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56
656화. 단 한 번의 역천
혈마의 존재가 우주 너머로 사라짐과 동시에, 백수룡을 중심으로 심상 세계의 풍경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악-
검붉고 음울했던 지옥의 하늘이 푸르게 덧칠된다. 물 위에 떨어진 물감처럼 퍼져 나가는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지상의 풍경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갈라지고 무너져 폐허로 변한 땅에 새살이 채워지고, 사방에 가득하던 피 냄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서진 건물과 시신들 따위가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그 위에 새로운 풍경이 그려졌다.
“여긴…….”
거상웅은 익숙한 풍경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낯익은 저잣거리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활기찬 도시의 정경이 손에 잡힐 듯 전부 눈에 익었다.
“……청룡학관이군.”
그 옆에서 남궁수가 고개를 들어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현판을 바라봤다. 용사비등한 필체로 청룡학관(靑龍學館)이라 적혀 있었다.
심상 세계는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백수룡에게 어떤 것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광경이었다.
“하하! 저 애송이가 드디어…….”
“그 지옥에서 벗어났구나.”
“……참 오래도 걸렸다.”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네 사부들 또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의 심상 세계를 둘러봤다.
그곳은 더 이상 시체들로 가득한 삭막한 겨울이 아니었다. 포근한 봄의 풍경이었으며, 제자와 정을 주고받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때마침 지상에 내려선 백수룡이 능글맞게 웃으며 사부들에게 걸어왔다.
“사부들. 잘 보셨소? 당신들 제자가 조금 전에 고금제일인으로 등극했는데 말이오.”
뻔뻔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제자의 표정과 말투에, 네 사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놈아. 고금제일의 무인인 건 모르겠고 고금제일의 요물이긴 하더구나. 사내고 처자고 전부 그 춤사위로 홀릴 셈이더냐?”
껄껄 웃으며 농을 건네는 맹 사부의 모습이 하얀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다른 사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 간다는 의미였다.
백수룡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으로 네 사부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떠나기 전에 사손들에게 한마디씩 하시겠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네 사부들은 사도들에게 다가갔다.
사곤을 제외하고는 사도들 모두가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혈마와의 싸움에서 선천지기를 대부분 소진한 대가였다. 절세의 경지에 도달하며 노화가 멈췄던 육신이 그 세월을 한 번에 겪으며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각각 자신들의 무공을 계승한 사도들 앞에 마주 선 네 사부가 입을 열었다.
“너의 무극검은 내가 창안한 것을 넘어 온전히 너만의 것이 되었더구나. 잠시나마 함께 검을 펼칠 수 있어 즐거운 경험이었다.”
“……저 역시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검존 모용혼은 무극검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낸 일사도의 검을 인정하고 칭찬했다. 일사도는 감사의 인사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네 신월빙백무는 틀리지 않았다. 원한과 증오로만 채워진 줄 알았던 자리에, 네 친우들을 생각하는 따스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거든.”
“……그랬나요.”
빙월신녀 은예린이 인자하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이사도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를 하든 용서를 하든 후손들이 결정할 일이다. 다만, 네가 한 일을 잊지는 마라.”
“…….”
광마 헌원후는 회한이 어린 표정으로 삼사도에게 조언했으며, 삼사도 또한 그와 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대화가 두 사내의 침묵 속에서 생략되었다.
“하하하! 역시 내 무공을 익힌 사손들이 제일 낫구나! 강건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오는 법이지!”
녹림투왕 맹호악은 사곤과 거상웅을 동시에 와락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다른 사부들과 달리 사손들을 대하는 데 있어 스스럼이 없었다. 맹호악은 먼저 거상웅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십대 상단 아들이라며? 앞으로 녹림 녀석들 좀 부탁하마.”
“……예? 아,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한 거상웅에게 씨익 웃어 준 맹호악이 이번에는 사곤을 바라봤다. 그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순간 많은 감정들이 스쳤다.
“예전에는 내 무공을 계승한 녀석이 왜 이리 강단이 없을까 생각했다만……. 알고 보니 네 마음이 가장 단단하더구나. 고맙다. 못난 제자 놈을 깨워 줘서.”
사곤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주먹을 내밀었다. 맹호악은 크하하하-!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사곤과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제자야. 이제 진짜 떠나야 할 시간이구나.”
사손들에게 각자 할 말을 전한 사부들은 후련한 얼굴로 백수룡을 돌아봤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 흰빛으로 완전히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부들이 하나가 된 음성으로 백수룡을 불렀다.
“수룡아.”
백수룡의 눈이 놀람으로 부릅떠졌다.
사부들에게 현생의 이름으로 불리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몰려왔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이 날 것처럼 감정이 북받쳤다.
이제 그들이 자신을 완전히 떠나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네가 우리의 제자라서 자랑스럽다. 부디 행복해지거라.”
하얀빛으로 변한 네 사부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렸다. 백수룡은 시야가 흐려지려는 눈에 힘을 꾹 주며 대답했다.
“나도 사부들이 자랑스럽고, 앞으로 평생 그리울 거요. 그리고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지?”
