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84
283화 종횡 (5)
“사샤.”
“…….”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슬라브어 외에는 할 줄 아는 언어가 없다.
심지어 쓸 줄 아는 문자도 없다.
그래도 이소군이나 다른 여성 선원들이 옆에서 보조하고 있기에 간단한 말은 알아듣는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 언어는 명나라 말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말과는 달리 명나라어는 존댓말이 따로 없으니까.
억양이나 단어로 높임과 하대를 구분할 뿐.
“잠깐 나랑 누구 좀 만나러 갈래?”
“누구?”
“내 아는 동생.”
“진짜 동생?”
“아니. 옛날 상사의 아들.”
정확히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금발 벽안의 미인.
전생에 포털 사이트에서 ‘엘프녀’라고 검색하면 나올 법한 외모다.
요정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몸매는 매우 공격적이고.
이런 미녀를 전생에는 베이글이라고 불렀지.
그와는 별개로 나는 그녀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개인적으로 내 역사적 사명은 ‘노예제 폐지’라고 생각하니까.
사람을 선물 받고, 선물 받은 사람을 내 마음대로 첩으로 삼아버리면 이를 따라 하는 사람이 많아질 거라 생각하니까.
내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시킬 거라고 공언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한 생각과는 별개로 권력자가 보고 싶다고 떼쓴다는 이유로 데려간다는 게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자.”
“네.”
아무 일 없으면 되는 거지.
술을 따르게 시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인사만 시키는 거다.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며 밖으로 나갔다.
사샤는 병아리가 어미 닭을 따르는 것처럼 순진한 눈동자로 나를 따랐다.
***
“이 계집년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넌 내가 누군지 알고!”
뭐여. 이게.
왜 상녕공주와 조선의 왕세자가 싸우고 있어?
“내 아빠가 누군지 알아? 이름만 들어도 오줌 지릴걸?”
영락제 이름을 들으면 당연히 오줌 지리지.
피휘 안 했다고 죽을 테니까.
“야 너도? 내 아버지도 그런데?”
킬방원의 위엄이 쩔긴 하지.
어디까지나 조선 한정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킬방원도 무섭기는 매한가지다.
조건 반사라고 해야 하나.
각인된 공포라고 해야 하나.
“뭣들 하고 있습니까?”
“전하!”
“전하!”
상녕공주가 위풍당당하게 다가왔다.
“쟤 짜증 나. 혼내줘.”
이상하다.
허신애가 말하길, 상녕공주는 말투가 고압적이긴 해도 속이 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성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속 깊은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나를 배려하는 모습도 본 적 없고.
내가 못생겨서 그런가?
“공주님.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씀해 보시지요.”
“쟤가 나한테 비쩍 말라서 젖비린내난다고 하잖아!”
눈치가 없진 않은지, 조선의 왕세자 이제…….
아니다.
칭호가 기니까 짧게 부르자.
양녕대군(진)으로.
양녕대군(진)도 눈치가 없진 않으니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당당했다.
“형. 내가 살짝 실수한 것 같긴 한데, 쟤도 잘못했어. 어디 여자가 외간 남자에게 반말을 찍찍하냐고. 이건 공자께서도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지.”
네가 한 일을 알면 킬방원과 중전마마가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잘 부탁해. 그보다 저 여인이 사샤야?”
“그렇긴 하다만…….”
“와. 정말 아름답구려. 내 여태까지 봤던 여인 중 두 번째로 아름답소! 부디 그대의 천상의 옥음을 들려주시지 않겠소?”
사샤는 양녕대군(진)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숨었다.
내 팔을 꽉 잡는 걸 보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무섭나 보다.
“첫 번째는 누군데?”
“당연히 귀빈 마마지.”
이소군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나는 딱히 품계를 내리지 않았는데, 이소군이라는 이름을 부르기 어려운 이들이 귀빈이라 부르고 있다.
황제의 비빈 중 황후 다음으로 존귀한 여인을 귀비라고 부르므로, 제후국 사정에 맞춰 한 단계 격하하여 귀빈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영락제가 딱히 트집을 잡은 적은 없다.
근데 ‘네 마누라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고 말하면 이건 칭찬인가, 도발인가.
석피가 말했으면 칭찬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은데, 양녕대군(진)이 말하니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형님. 아니, 빙장님!”
“빙장?”
“딸을 내게 주십시오!”
미친.
“어우. 꼴 보기 싫어. 첫인상이 맞았다니까. 발정 난 개. 야 꺼져. 사샤가 무서워하잖아!”
“조용히 해. 아줌마(阿姨)야.”
