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108
107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숯처럼 까만 곳에 내던져졌다. 한데 사지가 돌덩이에 깔린 것처럼 결박되고 말았다. 쩔쩔매며 허리를 드는데 앞발이 제풀로 섰다. 어찌 된 사정인지 알아보고자 아래를 보는데 우람한 호랑이 발이 달려 있지 무언가. 앞으로 쭉 내미니 뒷발도 속히 따라왔다. 이놈의 꽃 문양이 일 좀 하라고 했더니만 호랑이로 바꾸어버린 모양이었다.
앞은 캄캄하고 몸은 호랑이라. 이러다가 영영 사람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하는데 저기 코를 푹 찌르는 풀 내음 나는 곳이 있었다. 골똘히 냄새를 맡자 코끝이 벌렁거렸다. 끝단이는 체면이고 뭐고 네 발을 써서 출로로 달렸다.
풀 내음이 물씬한 곳으로 뛰고 나서야 마음이 흐물흐물하니 안심된다. 따스운 산자락에 당도한 모양인데 웬 벼루에 간 먹처럼 까만 안개가 퍼져 있었다. 그 안개 너머에서 짐승 무리가 건너 들어온다. 호랑이가 된 자신도 안개를 넘어서 이 산자락으로 온 모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꼬. 한데 상황을 살피기도 전에 코앞서 말싸움 소리가 났다.
호랑이가 된 것을 까먹고 입을 벌려 우렁차게 울었다. 아뿔싸. 귀신 부르는 사내가 셋이었다. 어흐흥 소리가 나자마자 사내 셋이 저를 바라본다. 이럴 수가. 이 사람이 쌍생이었구나. 하나 비슷비슷하게 생겨도 눈에 뵈는 기색은 같지 아니했다.
호랑이 발로 성큼성큼 걸어가 사내의 팔까지 닿으니 사내가 손을 들어 등을 긁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호랑이를 가지고 노는 게 기막힌지 앞에 있는 사내 둘은 아니꼬운 느낌이었다.
‘어쩌려고 이러니.’
‘이미 죽은 것들을 네 맘대로 되살리면 어떻게 해!’
‘저승의 법을 어기면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한다니까.’
둘은 성이 나서 불을 토하고 이쪽의 사내는 태평하게 받아내고. 사내는 살벌한 열변에도 침묵하다가, 소란이 끝나고 잠잠해진 후에야 되받아쳤다.
‘이미 타락하기 시작한 것. 죄가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떠해.’
‘아직 돌릴 수 있어.’
‘잘못을 빌고 네 모든 미련을 버린 다음에 올라오면 된다.’
형제로 뵈는 이들은 절절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이자는 무에 이리 꼿꼿한 것이란 말인가. 듣자 하니 이 사내도 범인이 아니라 어디 선녀나 도깨비 정도 되나 보다. 산에 사는 짐승들이 저 사내가 되살린 짐승들이라.
‘네 몸뚱어리가 몇 년을 버틸 것 같으냐. 그 애가 환생하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 성싶어? 타락한 너는 끔찍한 짐승이 될 게다.’
‘저승의 규율까지 어겼으니 눈이 멀든 다리를 절든 분명 어디 하나 못 쓰게 될 텐데. 셋째야. 부디!’
‘가.’
호랑이인 저가 듣기에도 섬뜩한 말을 무슨 고집으로 버틴단 말인가. 어서 저 말을 들으라는 뜻으로 허벅지를 밀었더니 이 모자란 사내가 웃으며 턱을 긁어주는 게 아닌가. 그 손짓에 억장이 무너져 엎드려 울고만 싶었다.
호랑이 된 몸으로 엉엉 울고 있으니 주변 짐승들이 왜 저러냐며 가만가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수군거림이 시끄러울 즈음 코끝이 찡해졌다. 호랑이 손이 아니라 빼빼 마른 손가락 다섯이 보였다. 허리 곡선이 고아한 무언가를 베고 누워 있었다. 일어나 보니 호랑이가 저를 받쳐 주고 있지 무언가.
“아……. 허리가.”
돌바닥에 반나절은 누워 있었던 것인지 허리가 찌릿하였다. 눈곱을 떼고 위를 보니 이것 참 절경이었다. 비는 쉼 없이 내리는데 새들이 엉기성기 나뭇잎을 모아다가 비 가리개를 만들어두었다. 기특하고 어여뻐서 실실 웃는 와중에 호랑이가 혀로 뺨을 할짝거렸다.
그 까슬한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떠는데 그 못난 사내가 생각났다. 또 꾀부리지 못하고 비 맞으며 돌아다니려나. 치마를 단정히 정리하고 옷고름도 정갈히 매고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한데 비 한 방울이라도 맞게 하기 싫은지 이 새들이 쫓아다니면서 비 가리개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닌가. 산의 주인보다 정성스러운 애들이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뺨을 만지는데 벌써 시답지 않게 울고 있지 무언가. 아까 고약한 꿈을 꾸어서 그런가. 이 의젓한 짐승들이 애잔하고 가여웠다.
키를 뒤집어쓴 예닐곱처럼 울면서 외로이 세워진 전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눈물을 달래려 하면 더 눈물이 나는 법. 훌쩍거리며 마루로 올라가는데 이거 큰일이 벌어져 있었다.
저가 나가 있는 사이 사내께서 아주 당차게 일을 벌이셨다. 사방이 그 산영이라는 여인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경묘한 필체로 적어둔 이름자가 온 벽지에 붙어 있으니 여기가 서당인지 전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투기조차 할 수 없게 사내는 온전히 그 여인의 것이라 외치는 듯했다.
