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83
282화 종횡 (4)
“대만은 지금 매우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어요.”
병필태감 문루는 굳은 얼굴로 무겁게 말했다.
다만 목소리가 워낙 가는지라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대신 거무튀튀한 손가락이 계속 거슬리네.
저 녀석 근처에서는 홍차를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대명의 패망에 판돈을 거는 건 결코 좋은 선택이 될 수 없사와요!”
데자뷔인가?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네.
참 신기하지.
자기들끼리 싸워야 하는데 화살이 왜 내 쪽으로 오나.
안 되겠다.
조금 더 다른 이들을 도발해보자.
“병필태감. 내가 말하고 싶은 게 그것이오. 나는 대명의 부흥을 위하오. 하지만 어디가 진짜 대명인지는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소.”
“어디가 진짜 대명인지는 국호에서 나타나지 않나요?”
“국호보다는 정통성이 중요한 것 아니겠소. 태감. 그대는 정말 황태손 전하께서 대명의 정당한 계승자라 생각하시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오?”
“그렇다면 신하와 백성들을 죄다 버리고 간 폐제가 정당하겠어요? 아니면 빈틈을 노려 반란을 일으키다 쫓겨난 한왕이 정당하겠어요?”
“듣고 보니 그 말이 옳구려.”
“……네?”
“아무래도 황실과 백성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풍요를 가져오려 애쓰다 보니 상인 습성이 붙어 조건을 따진 것 같구려. 내 사과드리리다.”
내 말에 문루는 오히려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안 그래도 이번에 구라파에 다녀오면서 큰 이익을 얻었는데, 이 세금을 어디에 바칠지 고민이 많았소이다. 이제야 머리가 상쾌해진 기분이오.”
내 말에 다들 표정이 싹 변했다.
세금.
국가의 바탕이 되는 기본 중 기본.
국가의 근간이긴 해도 역사상 세금을 좋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언제나 정해진 세금보다 몇 배의 세금을 냈다.
처음에는 영락제의 환심을 사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
나중에는 내가 벌어다 주는 세금에 의존하게 하려고.
언젠가 이럴 때가 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부유해지는 것에는 쉽게 적응해도, 빈곤해진 환경에는 잘 적응을 못 하니까.
특히나 지금처럼 세금이 무척 부족할 때에는.
“마땅히 ‘진정한 천자’께 바칠 것이오.”
소문은 이미 퍼져있다.
내가 유럽에서 엄청난 은을 가져왔다는 소문이.
물론 명나라의 국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 은은 새 발의 피다.
하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소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게 중요하다.
이미 대항해시대는 시작되었고, 이제부터 이익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테니까.
대륙 간 항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설사 항해에 성공했다고 해도 이 정도 가격으로 안정적으로 팔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미 유럽 쪽에다가 알을 곳곳에 박아놨거든.
내가 괜히 성경 공부해가면서 유럽인들의 호감을 쌓은 게 아니다.
“…….”
병필태감 문루는 분명 좋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곧바로 불어닥칠 폭풍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태조 고황제께서 점지하신 진정한 천자는 당연히 폐하시오!”
예부 상서 마인환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한 채 반박했다.
이어 병필태감 문루를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쳤다.
“어디 환관 따위가 천자를 논하느냐! 이래서 태조께서는 환관 놈들은 가르치지도 말고, 멀리해야 한다고 유훈을 남기셨거늘! 근본 없는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하더니 나라를 망조로 이끄는구나!”
오우야.
생각한 것 이상으로 격한 반응이 나오는데?
심정은 이해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뒤가 없다.
어차피 경쟁에서 지면 몰살인데, 욕이 대수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 말씀 감당하실 수 있으셔요?”
문루가 싸늘하게 말했지만,
“어딜 감히 사대부를 협박하느냐! 천한 고자 놈들이 도적의 비호를 받더니 십상시처럼 구는구나! 누가 동창 따위를 두려워할 줄 아느냐!”
마인환은 침을 튀기며 분개하더니 이번엔 이쪽을 보았다.
“전하. 그대 역시도 조선 출신이기는 하나, 사대부가 아니오? 어찌 간사한 환관의 말을 따르려 하시오?”
“나는 환관이라고 딱히 무시하지는 않소. 애초에 나를 이끌어 준 스승인 정화 제독도 환관이 아니오?”
“그렇긴 해도 본질은 사대부가 아니오. 사대부라면 응당 공맹께서 말씀하신 유학의 도를 따라야 하지 않겠소이까?”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 같고…….”
일부러 확답은 하지 않고 말을 흐렸다.
그래야 더 싸우지.