“뭐!”
상녕공주는 나보다 겨우 한 살 어리다.
만으로 따지면 올해로 스물다섯.
스물 이전에 죄다 결혼하는 이 시대 기준으로는 아줌마이긴 하다.
“성격이 그 모양이니까 아직 시집을 못 갔지.”
“그럼 너는!”
“난 4년 전에 혼례를 올렸거든?”
“너 하는 꼴을 보니 네 아내의 팔자도 뻔하구나. 천불이 끓고 있는데 속만 삭이고 있겠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아줌마야.”
양녕대군(확정)과 상녕공주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킬방원을 끌어들일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이 일이 알려진다고 해도 명나라 상황이 심각한 지금, 당장은 조선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만약 황태손 주첨기나 한왕 주고후가 최후의 승자가 되면 반드시 이 일을 문제 삼을 것이다.
건문제가 승자가 되어도 문제다.
그는 정난의 변 때 킬방원이 바로 뒤통수 후려치고 영락제에게 붙은 사실을 잊지 않았을 테니까.
즉,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반면 조선이 손을 뻗을 수 있는 나라는 이제 대만밖에 없다.
일본이나 여진족은 왜구와 오랑캐로, 잠재적인 적국으로 분류하고 있으니까.
유구국이라 불리는 류큐 왕국은 국력이 매우 작은 데다 내전 중이고.
“공주님.”
“왜!”
“왜 저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러십니까.”
왜 내 기를 죽여요?
“미, 미안. 아무튼, 저놈 좀 처리해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대만은 조선보다 약한 제후국이라 어렵겠네요. 하지만…….”
궁궐의 본전을 가리켰다.
명나라 삼총사가 게거품을 물고 싸우고 있는 곳.
“저기라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같이 갈 거지?”
“그럼요.”
그녀를 달랜 후 양녕대군(확정)의 뒤에서 진땀을 빼고 있는 장영실을 보았다.
“영실아.”
“예, 예. 전하.”
“내가 문제를 해결하러 다녀올 때까지 대가리 박고 있어라.”
“……네.”
장영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라는 느낌이다.
왜긴 왜야.
줄 잘못 섰으면 맞아야지.
“잠깐!”
본전으로 향하려는데 양녕대군(확정)이 내 앞길을 막았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갈 땐 가더라도 그 여인은 두고 가시오.”
사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실아.”
“예.”
“네가 책임지고 저놈 묶어서 조선으로 보내라. 만약 대만의 다른 여인 건드렸다는 소문이 내 귀에 닿으면 진짜 각오해야 할 거다.”
“……예.”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속으로는 웃었다.
이것으로 마지막 퍼즐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다.
명나라 국경을 맞댄 나라는 이미 명나라와 철천지원수.
나머지는 한 발 떨어져 있으니 협조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을 터.
합종은 완성되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긴 하지만…….
준비한 김에 여진족도 확실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다.
***
찾아온 명나라 삼총사는 적당히 돌려보냈다.
대만 국왕의 직위만으로는 원하는 걸 얻어내기 힘들 테니까.
어떻게 된 게 내가 좋아하는 명나라가 세 개로 늘어났는데도 아직도 덩치가 크냐.
열여섯 개 정도는 되어야 비벼볼 만하겠네.
아무튼.
대만 국왕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힘들지만, 제후국 연합의 장이라면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다.
그 희망을 품고 다시금 항해 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조선.
킬방원을 만나 담판을 짓고, 함길도에 갔다가 그대로 여진족의 땅으로 갈 생각이다.
조선에 도착한 나는 언제나 그렇듯 정식 회담 이전에 기방에서 몰래 만났다.
사전에 협상해야 얼굴 붉힐 일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킬방원을 만날 수 있었다.
“유감입니다.”
“…….”
킬방원은 계속 술을 들이켰다.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상당히 많이 마신 모양이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제 잘못은 아닙니다. 저는 세자 저하께서 대만으로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과인의 부덕일세.”
킬방원은 평소답지 않게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이런 모습 처음이다.
강강약약의 절대군주라고 해도 역시 자식새끼의 망나니짓 앞에서는 장사 없나 보다.
“혹시 아는가. 과인과 중전이 그 아이를 어찌 키웠는지.”
“유명하지요.”
양녕대군(확정)은 사실 장남이 아니다.
위로 셋이나 더 있다.
하지만 줄줄이 요절했다.
자식을 셋이나 잃고 얻은 아들이었으니 얼마나 귀할까.
“자네도 들었다시피 과거 내 목숨은 바람 앞에 촛불 같았네. 언제 숙청당해도 이상하지 않았지.”
