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54
654화. 아껴 둔 한 마디
그는 망망대해 같은 심연을 부유하고 있었다.
‘…….’
이곳에서는 감각이 전부 사라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닿을 수도 없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알지 못했다.
덧없는 시간을 유수히 흘려보내며, 몸을 말아 웅크리고 스스로의 존재마저 천천히 잊어 갈 뿐이었다.
‘내가…… 누구였더라?’
한때는 그도 이 심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던 적이 있었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도 잊었다. 다만 스스로가 많이 지쳤다는 것은 기억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최선을 다했어.’
비록 그 최선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았으며,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지치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웅크린 몸을 더욱 작게 말았다.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조금은 포근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젠…… 쉬고 싶어.’
그는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리하여 비로소 완벽한 안식이 찾아오기를.
-선생님!
순간 아득하게 먼 곳에서 들려오는 환청에 그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몸을 더 웅크리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외면하려 했다.
-당신은 우리의 질문에…….
-혼자 지옥으로 도망칠 생각 따윈…….
-죽더라도 남의 손에는…….
온갖 환청들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약간의 빛이 움트는 느낌에 그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여전히 심연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결국 절망한 그가 다시 몸을 웅크리려 할 때.
-애송아.
몹시 그리운 목소리와 함께, 망망대해 같은 심연에 거대한 울림이 번졌다.
쿠우웅-!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그리운 목소리들과 함께, 그가 갇힌 심연에 거대한 울림이 전해졌다.
-제자야.
-오랜만이구나.
-보고 싶었단다.
망망대해 같았던 심연에 거대한 진동이 연달아 퍼졌다. 그와 동시에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먼 곳에서부터 조금씩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심연의 한 부분이 갈라지고 희미하게 틈이 비쳤다. 한 줄기의 빛이었다.
“……사부들?”
그는 자신이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희미하지만 따뜻한 빛을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곳은 망망대해 같은 심연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는 웅크린 채 모든 것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빛을 향해 헤엄쳤다.
‘나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본능이라는 듯, 심연을 거슬러 빛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곳에 그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 * *
콰콰콰콰콰콰콰!
세찬 태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심상 세계에 불어닥치던 태풍과는 달랐다.
혈마의 의지에 심상 세계가 공명하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혈마를 포위한 채 몰아치는 기파의 소용돌이였다.
“어떻게 너희가 이곳에 존재할 수 있지?”
혈마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면전에 닥쳐든 맹호악의 주먹을 가까스로 받아 낸 후였다. 일격에 금이 간 뼈가 순식간에 회복되고 있었다.
맹호악은 섭리를 벗어난 혈마의 공능을 보고도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좋아하는 역천의 기운 덕분이다. 섭리가 비틀렸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 아니냐?”
“허튼소리. 이곳은 내 세계다. 오래전에 죽은 혼백 따위가 멋대로 날뛸 수 있는 곳이…….”
촤아아악!
하늘을 통째로 찢어발기는 참격이 혈마의 가슴에 상처를 새겼다. 급히 물러나는 혈마를 광마 헌원후가 따라붙으며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기생충 같은 마귀 주제에 함부로 떠드는군. 이곳은 네가 아니라 내 제자의 심상 세계다.”
“들었느냐? 우리 정파 샌님이 화가 많이 나셨단다.”
“닥쳐라. 무식한 산적 놈.”
맹호악을 한 번 째려본 헌원후가 수라혈천도를 펼쳐 혈마를 몰아붙였다. 그의 등 뒤에서 혈천수라가 포효하며 혈마의 몸에 수십 줄기의 상처를 남겼다.
“적당히 해. 제자를 토막이라도 낼 셈이야?”
쩌저저저적……!
핀잔 어린 목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불어온 북풍한설이 혈마를 옥죄었다. 은예린의 손목에서 한 쌍의 빙백환이 순백의 기류를 뿜어냈다.
“건방지구나! 그래 봤자 오래된 혼백에 불과한 것들이……!”
