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86
285화 화약, 강철, 믿음 (2)
“그러니까 잘된 것 맞죠?”
“잘되긴 했지.”
원하는 대로 조선의 확실한 협력을 끌어냈으니까.
지원이야 말 안 해도 원래 해주려고 했던 거고.
“다만 기분이 묘해. 찜찜해.”
이쪽이 지원해주는 입장인데, 마치 내가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6·25전쟁 때 엄청난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줬지만, 휴전하고 발을 빼려 했더니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반강제로 체결해야 했던 미국이 된 느낌이랄까.
“너무 깊이 의미를 부여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 일은 의미가 없다.’ 같은 표현도 있잖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대부분 가치가 없지.”
사람이라는 동물은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동물이라는 뜻.
국가 간 정상들의 회담을 복기하는데 이를 헛짓거리라고 하면, 헛짓거리가 아닌 일이 거의 없다.
의미를 뺀다면 금이나 은, 다이아몬드도 본래는 가치가 없고, 축구는 공 하나를 두고 스물두 명이 쫓아가는 괴상한 몸짓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냉정하게 보면 손해 본 건 없지 않습니까?”
“손해는 아니지.”
이 시대에는 어느 나라나 화약이 비싸다.
하지만 예외인 나라가 딱 두 개 있으니 바로 중국과 인도다.
질산칼륨 광산이 밀집해 있는 곳이니까.
잉카 제국의 아타카마 사막도 있긴 한데, 거긴 화약을 만들 기술이 없어서 별 의미 없고.
내가 이 점을 생각해서 벵골 술탄국의 술탄이 되자마자 한 일이 질산칼륨 광산 개발이었다.
다행히 벵골 술탄국에도 큰 광산이 꽤 있더라.
따라서 화약 지원은 딱히 큰 출혈은 아니다.
오히려 염초 밭을 만들고자 개고생하고 있는 조선의 사정을 생각하면, 적은 비용으로 큰 생색을 낼 수 있는 항목이다.
“좋게 생각하지요. 포르투갈에서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공짜로 무기 성능을 시험할 수 있다고.”
“뭐…… 그렇긴 하지.”
게다가 대만 입장에서 화약은 최신무기나 비대칭 무기 같은 느낌도 아니다.
이쪽에는 다이너마이트가 있고, 쓸 일 없을 것 같지만 그리스의 불도 있으니까.
“그냥 찝찝하다는 이야기였어.”
개인적인 감정도 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은 덕에 명나라 정도를 제외하면 어느 나라의 왕과도 비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자부했는데.
마치 ‘제자니까 봐준다.’라는 느낌으로 양보받은 느낌이라서.
타짜의 제자가 자연빵으로 치자고 해놓고 밑장을 빼서 사부에겐 구땡을 줘놓고 자기는 장땡을 가져갔는데, 이를 알면서도 넘어가 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여진족과의 협상에서는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고.”
“이겨놓고 싸운다는 그것입니까?”
“그건 내 취향에 안 맞고.”
굳이 군인이냐 상인이냐를 따졌을 때, 나는 상인에 가까운 편이니까.
“거래하기 전에 상대에게 확실한 필요성을 만들어 줄 거야.”
함길도로 향하며 나는 의지를 불태웠다.
***
우리는 한반도를 뺑 돌아 함길도 함흥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나라다.”
한양에서 얼마나 올라왔다고 이렇게 기후가 변하나.
이제 겨우 3월인데 너무 춥다.
“그래도 영길리에서 받아온 모피 옷 덕에 따뜻하네요.”
석피는 그리 추위를 안 타는 것 같지만, 선원 중에는 추위를 극심하게 타는 이가 상당히 되는 것 같다.
이를 우려해 그나마 추위에 강한 이들을 선발하긴 했는데, 내 선원들은 대부분 남중국이나 동남아 출신들이라 한계가 있었다.
“할. 괜찮아?”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며 굳이 따라온 헨리 왕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 여긴 스칸디나비아입니까?”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여긴 잉글랜드와 비슷한 위도야.”
위도, 경도 개념은 진작 가르쳐줬다.
다만 전생에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중심으로 경도를 측정하지만, 이 시대에는 남경을 중심으로 한다.
꼬투리 잡힐까 봐 임시로 이렇게 한 거고, 다행히 대만의 수도 타이중은 남경과 경도가 비슷하다.
