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23
623화. 그 일만 아니었다면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에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못다 한 말이 아직 남았더냐?”
차를 한 모금 마신 매극렴이 노을이 지는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노인의 몸가짐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엄격하고 정갈했다.
오늘처럼 많은 일을 겪고 숙소로 돌아온 날에도 그는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하나뿐인 손주가 천하를 충격에 빠뜨릴 만한 이야기를 만인 앞에서 전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평소와 같은 조손 간의 담소일 뿐이었다.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창밖을 바라보던 백수룡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파의 고수들에게 포위되고도 되레 그들을 압도하던 절세고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십존도 외조부 앞에서는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백수룡은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홀로 간직해 왔던 진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쏟아 냈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과연 잘한 행동이었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너무 섣부르게 행동한 것은 아닐까.
오늘 일로 이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까.
옛 제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미 저지른 일이다. 답지 않게 무얼 그리 신경을 쓰는 것이냐?”
생각이 많아 보이는 백수룡에게, 매극렴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차를 따라 주었다.
찻잔을 두 손으로 쥐자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백수룡은 매극렴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천무제에서 벌어진 소란이 일단락되고 숙소로 돌아온 후, 백수룡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매극렴과 백무흔에게 자신의 전생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는 것이었다.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역천신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가족에게만큼은 꾸며 내지 않은 온전한 진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혈마의 존재에 대해서는 끝내 이야기하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는 그저 심마의 위험이 있다고만 전했다.
짧지 않은 이야기가 끝난 후, 매극렴은 내심 각오를 다진 백수룡이 무안할 정도로 덤덤하게 반응했다.
“네가 전생에 무림을 구해서 이번 생에는 이토록 인복이 많은 모양이구나.”
백무흔이야 진실의 상당 부분을 이미 알고 있어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지만, 고지식한 무인인 매극렴의 반응도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손주가 전생에 혈교의 무인이었다는 것도, 심지어 혈마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도 매극렴에게는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백수룡이 당황하여 백무흔에게 물어볼 정도였다.
“혹시 아버지가 미리 말하셨어요?”
“내가 미쳤냐? 그랬다간 정신 나간 놈이라면서 내 머리통을 열어 보려고 하셨을 게다.”
피식 웃은 백무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인어른. 저는 학생들을 좀 다독이러 가겠습니다. 수룡이와 조금 더 이야기 나누고 오십시오.”
“그래. 먼저 가거라.”
그렇게 백무흔이 자리를 비워 주었고, 매극렴은 남아서 손주와 둘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매극렴은 처음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고얀 녀석.”
“……죄송합니다.”
“할애비한테는 비밀로 하고, 제 아비한테만 비밀을 말해 줘?”
“……그 부분을 잘못한 겁니까?”
“아무렴. 잘못해도 한참은 잘못했지. 찬물도 위아래가 있거늘, 할애비를 이리 푸대접한단 말이냐. 혹 할애비가 알면 무림맹에 신고라도 할 줄 알았더냐?”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골이 난 할아버지를 연기한 매극렴은 이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수룡아. 나는 네게 속은 적이 없다.”
백수룡의 어깨가 움찔했다.
노인의 깊은 눈은 백수룡이 주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진실을 감춰 왔다는 생각에 미안함을 품고 있으리라.
매극렴은 그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 백수룡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었다.
“일일이 사과하고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비밀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서로가 알면서도 묻지 않는 것이다. 굳이 상처를 헤집을 필요가 없듯이. 내가 아는 네 사람들은 모두 세심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더구나.”
“……예. 알겠습니다.”
백수룡은 짧게 대답했다. 그 말 외에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백수룡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역천신공 이야기는 어디 가서 하지 않는 게 좋겠죠?”
“당연하지 이놈아! 듣는 사람 심마에 걸리게 할 일 있느냐?”
조손 간에 가벼운 농이 오가고, 비로소 백수룡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미소가 맺혔다. 더 이상 가족에게까지 진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부담감을 한결 덜어 놓은 모습이었다.
“훨씬 보기 좋구나. 나는 이만 가 보마.”
“벌써요?”
손자의 표정이 밝아진 것을 본 매극렴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은 손주였다.
왜 그토록 쫓기듯이 바쁘게 살았는지 이제야 겨우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매극렴은 그런 손자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하고 안쓰러웠다.
백수룡의 손을 한번 꼭 잡아 준 매극렴이 말했다.
“다들 충분히 기다려 줄 게다. 그러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천무제가 끝난 후에도 시간은 많을 터이니.”
“……예.”
백수룡은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매극렴이 나간 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백수룡을 찾아와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눴다.
노군상은 자네가 이렇게 배분이 높을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신입강사 동기들은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곧 평소처럼 떠들었다.
무림맹주와 용두방주가 함께 찾아와 옛 혈교와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추혼궁귀와 도마, 녹의수사는 백수룡의 스승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하다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천무학관주는 벌게진 눈으로 찾아왔다가 문전박대당했으며.