갑자기 나타난 세 절세고수의 합공에 손발이 어지러워진 혈마가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전신에서 줄기줄기 뿜어진 역천의 기운이 심상 세계와 공명했다.
화아아아악-!
“짓이겨서 먼지로 만들어 주마.”
천지간에 가득한 역천의 기운을 이용한다면 불가능은 없었다. 자신의 의지로 구현한 심상 세계 안에서라면 더더욱, 혈마는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잠시 후, 스스로 신이라고 여겼던 혈마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던 심상 세계의 법칙이 더 이상 순종하지 않았다. 막대한 압력이 절세고수들을 짓누르지도, 후기지수들의 몸에서 그 혼백들을 쫓아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네 절세고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하얀빛이 심상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맹호악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우리 애송이가 이 심상 세계 만들 때, 자신보다 더 간절히 떠올린 게 누구일 거 같으냐?”
“뭣……?”
“네놈이 아무리 잘난 괴력난신이라고 한들, 이 세계에서는 우리보다 뒷전이란 뜻이다.”
콰아앙-!
허공을 밟은 맹호악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순식간에 혈마의 면전에 도달한 그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의 전신에서 천하를 짓누를 듯한 가공할 기세가 피어올랐다.
“동생들. 우리 제자 놈이 깨어날 때까지 이 잡귀를 먼지 나게 두들겨 패 주자고.”
“닥쳐라. 누가 동생이냐.”
“……둘 다 적당히라는 말뜻을 모르는 거지?”
맹호악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사나운 기세로 혈마에게 덤벼드는 헌원후와, 심상 세계의 온도를 통째로 낮추며 혈마가 빠져나갈 곳을 막아 버리는 은예린.
그들과 혈마의 신형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사방으로 굉음을 터트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
사도들은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웬만해서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멍한 모습이었다.
그때, 아직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검존이 사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들 지쳐 보이는구나. 잠깐이라도 호흡을 고르거라.”
“왜…….”
일사도는 수십 년 전 마지막으로 본 것과 똑같은 검존의 얼굴을 바라봤다.
과거 혈교를 탈출하려던 그들을 막아섰던 자신들은 분명 죽어서도 잊힐 리 없는 원수일 터였다.
그런데 왜, 검존은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단 말인가.
그때 검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신창이가 된 사도들의 몸을 살피면서였다.
“언제부터 선천지기를 끌어서 쓰고 있었더냐?”
“……이 상황에서 중요한 질문인가?”
생사대적과 싸우는 일이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가진 내공만으로 맞설 수 없기에 선천지기를 끌어다가 썼다. 수명을 갉아먹는다고 해도 응당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검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는 끌어다 쓰지 말거라. 너희들의 스승이 슬퍼할 것이니.”
“…….”
검존은 일사도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려 혈마와 싸우고 있는 녹림투왕, 광마, 빙월신녀를 바라봤다.
그들은 전성기를 능가할 만큼 눈부신 무위를 떨치며 혈마를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혈마 또한 쉽게 당하지 않고 매섭게 반격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어린 사손들의 몸에 가는 부담이 큰 탓이지. 결국은 너희들이 해내야 할 것이야.”
“……무엇을? 어떻게?”
일사도는 자연스럽게 묻고 있었다.
검객으로서의 실력이라면 이미 검존을 뛰어넘었다고 자부했다.
그럼에도 그는 검존에게 조언을 구했다.
무극검을 창안한 사조(師祖)라면 무언가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면서.
그리고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었다.
“검에 하고 싶은 말을 담아서 휘둘러 보거라.”
“……뭐?”
“너희의 스승에게 하고 싶었던 말, 서운했던 감정들, 애증과 분노, 오랫동안 쌓인 응어리를 모조리 무공에 담는 것이다.”
우우웅-!
검존은 수십 년 만에 쥔 검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주름진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깃들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무공으로 이어져 있음이니, 그것으로 너희의 스승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너희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이 서투르다고 해도, 저 아이라면 알아들을 게다. 누구보다 눈치 빠른 녀석이 아니더냐?”