“그러면 북경과 남경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말인데…… 허 참. 고민이 많구려. 나는 대명을 따르고 싶을 뿐인데, 어찌 하늘에 태양이 둘이란 말인가!”
“전하.”
한왕부의 세자 주첨학이 나섰다.
그래.
너희도 돈 받고 싶으면 나서야지.
왜 입 다물고 조용히 있냐.
“모든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국 난세에는 군권을 쥔 자가 유리합니다. 전하께서도 해적과 왜구를 소탕하면서 강력한 지지를 얻으셨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경우가 많긴 하오.”
“대명의 유능한 장수들은 대부분 ‘선제’ 폐하를 따라 북벌을 떠났으나 소식이 끊어졌고, 그 밖에 유능한 장수들은 모두 한왕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왕께서는 곧 제위에 오르시고 진정한 힘을 보여주실 터. 입만 산 사대부나 협잡질만 하는 간사한 환관 따위보다는 우직하고 유능한 무관을 믿으시는 게 옳습니다.”
순간 폭소가 터져 나올 뻔했다.
한왕 주고후가 나름 용맹하고, 휘하의 제장들도 유능하긴 하다.
하지만 무관은 남경에도 있고, 북경에도 있다.
오히려 가장 유능한 장군들은 북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 한왕부는 내세울 게 없어지니,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짜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불은 붙였으니 이제 적당히 돌려보내기만 하면 된다.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면 나는 동맹을 굳건히 하고…….
“전하.”
한창 열띤 토론을 하는데, 허신애가 조심히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언제 배웠는지 조선말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왕세자가 대만의 궁궐에 왔다고 합니다.”
어벙한 연기를 해왔던 지금과는 달리,
“……엉?”
이번에는 진심으로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
잠시 양해를 구하고, 본전 밖으로 나와 별전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대호군 장영실이 무척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꾸벅 숙였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만 국왕 전하.”
조선의 왕세자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것이…….”
“전하. 청이 있어 이 먼 바닷길을 고생하며 왔습니다.”
쓱 보니 정상적인 절차로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세자 복이 아니라 조선의 보통 양반이 입는 옷을 입었으니까.
또, 장영실이 아니라 예조의 문관과 내시가 옆에서 보조했겠지.
“청이 무엇입니까?”
동생인 세종대왕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양녕대군도 나름 상당한 인재다.
이성계의 혈통답게 활 솜씨가 뛰어나고, 킬방원을 닮아 유명한 명필이기도 하니까.
전생은 모르겠지만, 이번 생에는 그가 숭례문의 현판을 쓰기도 했다.
다만 킬방원이 양위 쑈를 할 때마다 개처럼 엎드려서 온갖 고생을 했기 때문에 성격이 삐뚤어졌…….
“전하께서 구라파에서 데려온 사샤라는 여인이 절세미녀라고 들었습니다.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4년 전에는 열세 살의 나이로 이소군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더니.
이제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르네.
오랫동안 못 봤는데, 못 본 사이 훌륭한 양아치로 자라났구나.
원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전생에 들었던 모든 미담은 양녕대군을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같다.
삼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싸가지 없는 재벌 2세 그 자체로 보이니까.
이러다 원 역사보다 빨리 폐세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봐서 뭐하시게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그녀를 조선에 시집 보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누가 달라고 합디까. 그냥 한 번 보고만 싶다는 뜻이지요.”
양녕대군이 폐세자된 사건.
아마 어떤 양반의 어린 첩을 납치해서였지?
그 첩의 이름이 아마 어리였나.
그렇다는 건 얘가 사샤를 납치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
“안 됩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옛정이 있는데 양해 좀 해주시지요.”
“옛정이 있어서 안 쫓아내고 듣고 있는 겁니다.”
“그거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온갖 미녀들을 다 섭렵하지 않았습니까. 왜 저에게만 이렇게 가혹하십니까?”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거 꿈인가?
이게 정녕 조선의 왕세자가 할 수 있는 말인가.
“심지어 다 봤습니다.”
“뭘 보셨죠?”
“궁궐 근처 저택에 온갖 미녀들이 가득한 것을요. 먹지도 않을 음식에 손도 대지 말라니. 이게 무슨 심술이란 말입니까?”
“…….”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상상 이상이다.
그동안 나를 암 걸리게 만드는 답답한 인간은 많았어도, 이렇게 대놓고 막장인 사람은 처음 봤다.
이제에 비하면 내가 옛날에 나락으로 보냈던 민무구 형제는 다시 보니 선녀 수준이다.
“대호군.”
“예. 전하.”
“이게 조선 국왕의 답인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자 저하의 일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탈…….”
