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55
655화. 잘 봐 주시오
“너……!”
핏물을 머금은 듯한 새빨간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격노를 띤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내게, 무슨 짓을……!”
목에 핏대를 세운 혈마가 이를 악물며 사곤을 노려봤다. 할 수만 있다면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 광포한 시선이었다.
사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록 술법의 힘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은 육성으로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스승의 손을 단단히 붙든 채 입 모양만으로 계속 말했다.
‘백수룡. 당신은 백수룡입니다. 혈마 따위에게 지지 마십시오.’
혈마의 눈동자에 비친 사곤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 스승이 돌아오리라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제 와서, 그가 돌아올 수 있을 것, 그만, 멈춰라……!”
처음에는 사곤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이내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말로 바뀌었다.
돌연 혈마가 고통스러워하면서 몸을 마구 뒤틀었다.
사곤은 그를 붙든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혈마는 심연을 깨고 나오려는 백수룡을 억누르며 으르렁거렸다.
“한낱, 필멸자 따위가, 나를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수백 년이 넘도록, 품어 온 간절한 염원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하늘을 향해 치켜뜬 혈마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입가에 맺힌 조소는 더욱 짙어졌고, 나른하고 요사스러웠던 목소리는 어느새 굶주린 짐승처럼 변했다.
그 주변에 내려선 사부들과 사도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어떻게든 도와야…….”
“잠시만 지켜보자꾸나.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듯하니.”
앞으로 나서려던 사도들은 검존의 만류에 멈춰 서서 친우와 스승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그런데 사도들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 가고 있었다. 얼굴에는 흐르지 않았던 세월의 흔적들이 늘어나고, 청년의 것처럼 매끄러웠던 손등에도 노인의 잔주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선천지기를 끌어다가 쓴 대가였다.
“…….”
네 사부는 사도들의 모습을 잠시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때 발작하며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던 혈마의 표정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몸의 뒤틀림도 잦아들었다.
“사곤……. 와 주었구나.”
이내 평온해진 표정으로 그가 사곤에게 말을 걸었다. 사곤의 손에서 저도 모르게 힘이 풀릴 때였다.
콰앙!
뇌기를 두른 주먹이 혈마의 얼굴을 후려쳤다. 상체를 반쯤 일으켰던 몸이 다시 뒤로 넘어가 바닥에 처박혔다.
“서, 선생님? 지금 무슨…….”
깜짝 놀란 거상웅이 당황한 표정으로 남궁수를 돌아보았다. 사도들과 사부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남궁수는 피가 묻은 주먹을 털어 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삿된 것이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혈마가 괴소를 터트리며 다시 발작을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하늘에 대한 저주와 방해꾼들에 대한 모욕 어린 말들이 쏟아졌다.
맹호악이 혀를 차며 혈마를 노려봤다.
“거머리 같은 마귀 놈. 어디 얼마든지 더 연기해 봐라. 그런다고 우리가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
그 순간, 독기를 품은 혈마의 눈이 스르륵 풀리더니 눈동자를 몇 차례 깜빡였다. 그리고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사부들……?”
빠악!
맹호악이 고민도 하지 않고 휘두른 주먹에 백수룡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음?”
한발 늦게 맹호악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조금 전의 목소리에서 역천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차 싶은 순간, 주변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이 무식한 산적 놈! 하나뿐인 제자를 죽일 셈이냐?”
“알아보긴 뭘 알아봐?”
“자네는 정말…….”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맹호악이 황급히 제자를 일으켜 안고 흔들었다. 사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곤 옆으로 비켜 주었다.
“애송아, 애송아! 정신 좀 차려 봐라! 그거 한 대 맞았다고 다시 기어 들어간 건 아니지?”
“……그만 좀 흔드시오. 골통이 깨질 것 같으니까.”
다행히 백수룡은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맹 사부를 물끄러미 올려보더니, 멍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환청이 아니었군. 거대한 심연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사부들의 목소리가 들렸소.”