나중에 명나라가 더욱 많아지면 은근슬쩍 타이중을 중심으로 바꿀 생각이다.
어차피 이 시대 기술로는 위도와 경도를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다.
내가 개발한 육분의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렵고, 기계식 정밀 시계가 필요하다.
이걸 마린 크로노미터라고 하는데, GPS가 있던 전생에 항해사였을 때도 쓰던 것이다.
혹시라도 위치가 어긋나면 영해 침범 등 국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GPS는 물론, 아날로그 방식을 써서 다양하게 측정하는 것이다.
GPS가 고장 났을 때를 대비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그나마 괜찮지만 믈라카 해협 같은 좁고 복잡한 해협이나 영해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정신 바짝 차리고 해야 한다.
경도 측정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준점, 전생에서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간과 내가 있는 곳의 시간을 측정해서 계산하면 된다.
간단하다고 말했지만, 이 계산법을 알아내는 데 300년이 걸렸다.
심지어 아이작 뉴턴에게도 의뢰했는데 만족할 만한 계산법은 만들지 못했다고.
정작 정확한 경도 계산법을 개발한 사람은 저명한 물리학자나 천문학자가 아니라 태엽시계공이었다.
내가 비잔틴 제국의 황녀, 소피아 팔레올로고스에게 회중시계를 개발하라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경도를 지배하면 바다를 지배할 수 있거든.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측정할 수 있으면 거점이 될 항구나 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춥습니까?”
“잉글랜드에서 꿀 빨 때는 좋았지? 웰컴 투 조선이다.”
하여간 서유럽 놈들은 인생 참 편하게 살지.
여름엔 너무 덥지 않고, 겨울엔 너무 춥지 않고.
옆에 강력한 나라도 없어.
황사도 없지.
태풍도 가끔 오지.
이러니까 지구 온난화 시대가 오니까 힘들다고 징징대는 거 아니냔 말이다.
농담이다.
거구의 헨리 왕자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장난 좀 쳐봤다.
“이 정도는 돼야 아프리카를 돌아 유럽으로 갈 근성이 생기는 거야.”
“옙. 대만과 조선의 훌륭한 문화와 기술을 배워서 잉글랜드를 더욱 발전시키겠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여기는 어디입니까?”
“합란부, 혹은 함흥부라고 해. 조선 최북방의 곡창지대지.”
“이렇게 추운데 곡창지대입니까?”
“이 정도면 개간하기 좋은 꿀 같은 기후지.”
“조선의 꿀은 맛이 없나 봅니다.”
전생에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남들 과학 발전하고, 대항해시대에 깃발 꽂고 다닐 때 우리 조상님들 뭐했냐?’라는 말이 흔하게 나온다.
놀라운 말이지만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게 있다.
바로 개간.
밥에 목숨 걸었던 민족이라 어디서든 쌀을 재배할 수 있도록 수없이 궁리했다.
그 결과 바닷물이 들어오는 땅에서도, 그 추운 간도에서도 쌀농사를 지었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이후에는 사막 기후인 러시아 칼미크 공화국에서도 쌀농사를 지었고, 카자흐스탄을 중앙아시아 최대의 쌀 생산지로 개간했다.
“음…….”
“왜요?”
“생각해보니까 이런 것도 수출이 되지 않을까?”
개간 노하우를 잘 수출하면 실질적으로나 이미지적으로나 상당히 도움 될 것 같은데.
“저도 농지를 개간하고 벼농사하는 방법을 배워 가난한 우리나라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봤던 모든 사람 중에서 첫인상과 가장 다른 사람을 꼽자면 단연 헨리 왕자다.
분명 처음 만날 때까지만 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하고 과묵한 전사 그 자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걸까.
게다가 베아트리스에게 듣기로는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엄청 강했다고 하던데.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인가.
참고로 그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연하.
상녕공주와 동갑이다.
아직 머리가 완전히 굳을 나이는 아니라서 변해도 이상한 건 아니다.
“가르쳐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실패해도 내 탓 하면 안 된다?”
“물론이지요.”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여진족과의 협상 카드로 개간법이나 추운 곳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 등을 건네려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립하고 개발에 투자해보자.
언젠가는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호주 등지에서도 써먹을 수도 있으니.
“중요한 건 당면의 문제겠지만.”
