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좋아하며 손뼉 칠 일이 아니던가. 외로운 뿌리는 쉬이 시드는 법이었다. 찬 바람 일던 이가 가까스로 하나를 두었는데 이것을 축하하지 않으면 무엇을 축하하랴. 하나 둘째는 싹을 자르듯 신난 그의 입을 막아 세웠다.
[둘이 입술을 비빈 사이라고.]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이처럼 머릿속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으나, 내용이 내용인지라 첫째는 놀라서 되물었다.
[입술을?] [내가 놀라서 나오다가 미끄러졌다니까.]좀처럼 흥분의 물살을 타지 않는 둘째의 목소리가 익살스러웠다. 확실히 셋째치고 이상 행보를 보였다, 싶었거늘. 단순히 가르치는 종으로서 아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아끼는 것이라면, 이것은 사뭇 문제가 달랐다. 셋째의 성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혹 정으로 신령을 아끼기보다 가지고 놀만치 노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첫째의 단순한 머리로 걱정이 미쳤다. 저렇게 진득하니 내려다보는 셋째의 시선이 께름칙했다. 첫째는 호두처럼 단단해진 목소리로 제 형제들을 불렀다.
“영화의 산에 더는 볼일이 없는 게지?”
“그렇지. 나는 귀찮아서 눌러앉은 거고.”
둘째도 천제가 남긴 조각이었다. 훗날이 걱정되어 여기에 남아 감시한 것이 아닌가. 한데 저 무정한 형제는 무어라 떠들든 말든 답이 없었다.
“셋째야.”
첫째의 진중한 목소리가 널리 울려 퍼진 뒤에야 방 밖을 떠돌던 희사의 시선이 돌려졌다. 신물 날 만큼 보아오던, 형제든 금수든 간에 도외시한다는 눈이었다. 나날이 정이 사라지는 형제의 낯은 지천에 깔린 잔돌처럼 흔했다. 첫째는 그들의 엄중한 짐을 날카로이 짚었다.
“여기는 언제까지 있을 작정이니?”
“왜?”
“왜라니?”
희사의 평이한 물음에 당혹스러운 것은 첫째였다. 이쯤 물으면 자연히 다음 일정을 기억할 줄 알았다. 사실 천제의 짐이라는 것이 말만 거창할 뿐, 매해 반복되는 일을 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봄이 찾아오면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하늘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계절이,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예전이라면 오히려 나서서 그 계획을 주도했을 희사가 모른 척 창밖만 보고 있다니. 부아통이 머리꼭지까지 치미는 것은 형제들이렷다.
“떠나야지 않니, 이쯤이면.”
매해 하늘의 기운이 그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한곳에 힘이 고이게 되면 버려진 우물처럼 썩어드는 법이었다. 하여 형제들은 하늘을 이끌 새로운 인물, 상생의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인물을 물색했고, 됨됨이가 뛰어난 이를 발견하면 남몰래 도움을 주어 걸출이 되도록 힘썼다. 출신이 고귀하든 미천하든 간에 걸출이 될 가망만 있다면 미리 침을 발라두고 키우는 것이었다.
우연의 일치처럼 하늘의 사람들이 그간 갈고닦았던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시기가 있었다. 하늘의 복사꽃이 난만한 이맘때쯤 산수 고원에 장터 비슷한 게 열린다. 보통 천신들이 종을 구하러 들르는 게 칠 할이요, 미천한 자가 기량을 파는 게 삼 할이었다.
하나 형제들의 눈에 들기가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백 년 동안 한 사람도 뽑히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만큼 형제들의 안목에 차는 이는 드물며, 산수 고원의 대개는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고 참석한다는 소리였다.
모든 하늘의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순서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이들이 법칙을 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첫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이탈하려는 형제를 보았다.
“당연히 가겠지.”
눈길이 신령에게 가닿은 사내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내 의무를 잊었을 거라고 여기는 듯한데.”
“아니라면 다행이구나. 셋째야.”
첫째의 시선은 형제가 닳도록 보는 신령을 훑어내렸다. 눈을 감고 끙끙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덤벼보는 성정인 듯싶었다. 신령을 지켜보던 첫째의 얼굴에 다정한 물이 들었다. 산신령들은 태생부터 미물인 이들이 태반이었기에 아무리 신력이 잘나봤자 구름, 바람, 비를 운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기서 나아가 어느 경지에 이르는 인물이 될 때도 있었지만, 구왕을 훔쳐먹은 산영이 그 경우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저 비를 잘 내리게만 해주어도 갈채를 받아야 할 지경인 것을.
“참 열심인 아이야.”
첫째의 말이 떠나자마자 희사의 시선이 들이닥치듯 돌아왔다. 조금 전에 훗훗하던 분위기가 딴판으로 변하였다. 흐름을 가늠하지 못한 첫째는 의아해 물었다.
“왜 그렇게 보니?”
한데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매양 비수를 꽂는 말이 자연스럽던 희사가 머뭇거리는 것 아니겠나. 영문 모를 형제들은 희사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희사의 입에서 떨어진 목소리는 바닥을 기는 것처럼 몹시 낮았다.
“탐이 나?”
“응?”