“일탈이라니! 무슨 말을 그리 험하게 하는가. 나비가 꽃을 향해 날아드는 것은 세간의 섭리인 것을!”
그러더니 이제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아. 모르겠소. 그 여인을 보여주시오. 안 보여주시면 내 곡기를 끊을 것이니!”
“…….”
“배 타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앞으로도 먹을 생각이 없소! 진짜로!”
이런 게 왕세자라니.
조선의 앞날이 참으로 어둡구나.
차라리 이대로 굶겨 죽이는 게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
잠깐만.
내가 그동안 세상을 너무 편협하게 바라본 것 같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고.
“그렇게 보고 싶습니까?”
“물론이네! 내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전하를 형으로 모실 것이요.”
그건 필요 없고.
“다시 말하지만 난 그녀를 조선으로 시집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보고 싶습니까?”
“하하하. 걱정도 팔자구려. 내가 보쌈이라도 할까 봐?”
싱글벙글 웃는 조선의 왕세자 이제를 보며 머릿속으로 여러 계획을 떠올렸다.
이제 자체는 쓸모가 없지만, 조선의 왕세자라는 직위만큼은 쓸모가 많다.
“듣기론 전하께서는 사샤라는 여인이 원하는 남자와 맺어주겠다고 했는데, 내 멋진 모습을 보면 분명 그녀도 내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리니.”
훌륭하게 양아치로 자란 그를 명나라 삼총사에게 던져주면 알아서 외교 분란을 만들 것 같은데.
혹시라도 이제가 생각지도 못한 정치 감각을 발휘해서 회피하려 들면 내가 옭아매면 되고.
이렇게 되면 조선은 내 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선을 전란으로 끌어들였다는 책임은 누군가가 져야 하니, 그걸 이제에게 다 뒤집어씌운다.
이제가 책임을 뒤집어쓰고 폐세자가 된다면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될 터.
조선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지니 결과적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럼 가보죠.”
“형님! 내 형님만 믿습니다!”
“허허…….”
내가 앞장서자 환희에 찬 이제가 따라붙었고, 장영실은 매우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따랐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여기서부터는 금남 구역입니다.”
후궁 근처에서 그를 제지했다.
조선이나 명나라처럼 엄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후궁은 기본적으로 왕을 제외하면 금남구역이다.
다른 남자가 후궁을 오가게 되면 필히 구설에 오르게 되니까.
하지만 후궁도 수리라든가 공사라든가 남자의 힘이 필요할 때가 생기고, 대만에는 환관이 없는 만큼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는 출입을 허용한다.
이번에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므로 굳이 출입시킬 필요는 없고.
“얼른 다녀오시지요. 내 전하만을 기다리리라.”
나는 장영실에게 ‘감시 잘해라.’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
“세자 저하. 이건 정말 위험합니다.”
강해인이 사라지자 장영실은 급하게 간언했다.
장영실이 보기엔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대만 국왕이 허락했는데 왜 자꾸 그러는가. 조용히 하고 있게.”
“하오나 전하…….”
“어허!”
이제의 추상같은 호통에 장영실은 입을 다물었다.
강해인이나 충녕대군은 요구하는 건 많을지라도, 타의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는데.
이런 막장을 상전으로 모시게 되니 앞날이 깜깜했다.
지금이라도 강해인 전하께 무릎 꿇고 다시 받아달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갈등하고 있을 때, 한 여인이 후궁으로 향했다.
아니, 후궁으로 향하려다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왔다.
“못 보던 얼굴인데? 넌 누구?”
명나라 말이었다.
대만 자체가 명나라의 번국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장영실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봤던 얼굴 같은데…….
“그러는 넌 누군데?”
장영실이 고민하는 사이, 조선의 왕세자 이제가 대답했다.
능숙한 명나라 말로.
장영실로서는 의외였다.
저 놀기만 하는 왕세자가 명나라말을 익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대체 어쩌다가 공부한 거지?
“내가 먼저 물었잖아.”
“에휴. 비쩍 마른 것이 젖비린내나게 생겼네. 넌 내 취향 아니니까 그냥 가라.”
“너도 내 취향 아니거든? 발정 난 개 같아서.”
“이 계집년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여인이 소리치자 몇 걸음 뒤에 있던 병사들이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보호했다.
훈련도, 몸집, 무기와 갑옷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수 없다.
다른 곳도 아닌 궁궐에서 이러고 다닐 정도이니 분명 보통 신분은 아닐 것이다.
그제야 장영실은 떠올렸다.
명나라 황제의 다섯째 공주가 대만에 요양하러 와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