“당면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진족이라 해도 모두 같은 부족은 아니야. 크게만 세 개로 나뉘고 각각 수많은 부족이 있지.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부족도 있을 거란 뜻이야.”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매우 높은 확률로.”
“그때는 확실하게 활약하겠습니다.”
헨리 왕자는 추위도 잊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믿음직스럽긴 하다만 죽지만 마라.
네가 죽으면 대참사니까.
***
대명, 천명, 진명.
세 개의 나라로 나뉜 대륙.
이 중 가장 약한 곳을 꼽자면 단연 천명이다.
지금은 칭제를 했지만, 얼마 전까지 한왕이었던 주고후가 다스리는 나라.
대명은 강력한 군사력과 아직은 지력이 남아있는 화북 지방의 생산력이 있다.
진명은 우수한 사대부와 명나라 최고의 생산력을 갖춘 장강 유역이 있다.
반면 천명은 인구, 군사력, 생산력에서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상당히 밀렸다.
그런데도 천명이 나름 국가 구실을 하는 데에는 과거 한왕 주고후가 담당했던 육관 덕이었다.
대외무역을 관장하는 시박사에서 육지 무역만 담당하는 기관.
이를 통해 재건되고 있는 비단길이나 오이라트 등과의 무역으로 나름 부를 쌓고 있었다.
하지만 천명의 황제 주고후는 곧 현실의 차가움을 느껴야만 했다.
“이게 대체 뭔가?”
주고후는 육관의 관리들을 보며 호통을 쳤다.
“이런 비루먹은 말도 말이라고 할 수 있는가?”
5년 전, 선황제가 오이라트와의 조공 무역을 승인한 이래 북방 무역은 점점 그 규모가 커졌다.
명나라에서는 주로 비단, 면포, 곡식 등을 수출했고, 몽골의 여러 부족은 말이나 모피를 수출한다.
이를 마시(馬市)라 한다.
초반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나 교역의 규모가 커지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몽골 부족들이 건강한 말이 아니라 비루먹은 말을 보내거나, 장부상으로는 거래했는데 실제로는 말을 보내지 않는 등 얕은수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엄격히 단속해야 할 관리들은 뇌물을 받거나, 혹은 유목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적당히 눈감아줬다.
그 결과 지금에 와서는 천명의 재정을 크게 갉아 먹게 되었다.
이전에는 장강 유역에서 싼값으로 받아왔기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지금은 반쯤 교역이 단절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장 담당자를 참수하라! 만약 이런 일이 또 발생한다면 육관의 관리를 모두 능지처참하겠다!”
주고후는 일갈했지만, 관리들은 모두 난색을 보였다.
그리고 약속한 듯이 모두 한 명을 쳐다보았다.
장원기.
주고후의 심복이자, 이제는 승상.
천명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폐하. 이러한 무역은 오랜 관행이옵니다.”
“관행? 관해애앵?”
“유목민들은 파렴치하고 신의가 없는 족속들. 이렇게 뻔뻔한 짓을 벌여놓고, 교역을 단절하거나 정상화를 요구하면 군대를 몰고 와 침략하거나 약탈을 하지요.”
주고후도 공부를 아예 안 한 건 아니다.
기억을 못 할 뿐.
그래도 옆에서 말해주자 기억이 나기는 했다.
“듣기 싫다! 관행이라는 이유로 짐이 참아야 한다는 말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뿐.
“유목민족들은 염치가 없고 신뢰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무엇이 더 있단 말인가?”
“전투력은 쓸만합니다. 우수한 전투력에 비해 머리는 나쁘고요.”
장원기는 간사하게 웃었다.
“제가 그들과 담판을 지어 용병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장원기의 확신에 찬 말에 주고후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분명 저 야만족과의 교역이 천명의 재정에 구멍을 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천명은 그 자체로 생산력이 낮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진명이나 천명과의 국력 차이는 점점 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즉, 이 분열을 단기에 끝낼 필요가 있다.
단기결전에서 몽골 기병은 큰 도움이 되리라.
“그들의 핏값으로 천자께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진정한 제관을 바칠 것입니다.”
“좋다. 가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장원기는 당당하게 궁궐을 나섰다.
오래 기다렸다.
저 더러운 성질머리를 받아주는 것도 이제는 끝이다.
곧 천하를 평정하고 부귀와 권세를 누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