하나 흐트러진 얼굴은 금세 묻히고 다시 무정한 눈빛이 끄집어졌다. 희사는 눈을 감고서 꼬랑지가 긴 숨을 뱉었다. 낱낱이 담아 들은 첫째는 당혹스러워 입술이 닫혔고, 귀가 어두운 둘째의 입술은 끼어들 자리 없이 꿰매졌다.
“모레 떠나는 걸로 해.”
결국 희사가 말을 마쳤을 때 형제 중 입을 열 자격이 있는 자는 없었다. 응당 나왔어야 할 대답이었건만. 탄생부터 쭉 함께하던 형제는 그처럼 곤한 셋째를 본 적이 없었다.
군더더기 없던 삶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균열이었고,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미세하여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 * *
산영은 구름 위에 앉아 멀거니 돌멩이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은 딴생각이 가득 차 있어, 비를 부르는 훈련이 더뎌지는 참이었다. 쓸 만한 이가 되어서 옥룡산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게 목표였거늘. 산영은 목적을 잊고 사내의 생각에 퐁당 빠져 있었다.
부르지 않아도 냉큼 찾아오는 입맞춤에 대한 기억. 예전만큼 닭살 돋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 잡혔다. 저절로 촉촉한 입술을 그려내고, 그 입술이 주었던 따스한 기억 또한 선명해졌다.
비를 부르는 방도를 몇 날 며칠이고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곤란한 상황이란 말인가. 하나 매 들고 자책하여도 기억은 악착스럽기 그지없어, 어렵사리 비축해 둔 힘을 쪽 빼려고 들었다. 그저 바람 쐬며 눕고만 싶지 않은가. 반기 들 힘이 없는 산영은 구름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하늘 사람들은 다들 그런 것인가.”
친하지 않아도 입술 정도는 비비면서 사는 모양이지. 그의 그림자만 보여도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는 자신에 비해, 저쪽은 지나가는 들개를 본 것처럼 무덤덤하기만 하니. 산영은 왔다 갔다 하며 헷갈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기억을 손빨래하듯 주물러서 없앤 것일까. 그렇다고 나서서 물어보자니 그건 또 모양 빠지는 일이 아닌가. 해서 하늘 사람들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했으나, 담이 작은 산영은 끊이지 않고 걸려 넘어졌다.
고민을 사흘 이상 지속해 본 적 없는 산영은 마음의 무게가 무거웠다. 지니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고 할 일을 못 하도록 묶어두는 마음이었다. 어서 떨쳐내거나 어디에 버려두고 싶은데, 입술을 맞댄 희사를 마주치면 마음이 제 마음이 아니게 된다. 산영은 이것이 아주 불공평하다며 골을 냈다. 이쪽은 난리법석을 떠는데 저쪽은 태연자약하다니.
“흑둥아. 이 주인이 못났다, 못났어. 얼른 잊어야 하는데…….”
구름 위에서 앞뒤로 구르며 정신을 다잡으려고 노력하였다. 한데 웬일로 흑둥이의 기세가 잔잔하였다. 산영은 고개를 빼고 흑둥이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얌전히 주인을 기다려야 할 흑둥이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제가 주는 것만 받아먹고, 제 손길이 있어야 안정을 느끼는 영물이었다. 걱정이 들어찬 산영은 당장 땅으로 내려왔다.
“흑둥아?”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만히 앉아서 흑둥이를 기다렸다. 하나 졸음기를 매단 눈이 느릿하게 끔뻑거릴 적까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조급해진 산영은 일어서서 둘러보기 시작했다.
산의 초입에서는 동떨어져 있고 영화의 궁에서는 가까운 곳이었다. 풀만 듬성듬성 자란 빈터인지라 수련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산영은 고개를 내밀어 두리번거리다가 흑둥이의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톱이 세모난 발자국은 영화의 궁으로 이어져 있었다. 산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엉뚱한 길로 샌 것이 아니라 지쳐서 먼저 들어간 모양이었다. 산영은 영화의 궁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흑둥이의 발은 착실하게 흔적을 남겼다. 진즉에 이렇게 둘러볼 것을, 괜한 걱정에 휩싸였지 무언가. 산영은 궁의 문턱을 넘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수련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려준 흑둥이에게 줄 간식거리가 없는지 둘러볼 참이었다. 한데 마침 부엌에서 나오는 종 하나가 산영을 발견하자마자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산영 님.”
“아, 예.”
옥쟁반 위에 오미자처럼 붉은 찻물이 담긴 찻잔 세 개가 있었다. 산영이 찻잔의 개수를 눈여겨보자 종은 생각나 말한다는 듯이 일러줬다.
“어제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산영은 머릿속으로 희사의 형제들을 그렸다. 재수 없는 형제 하나, 마음씨 착한 형제 하나. 세 형제가 모여 담소라도 나누는 모양이었다.
당분간 희사를 마주할 일은 줄어들 것만 같아 산영은 안심하였다. 종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이 옥쟁반을 들고 사라졌고, 어쩐지 싫증이 난 산영은 흑둥이를 찾아서 잠이나 자자 싶었다.
흑둥이가 따라오라는 듯이 찍어놓은 발자국이 슬슬 희미해질 즈음이었다. 산영의 침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부엌 뒤편으로 흑둥이의 발자국이 숨김없게 찍혀 있었다. 흑둥이가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인가. 발자국을 바라보며 산영이 고개를 갸웃거릴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