그 말에 잠시 서로를 바라본 사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도가 친우들을 대표해 검존에게 대답했다.
“알겠소. 그리 해 보지.”
“그리고 사조에게는 말을 높이거라.”
“……예.”
검존이 내뿜는 은근한 박력에, 일사도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잠시 쉬면서 내공과 체력을 회복한 사도들과 검존이 싸움에 합류하자, 맹호악이 그들을 힐끗 돌아봤다.
“대형 오셨소? 너희도 왔느냐. 어서 한 손씩 거들어라.”
한 사내로부터 이어진 스승과 제자들이 같은 마음으로 내공을 끌어 올리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만난 그들의 무공이 서로 공명하며 거대한 기운을 일으켰다.
화아아아아악!
고금을 통틀어 가장 괴이한 존재인 혈마조차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했다. 역천의 기운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헛된 짓이다. 너희가 이런다고 그가 깨어날 것 같은가!”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혈마를 여덟 명의 절세고수가 포위했다. 맹호악이 주먹을 우두둑 풀며 씨익 웃었다.
“우리가 빈틈을 만들 테니, 너희가 한 방씩 깊게 먹여 줘라. 세상모르고 자는 놈도 벌떡 일어나게 말이다.”
이후 펼쳐진 싸움은 혈마를 포위한 네 사부와 사도들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하고 싶었던 말을 담아서.’
‘우리가 느꼈던 감정과 원망들.’
‘당신에게 듣고 싶었던 대답들.’
무공에는 무인의 정신과 의념이 깃들기 마련이다.
검존의 조언대로 하고 싶었던 말을 각자의 무공에 담아 전력으로 부딪칠 때마다, 사도들은 스승의 감정과 기억들이 조금씩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너희들이 몹시 미웠다.
-너희가 강해지는 것은 내가 죽을 날이 가까워진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너희들에게 다른 감정이 생겨나더구나.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너희를 위해서도 그것이 나았지.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증오할 자격이 있다.
기억 속의 교관은 피를 흘릴지언정 눈물은 흘리지 않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도들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냉정하던 얼굴 뒤에, 그가 마음속으로 자신들을 위해 흘린 수많은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스승의 기억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심상 세계에서, 비로소 온전히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너희들을 구하고 싶었다. 구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살아남거라.
하늘을 넘길 소망했던 혈마는 쏟아지는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방해하지 마라! 나를 방해하지 말란 말이다!”
혈마는 멀어지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하늘에는 점점 더 균열이 커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마귀야. 정 가고 싶으면, 우리 제자는 내놓고 너 혼자 꺼지거라.”
맹호악이 혈마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지면에 절반쯤 몸이 파묻힌 혈마가 거칠게 꿈틀댔다. 완전히 실성한 듯 하늘을 올려보며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하늘이여! 그토록 나를 거부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해도 부족하단 말인가?”
끅끅거리며 피를 토해 낸 혈마의 눈에 자신을 끝없이 방해하는 버러지 같은 자들이 보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그 순간 혈마의 입가에 섬뜩한 조소가 어렸다.
“어차피 하늘을 넘지 못할 거라면, 세상 그 누구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리라. 차라리 이 몸과 함께…….”
하늘을 향하던 혈마의 손가락이 자신의 심장으로 뚝 떨어졌다. 그 끝에 날카로운 기운이 맺힘과 동시에 표정이 변한 네 사부와 사도들이 순식간에 날아왔다.
덥석.
그러나 그보다 한발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혈마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기 직전, 사곤이 그 손을 꽉 붙들었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
사곤은 거칠게 저항하는 스승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혈마가 내뿜는 사나운 기파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아껴 둔 한 마디를 말하기 위해, 한 글자씩 정성 들여 발음했다.
“백수룡.”
“……!”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이름을 지어 준 당신의 이름을 내 목소리로 이렇게 불러 보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혈마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