혈마와의 긴 사투 끝에 돌아온 백수룡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보였지. 그걸 보고 헤엄치기 시작했소. 가다 보니 저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리더군. 무작정 헤엄칠 수밖에 없었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
하하…….
허탈하게 웃은 백수룡은 맹 사부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진짜 사부들이오? 혹시 내가 죽어서 귀신이 된 건가? 아니면 귀신을 볼 수 있게 된 거요?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벌써 죽기에는 아쉬운 게 많아서…….”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잠꼬대를 하는구나?”
씨익 웃은 맹호악이 제자의 머리통을 겨드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알밤을 마구 먹였다. 정신이 번쩍 든 백수룡이 앓는 소리를 냈다.
“커헉! 그만, 그만하시오 맹 사부! 제자들도 있는데…….”
“사부가 오랜만에 만난 제자한테 이 정도 장난도 못 친단 말이냐?”
그사이 다른 사부들도 백수룡에게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괜찮은 것이냐?”
“몸이 많이 상했다. 심상 세계가 아니었다면 버티지도 못했을 게다.”
”당신들이 할 말은 아니잖아. 사손들 몸으로 실컷 무공을 펼쳐 놓고서는…….”
항상 따스한 눈으로 웃어 주던 모용 사부.
덤덤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잔정이 많았던 헌원 사부.
비로소 한 쌍의 빙백환을 손목에 찬 은 사부의 핀잔 어린 웃음까지.
백수룡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사부들…….”
“행여라도 질질 짤 생각은 마라. 네가 그러면 이 사부들은 소름 돋아서 당장 성불해 버릴지도 모른다.”
맹 사부가 제자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퍽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감동에 겨워 눈물이 찔끔 나오려다가도, 산통을 다 깨는 말에 황당해서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참나, 농담을 해도 꼭 그렇게 해야겠소?”
백수룡은 사부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구구절절 많은 말을 나누기보다는 잠시 눈을 맞추고, 미소 띤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길 바란다는 것을.
아주 짧은 만남이기에 더욱 아무렇지 않게, 평범하게 제자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들의 눈길과 손길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며, 백수룡은 짧은 재회의 시간을 음미했다.
“……잠시만. 제자들에게 인사 좀 하고 오겠소.”
고개를 돌린 백수룡의 시야에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는 남궁수와 거상웅, 그리고 한곳에 따로 모여 있는 사도들이 보였다.
먼저 남궁수와 거상웅에게 눈인사를 건넨 백수룡은 사도들에게 걸어갔다.
“너희들…….”
제 나이에 맞는 모습을 찾아가는 사도들의 얼굴을 본 순간, 백수룡은 목이 메어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선천지기를 많이 소모했구나.”
사도들은 희미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사곤이 그런 친우들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오히려 세 사도들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직은 저희 차례가 아닌 듯한데.”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일사도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들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남아 있다는 말이었다.
이사도와 삼사도도 고개를 끄덕이며 차례대로 말했다.
“지금은 사조(師祖)들에게 양보하겠습니다.”
“저희끼리 먼저 나눌 이야기도 있고요.”
그것은 사부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오라는 배려였다.
“……고맙구나. 그럼 잠시만 기다려다오.”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다시 사부들을 돌아봤다. 네 사부의 몸이 서서히 하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파아아앗…….
심상 세계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거의 끝나 간다는 의미였다.
잠시 사손들의 몸을 빌려 심상 세계에 현현했을 뿐, 본래 그들은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네 사부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사부들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백수룡은 그런 사부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갑자기 말이냐?”
고개를 끄덕인 백수룡은 씩 웃더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혈마검과 적월이 동시에 날아와 그의 양손에 잡혔다.
“잘 봐 주시오. 너희도 보거라.”
제자들에게도 당부한 백수룡은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파란 기류가 그의 몸을 휘감으며 긴 꼬리를 남겼는데, 마치 한 마리의 청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저 애송이가 설마…….”
“……완성한 것인가?”
