 말로 전부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니라.”
“나도 이걸 단순한 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백수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부들과의 인연을 기연이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양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사부들에게 받은 건, 고작 기연 따위가 아니라 기적이었거든.”
“아직도 말장난을……!”
현양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백수룡이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은 현양자뿐만이 아니었다.
휘익! 휘익! 휘익!
나이가 지긋한 구파의 장로들,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들, 심지어 일부 장문인들마저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순식간에 넓은 비무대가 꽉 찬 것처럼 느껴졌다. 구파의 주전력에 가까운 고수들이 피워 내는 기세는 절세고수의 존재감마저 밀어냈다.
“정녕 옛 절세고수들의 무공이란 말인가? 어찌 증명할 수 있지?”
“자네가 보았다는 그 기록을 어디서 찾았는지 말하게.”
“혈교와 관련된 일입니다. 단순하게 넘어갈 수 없지요.”
“먼저 저자의 제자들이 익힌 내공이 정순한지 맥문을 쥐어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비무대 위가 마치 자신들의 세상인 것마냥, 백수룡을 포위한 구파의 고수들이 빠르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이 보기에 청룡신협의 이야기에는 모순이 가득했다. 그것을 증명할 확실한 증거나 증인 또한 없었다.
“선생님…….”
“……저희 싸워야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라.”
백수룡은 양옆에 서 있는 위지천과 헌원강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 주었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혀 오는 구파의 고수들을 향해 싸늘하게 웃었다.
“믿지 못하겠으면 어쩔 건데?”
“더 이상 두고 볼 것 없소이다. 일단 저자를 제압한 후에…….”
현양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여러 사람들의 기척 때문이었다.
비무대를 둘러싼 주변에서 소란스러움이 커졌다. 가장 먼저 나선 이는 무림맹 소속의 한 청년이었다.
“저는 멸사단의 모용준이라 합니다! 혈교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모용세가의 유일한 직계입니다.”
갑작스레 모용세가의 생존자가 등장하자, 구파의 고수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고수들의 시선에도 모용준은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 또한 위지천 학생과 같은 무극검을 익혔습니다. 청룡신협에게 직접 사사했습니다. 모용세가의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그분은 검존의 제자가 확실합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본인은 헌원세가의 가주인 헌원수라 합니다!”
헌원강을 닮은 중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감격에 벅찬 얼굴로 백수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인께서 진작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듣고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이상, 그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내 아들이 익힌 무공은 본가의 무공입니다. 헌원세가의 도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지요. 사흘 밤낮이라도 말해 줄 수 있지만…… 지금은 딱 하나만 말하겠습니다. 내 목숨과 가문의 명예를 걸고 단언하건대, 청룡신협은 파천도 헌원후의 제자가 확실하외다!”
지금은 영락했다고 하나, 한때 하북팽가와 함께 천하제일도가를 겨루었던 가문의 주인이 자신의 목을 걸고 장담했다.
증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궁세가는 청룡신협이 혈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랬다면 본가가 혈교에 습격받았을 때 그에게 은혜를 입을 일도 없었을 터. 구파는 무례를 멈추고 물러나시오.”
남궁세가주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하게 경고했으며.
“쯧. 청룡신협이 혈교의 앞잡이였으면 혈교의 독에 당한 이 늙은이의 목숨을 살렸겠소? 명문대파란 자들이 어찌 이리들 생각이 짧을꼬…….”
천무제 내내 구파와 거리를 두고 있던 용두방주 또한 한마디를 보탰고.
“북해빙궁은 청룡신협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 왔다. 누가 감히 본궁의 은인을 핍박하는가!”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구파를 향해 서슬 퍼런 냉기를 뿜어냈으며.
“우습군. 의심스러우면 우르르 몰려와서 겁박하는 게 명문정파란 놈들의 방식인가?”
흑사련주 추혼궁귀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활을 만지작거렸다. 그 옆에서는 도마 소지광이 팔짱을 낀 채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총사범은 검존의 무공을 익혔음을 내게 이미 보고했소이다. 조사 결과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
무림맹주 또한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백수룡을 포위한 구파의 무인들을, 어느새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포위한 형국이었다.
“왜…….”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오!”
“어찌하여 다들 저자의 편을 드는 것인가!”
구파의 고수들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상황에서 그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언제나 천하무림의 중심이었던 자신들이 이런 일을 겪으리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기에 더욱.
자신들이 정의(正義)가 아닌 취급을 받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다시 묻지.”
느긋한 목소리에 그들의 당황한 시선이 다시 백수룡을 향했다.
그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당신들이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그의 질문에, 비무대 위에 서 있는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