“하늘이 변덕을 부린다면 또 보게 될 수도 있겠지.”
사부들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심상 세계 전체에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털썩.
“불초 제자 백수룡이 스승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스승님들에게 배운 것들……. 잊지 않고 후대에 전하면서 살겠습니다.”
백수룡이 스승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목이 메어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들의 제자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파아아아앗-
사부들의 영혼이 심상 세계를 환하게 밝히며 떠났다. 그들이 잠시 몸을 빌렸던 헌원강, 위지천, 야수혁, 여민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남궁수와 거상웅이 조심스럽게 그들을 안아 들었다. 백수룡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부들이 떠나는 길을 배웅하는 듯했다.
“……우리는 먼저 돌아가도록 하지.”
남궁수가 뇌굉을 허공에 대고 힘껏 긋자 심상 세계에 균열이 벌어졌다. 후배들을 양어깨에 둘러멘 거상웅이 눈치껏 그 뒤를 따라나섰다.
“백수룡.”
심상 세계를 떠나려던 남궁수가 잠시 멈춰 서서 백수룡을 돌아봤다. 마침 백수룡도 고개를 돌려 남궁수를 바라봤다.
“……소원권은 쓰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피식 웃은 백수룡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궁수와 청룡오망도 심상 세계를 떠났다.
친우와 제자들을 배웅한 백수룡은 몸을 돌려 조용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도들을 바라봤다.
“많이 기다리게 했구나.”
사제지간에 풀어야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백수룡은 심상 세계의 시간이 최대한 느리게 흘러가도록 만든 후, 비로소 제자들과 마주했다.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이뤄진 만남이었다.
* * *
백수룡과 사도들은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 둔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들은 서로에게 더욱 솔직했으며, 더 이상 그 무엇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당신을 원망하고 증오했습니다.”
“죽이고 싶었던 적도 셀 수 없이 많았고.”
“저희끼리 밤마다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요.”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들, 원망과 증오, 사도들은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스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랬었구나.”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들의 말을 들어 주고, 반대로 말한 적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 또한 전했다.
전생의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제자들을 받아들였는지, 어떤 마음으로 무공을 가르쳤는지, 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왜 저희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당시에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사부들의 목숨도 걸려 있었으니까.”
“저희가 두려웠습니까?”
“그래. 두려웠다. 내 손으로 너희를 죽이게 될까 봐. 혹은 너희가 나를 죽이고 종종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
한때는 스승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제자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스승의 입장에 대해서 알게 된 부분도 있었다.
혈교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고,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너희들에게 저지른 잘못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솔직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조금은 나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이 평생 동안 서로에게 원망과 증오의 감정만을 품어 온 것은 아닌 까닭에.
사도들의 고요하고 맑은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계속해서 서로의 죄책감과 잘못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지는 않았다.
사도들이 혈마의 술법을 스스로 깨뜨린 후 떠오른 기억들 중에는,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조금은 있었다.
“삼호. 예전에 네가 이불에 오줌을 지렸다가 스승님에게 들킬까 봐 수련이라는 핑계로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거 기억하나?”
“……헛소리하지 마라.”
“표정을 보아하니 생생하게 떠올린 모양인데?”
“이호 너까지……. 사곤. 넌 웃지만 말고 수어로라도 내 변호를 하란 말이다!”
덕분에 나중에는 서로 작게나마 웃고 떠들 수 있었다.
백수룡은 그런 제자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유심히 바라봤다.
선천지기를 소모해 노인이 된 제자들의 얼굴을.
고작 한 줌의 추억을 떠올리며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띤 표정들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저 얼굴들을 볼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다.
푸스스스…….
심상 세계가 외곽에서부터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술법의 공간은 백수룡의 간절한 의지,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역천의 기운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달한 듯했다.
“더 이상의 여한은 없습니다.”
일사도가 차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이사도와 삼사도도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들에게 남은 수명은 고작해야 몇 달, 어쩌면 며칠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선천지기를 소모한 대가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쿠궁! 쿠구구궁……!
사도들은 무너져 가는 심상 세계를 마지막으로 찬찬히 둘러봤다.
특히나 부러움을 담은 시선들이 청룡학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만약 저희도 환생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청룡학관에서 스승님과 다시 만나면 좋겠습니다.”
“평범한 무가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다가, 나이가 차면 학관에 들어가서 다 같이 다시 만나는 거지.”
“재미있겠어. 그 생에서는 너희들과 더 많은 일들이 생기겠지.”
“…….”
사도들은 저희들끼리 만약을 가정해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이미 최후를 각오하고 있었다. 무너져 가는 심상 세계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역시 안 되겠다.”
그때 백수룡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사도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너희를 이대로 못 보내겠다. 하늘이 천운 따위를 내리거나 아량을 베풀어 주길 하염없이 바라며 너희들을 기다리진 않겠다.”
말을 마친 백수룡은 고개를 들어 아직 완전히 균열이 닫히지 않은 하늘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남은 역천의 기운이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스스스슷…….
그 순간 백수룡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붉게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역천의 힘을 사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