“하하하! 최고의 선물이 되겠구나!”
“너라는 녀석은 대체…….”
백수룡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사부들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자신들의 무공에 자부심을 가진 절세고수들이었다. 제자의 몸에서 합일되어 가는 기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백수룡은 소용돌이치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균열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 눈앞에 보일 때까지.
콰콰콰콰콰콰콰!
소용돌이치는 하늘 너머로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개벽(開闢).
하늘을 열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겠다는 혈마의 오랜 숙원.
그 지독한 꿈이 시작된 계기는 알지 못하지만, 예상대로 통로를 눈앞에 두자 혈마가 반응했다.
“하늘을…… 넘어라.”
“그래. 사라지지 않고 거기에 숨어 있을 줄 알았다.”
백수룡은 내면에서 꿈틀대는 혈마의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놈이 숨어서 다시 기회를 노릴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혈마를 없애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정신을 위협당할 것이다. 백수룡은 놈과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역천의 운명이여. 너는 나와 함께 하늘을 넘어야 한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오직 너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그 말은 즉, 나만이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눈앞에 다른 세상이 보이니 마음이 급한가 봐? 갑자기 말이 많아졌는데.”
“결국 너도 나처럼 될 것이다! 네가 앞으로 느끼게 될 수많은 고독과 아픔들. 나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걸 왜 모르느냐!”
“천만에. 나는 너 같은 괴물이 될 생각이 없어. 저 사람들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고.”
지상을 한번 바라본 백수룡은 이내 자신만의 무도(武道)를 펼치기 시작했다. 두 손에 나눠 쥔 검과 도를 자유롭게 휘두르고, 춤을 추듯 몸을 회전시키면서 무한에 가까운 초식을 풀어냈다.
무극검.
수라혈천도.
녹림십팔식.
빙백신공.
신공절학에 담긴 스승들의 정신과 의지, 후대에까지 전해질 그 이름들을 담아 한바탕 살풀이하듯 신명 나게 펼쳐 냈다.
콰콰콰콰콰콰콰……!
천지간에 가득했던 역천의 기운이 역으로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벌어진 균열을 통해 역천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혈마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으나 백수룡은 듣지 못했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무공을 펼쳐 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눈을 반쯤 감고 무심하게 검무를 추는 그의 모습에, 지상의 모두가 잠시 넋을 잃었다.
“그만! 그만해라! 더 이상 하면 하늘이……!”
하늘이 다시 닫히고 있었다.
천지간에 가득한 역천의 기운을 모조리 우주로 내보내자, 어긋났던 섭리가 제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혈마가 더욱 절박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리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잊었더냐? 너는 천음절맥이다. 역천의 기운이 모두 사라지면 너는 다시…….”
“상관없어. 저 하늘만 닫을 수 있다면.”
백수룡은 삶에 초탈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몸 안에 쌓여 있는 역천의 기운마저도 전부 다 균열 너머로 밀어 넣을 기세였다.
우우우우웅!
그러자 혈마검이 고통스럽게 울며 저항했다. 혈교의 신물이자 역천신공에 반응하는 영성을 지닌 마병이 스스로 움직여 백수룡의 목을 노렸다.
백수룡을 막고자 혈마가 스스로 혼을 혈마검으로 옮겨 간 것이다.
“너를 죽여서라도 막을 것이다!”
그러나 혈마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혈마검에 깃든 순간, 그때까지 무심하기만 하던 백수룡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치는 공격을 피한 백수룡은 기다렸다는 듯 적월로 혈마검의 한가운데를 내리쳤다.
쩌어엉-!
혈마검이 두 조각으로 부러짐과 동시에, 백수룡은 혈마의 끔찍한 비명 소리를 들었다. 수천의 귀신이 동시에 내지르는 듯한 괴성이 그토록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원하던 곳에 가서 잘 살아 보라고.”
백수룡은 두 조각 난 검을 미련 없이 균열 너머로 던져 버렸다.
이후, 혈마의 목소리는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