남궁수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무흔이 청룡오망과 함께 돌아왔다.
“이 녀석들. 궁금해서 한숨도 못 잘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지 뭐냐. 그래서 데려왔다.”
분명 아들과 둘이서 따로 이야기하고 싶었을 텐데도, 백무흔은 넉살 좋게 웃으며 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학생주임의 뒤를 따라온 청룡오망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선생님도 피곤하실 텐데…….”
“저희는 나중에 다시 와도 괜찮아요.”
“밖에 선생님 만나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엄청 많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들 궁금한 것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워낙에 대단한 고수들이 청룡신협을 만나겠다고 줄을 선 탓에 지금까지 눈치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들어와. 안 그래도 너희들한테 할 이야기가 많거든.”
백수룡이 호기심 가득한 제자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도 안심한 듯 웃어 보였다.
잠시 할 말을 고르던 백수룡이 입을 열었다.
“우선…… 너희의 사조들에 대해서 하나씩 말해 주마.”
천무제의 마지막 날을 앞둔 밤.
백수룡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사부들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 * *
동이 트기에도 이른 새벽.
“이 새벽부터 어디 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헌원강은 멋쩍은 표정으로 돌아봤다. 조용히 나선다고 나섰는데 들킨 모양이었다. 여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헌원강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잠이 안 와서. 먼저 가서 칼이나 좀 휘두르고 있으려고.”
딴에는 그럴듯한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여민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헌원강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오늘이 마지막 날이잖아. 팽사혁 그 새끼한테 갚아 줄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좀 되고…….”
“같이 가 줘?”
순간 헌원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혼자 갈 테니까 넌 들어가서 자.”
헌원강은 평소처럼 자신감 있게 씨익 웃어 주었다. 여민은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따가 봐.”
여민이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헌원강은 몸을 돌려 대회장으로 향했다.
조금 전 피워 올렸던 웃음은 어디로 갔는지, 달빛 아래에 비친 소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헌원강은 지난밤에 스승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수라혈천도는 원래 헌원세가의 무공이다. 그 당시 파천도라 불렸던 헌원세가 최고의 천재, 내 스승 중 한 분인 헌원후가 창안했지.
-……광마 말하는 거죠?
청룡오망 중 유일하게, 헌원강은 자신의 사조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백수룡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헌원 사부의 별호였지.
가문을 멸문 직전까지 몰고 간 혈사를 일으킨 범인.
헌원강은 어려서부터 광마 헌원후가 혈사의 범인이라고 믿었다.
여름 방학 때 아버지에게 진범은 따로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광마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헌원 사부는 죽는 순간까지 가문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자신의 행동이 가문에 큰 누를 끼쳤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
광마 헌원후가 헌원세가를 몰락하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무공을 완성하겠다는 일념으로 백인비무행을 벌였고, 지나치게 잔인한 손속으로 무림공적이 된 인물이었다.
-백인비무행을 벌일 당시 헌원 사부는 심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라혈천도를 완성해야 한다는 집념이 광기를 불렀고, 그걸 잘 제어하지 못했지. 그의 손속이 점점 잔인해지자 일부 정파의 무인들이 그를 말리려고 나서기도 했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지.
이야기를 해 주던 백수룡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무작정 헌원후의 편을 들어 주지도 않았고, 사건을 왜곡하거나 미화하지도 않았다.
-팽가의 소가주를 죽인 것은 심마가 가장 심할 때 저지른 실수였다고 했다. 친우였다더군. 그날 이후로 자주 악몽에 시달렸고, 죄책감으로 인해 더더욱 무공의 완성에 매달리게 됐지. 어찌 보면 무공으로 도망친 거다.
헌원세가가 쇠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자, 과거 자주 왕래가 오갈 정도로 두터웠던 헌원세가와 하북팽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바로 그 사건이었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팽가주의 눈치를 볼 일도, 어린 시절 헌원강과 팽사혁의 사이가 틀어질 일도 없었다.
-헌원 사부는 끝까지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수라혈천도는 그의 사무친 후회 속에서 완성된 무공이다. 그래서 사부들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처절하고 지독한 것일지도 모르지.
퍼억!
대회장에 도착한 헌원강은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내공도 싣지 않고 휘두른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젠장…….”
꽉 악문 잇새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수룡에게 광마 헌원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헌원강은 미치도록 답답하고 복잡한 심정이었다.
가문의 기대를 배신하고 무공을 완성하겠다며 도망친 천재.
무공에 미쳐 친우를 죽이고,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고 몰락하게 만든 원흉.
그랬던 주제에, 평생 가문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다가 죽어 버린 한 사내의 이야기.
그런 그가 가문에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 수라혈천도였다.
“나더러 그런 무공으로 팽사혁이랑 싸우라는 거냐고…….”
하북팽가의 소가주를 죽인 무공.
만약, 자신이 팽사혁과의 비무에서 그 살기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끔찍한 선조의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자 헌원강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어이. 헌원강.”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팽사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헌원강을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