“나도 영교 언니 행방만 찾으면 뒤도 안 보고 갈 거다, 뭐.”
여기서 그 여인의 망령이랑 짐승이랑 오순도순 살라고 떠날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속이 상하는지 저도 알 수가 없어 병이 날 노릇이었다.
끝단이는 툴툴거리며 앉아 사방에 벽서처럼 붙은 이름자를 바라보다가 볼수록 울적해지는 탓에 일어나버렸다. 그래도 사내한테 일러주어야겠지. 오늘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다고. 혹 정체가 저기 하늘에서 내려오신 선녀님쯤 되냐고 물어보기도 해야지. 하면 사내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보여주고 끝이 날 것이었다.
하나 있는 쓰개치마도 저 쓰라고 주었더니만 저렇게 방치해 두는 것 보아라. 혹여나 해서 나와서 봤더니 역시나 비를 맞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비 피하라고 마련해 둔 자리 앞에서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어리석고 애석하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침울해져서 지켜보는데 사내의 입술이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 봐도 뻔하다. 그 지난 여인의 이름을 외고 있는 것이겠지. 부루퉁해질 것도 없는데 마음이 미워지는 것을 보니 여기에 오래 있다가는 살림도 차리고 저 사내 시중도 들어주게 생겼다. 오늘치 보고만 얼른 하고 저는 속 편하게 잠이나 자야지. 에헴 거리며 사내의 옆으로 걸어가는 참이었다. 등 뒤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높아졌다.
“아!”
소름이 오스스 돋는다. 이제 하다 하다 회까닥 돌아버리기까지 한 것일까. 제 얼굴을 훔친 귀신이, 아니 그 여인이 보였다. 위아래 하얀 의복을 입은 여인이 비를 맞으며 좋아서 뛰고 있었다.
‘희사 님!’
여인은 비 내리는 하늘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는다. 그 웃는 얼굴이 저와 똑 닮았다. 여인을 투기하다 못해 여인이 되고파 환장하고 만 것인가.
‘이거 보시지요! 비를 내렸습니다, 제가!’
그냥 넘길 말이 아니었다. 비를 내릴 수 있다는 건 어쨌든 살림하던 여인이 아니라는 소리니. 하나 그 말보다도 앞서 한 말. 그 희사 님이라는 말. 그 말이 머리를 쪼개듯 아프게 했다. 꽃 문양이 새겨진 쇄골이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하였다.
“아유, 머리야…….”
이러면 되질 않는다. 영교 언니를, 초가집 지어 살자는 다짐을 기억해야 한다. 한데 왜 등을 토닥여주던 영교 언니가 낯설고 이 산 내음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걸까.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고개를 들었는데 사내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는데도 저 눈에는 한 톨의 염려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 서러운지.
“저기, 머리가…….”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지나쳐서 걸었다. 설령 여기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더라도 일절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사내였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과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를 한 대 때려주려고 졸졸 따라갔는데, 당황스레 떠나는 그의 등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도 예상 밖이라는 듯이 동작을 그치고 뒤돌아보았다. 저도 혼란에 빠져 허덕이는 차에 사내가 단호히 한마디를 씹으며 내었다.
“죽고 싶어?”
죽고 싶냐는 물음이 저리 평온한 건 이 사내뿐일 것이다. 하나 두렵다기보다 대들고 싶었다. 사내가 손을 들어 저를 무정하게 밀치기 직전이었다. 이번에도 마음의 명을 따르는 입술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
“희사 님.”
참말 그 여인의 대신이 되고픈 것은 아닌데. 어서 질서 없이 복잡한 산을 떠나가야 하는데. 한데 저 사내의 충격으로 울리는 눈이나 멈칫하는 손이 이다지도 좋은 것일까.
“희사 님…….”
사내는 산영이라는 이름을 알려준 어저께처럼 팔다리가 굳어 있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외우려고 벌린 입술이 애처로웠다. 발끝을 들어 고개를 빼니 사내의 입술 근방까지는 단숨에 갔다. 사내의 숨에서 풋풋한 산 내음이 났다. 꿈에 그리던 어미, 아비를 만났을 적보다 닿고픈 열성이 생겼다. 무당의 딸인 자신이 정인이라도 된 것처럼 달갑고 기뻐서. 간신히 발끝을 들어 훔친 입술은 누그름하고 촉촉했다.
사내의 품에 있으니 빗물도 아니 차가웠다. 사내의 뺨에 떨어지는 빗줄기가 눈물 자국 같다. 연신 떨어져 이마에 접한다. 지저분한 행인인 양 안아주지 않던 사내는 입술을 떼고 저를 두루두루 살폈다. 갸우스름히 기울어진 그의 얼굴이 예상치 못하게 다가와 제 입술을 머금는다.
새빨간 혀가 턱 끝에 닿고 떠나더니 다시금 느릿느릿 입술의 맛을 본다. 그 뒤로는 너 나 할 것 없이 안달이었다. 제 허리를 안고 뒤통수가 물러서지 못하게 꽉 잡는다. 여유가 모자라 헐떡거리는 입술 안으로 사내의 혀가 들이닥쳤다.
산영아, 산영아……. 사내의 입술이 낳은 말과 혀가 제 입 안을 차지했다. 희사 님. 몇 번 그렇게 응한 것도 같다. 과거에 묻혀 제정신 아닌 자들의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