막내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가장 거슬렸던 사람은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왕자이자, 똑똑하고 야심 차기로 유명한 이방원이었을 터.
기회만 보면 숙청하기 위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이때가 서기로 치면 1392년.
그리고 양녕대군 이제가 태어난 해는 1394년이다.
“과인과 중전은 갓 태어난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인고의 세월을 버텼네. 그 아이가 방긋 웃을 때, 옥죄여오는 압박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느꼈지.”
킬방원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토록…….”
“자네는 이해하기 어렵겠지. 자네가 임관했을 무렵에 과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을 테니까.”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다.
그렇게 힘든 세월을 처자식과 함께 이겨냈으면서, 이겨내자마자 후궁을 새로이 아홉이나 들인 게.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그…….”
집안 내력 아닐까요.
차이가 있다면 킬방원은 본능을 잘 억누르고 있다가 왕이 되고 나서 분출했고.
양녕대군(확정)은 적장자의 정통성과 강력한 왕권의 킬방원 후광을 믿고 너무 일찍 표출했다는 정도만 다를 뿐.
“아무리 세자라고 해도 이 일은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게야.”
예쓰!
“폐세자를 논해야겠지.”
지저쓰!
“세자 저하께서는 어찌 지내고 계십니까?”
“궁 앞에서 석고대죄를 올리고 있네.”
“…….”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원 역사에서는 양녕대군이 사고를 칠 때면, 킬방원답지 않게 자주 봐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특히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양녕대군이 우는 척하며 사죄를 하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줬다고.
설마 이번에도 그러지는 않겠지?
“과인은 그대가 밉네.”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번 일은 전적으로…….”
“이 사람아.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
“그 평가를 기억하는가? 자네가 바다로 떠나기 전, 창덕궁 조계청에서 했던 이야기.”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듣지 않지만, 당시에는 수없이 들은 말이었으니까.
영락제를 시작으로 세상 사람들이 나를 향해 내렸던 평가였다.
“아니었어. 그저 자네를 알아볼 능력이 부족해서 과소평가했던 게야. 나도. 천자도.”
“…….”
“그대가 과인의 장자로 태어났더라면 조선은 반석 위에 앉았겠지.”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지금 이리도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테고.”
“지금은 힘들지만, 결국 다 제자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당신의 셋째 아들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니까요.
“또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다르니 걱정하실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는 일이지. 권력이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니.”
그렇긴 하지만 충녕대군의 성정을 아는 나로서는 쓸데없는 고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예?”
“그 아이를 데려가 주게.”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녀석을 함부로 대만에 풀어놓으면 여기저기 담을 넘어 다니면서 온갖 외교 분란을 만들 것 같은데.
확신한다.
각국의 공주와 규수가 모인 지금이라면, 녀석은 몇 달 내로 동맹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확실하게 거절해야 한다.
전생에 유행했던 MZ 삼단논법을 사용해보자.
“데려가요?”
“그 아이가 폐세자되면 한동안은 한양을 벗어나 있어야 할 걸세. 그럴 바에야 차라리 원하는 대로 대만에 보내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제가요?”
“자네가 이번 일에 일말의 책임이라도 느낀다면 그리 해주게. 내 이렇게 부탁하네.”
“왜요?”
“그리 해주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합종에 참가할 테니까.”
아. 쉽지 않다.
무적의 MZ 삼단논법이 안 통하네.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여인들의 의견을 항상 존중합니다. 하지만 세자 저하는 그렇지 않지요.”
“그렇다면 배에 태우게.”
“……네?”
“녀석도 고생을 하다 보면 사람이 되겠지.”
이번 일로 양녕대군(확정)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에서 사람 이하의 무언가가 된 모양이다.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바다는 매우 위험합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과인이 그걸 모르겠나?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네.”
“말로는 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각서라도 써줄까?”
“책임은 묻지 않겠지요. 하지만 감정은 쌓입니다.”
“괜찮네.”
“예?”
“충녕은 그런 일로 일일이 원한을 갖지 않을 테니까.”
킬방원은 촉촉해졌던 눈동자를 훔치고는 다시 눈을 떴다.
“이번 명나라의 일이 마무리되면, 나는 충녕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날 생각일세.”
언제나 나를 긴장하게 했던 눈빛이다.
철혈의 군주가 갖는 그 눈빛.
“자네…… 아니, 대만 국왕.”
“말씀하십시오.”
“동맹으로서 물자를 요청하네.”
물자?
“화약을 주게. 저 되놈들을 모조리 날려버릴 만큼의 화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