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51
51화
혈상약이 주는 통증은 잘고 사소한 문제였다. 사실 그쯤은 예상 범주에 속한 고통이었으나 실지 문제는 가슴팍에 일파만파 번지는 쓰라림이었다. 희사의 무릎을 꿇리고 동공에 주렴을 두른 듯 앞가림 못 하도록 만드는 통증. 누차 찾아오는 통증은 웬 영문인지 몰랐다.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었으나 의지를 배반한 입술은 투기와 헛된 망상을 뱉었다. 그에 당한 형제가 드러누워 시뻘건 목을 보이더라도 연민하기보다 얼른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것. 머리를 울리게 하는 잡소리를 그치고 당장 산영의 침상에 몸을 누이고 싶은 것.
천제의 조각인 그들은 죽음의 땅으로 가지 못하는 몸이었다. 데려갈 영이 없고 흙으로 사라질 몸이 없었다. 하여 중심부를 수십 번 후비고 갉아내도 살아남는다는 소리였다. 비록 며칠은 쓰러져 있을지 몰라도 죽음의 땅으로 가기에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 땅에서 유일하게 그들이 갈 수 없는 곳이렷다.
그러하니 심장을 뽑아 던지면 통증을 없앨 수 있을까. 만일 심장의 뿌리까지 파내더라도 통증이 끊이질 않으면, 끝없이 형제의 눈길에 노여우면 어찌할까. 땅에 붉은 그늘이 지고 욕지기가 치받쳐 온다. 이것이 치 떨리는 분노라는 것인가.
불순물 섞인 속과 달리 겉은 잔잔하고 멀끔하였다. 쓰러진 형제의 열이 담긴 목소리가 희사를 긁어댔다.
“얼빠진 놈.”
첫째의 부축을 받고 일어선 둘째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보낸 날카로운 바람이 안채로 들이닥쳤다. 머리칼을 나풀나풀 휘날리는 바람은 암울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처럼 거칠었다.
둘째는 어두운 바깥으로 발을 내밀었다. 희사는 벌어진 일에 대한 답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목을 짓누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불길하게 낙하했다.
“미안해.”
둘째를 따라 나가려던 첫째가 말하였다. 그는 피를 지혈하고 있는 아우에게 우수에 젖은 눈빛을 보냈다. 삼단 같은 불길처럼 타올랐던 희사의 감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통증의 여파만을 남기고 언제 노여웠냐는 듯 사라진 후였다. 희사는 오로지 고통만을 간직했다. 날갯죽지의 혈상약, 가슴을 벼리는 듯한 통증, 형제가 남긴 상흔.
첫째는 도움을 주고자 다가왔으나 희사는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걱정을 안고 다가오는 첫째의 손을 매정하게 피했다. 사색의 파도에 쓸려 고요해진 눈을 본 첫째는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려고 이러니.”
답하는 희사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무정했다.
“어쩌려고 이랬을 리가.”
“하면. 충동에 이기지 못했다는 소리니?”
충동이라는 단어로 가볍게 정리될 상황이 아니었다. 이것은 충동이 아니라 절단이었다. 기억이 절단되고 이성이 절단되고 냉정이 절단되었다.
희사는 피가 멎기 시작하는 상흔에서 손을 떼었다. 새빨갛게 변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다가 허탈하게 내렸다. 이 와중에도 피를 보고 놀랄 산영을 떠올렸다. 일을 무참하게 망가뜨린 자신에 대한 의문보다 물에 씻을 생각이 간절한 것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혈상약의 상흔이 아파서 그래? 응?”
부디 닥치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 입을 연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별당 쪽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폭삭 가라앉은 예리한 통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우의 달라진 표정을 본 첫째는 별당으로 향한 기척을 알아챘다.
“희사야, 잠시.”
도리어 막아서는 첫째의 목소리가 화를 불러일으켰다. 기약 없는 어두움이 머릿속에 망상을 불렀다. 간지럽히는 수준이던 가슴속의 가시는 벋친 덩굴이 되어 심장을 싸맸다.
따끔따끔한 투기가 자라나 총기를 먹어치우며 희사를 조종했다. 희사는 간신히 숨 쉬는 머리의 조언을 거부하고 뒤뜰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머릿속 음험한 망상은 둘째의 웃옷을 벗기었다. 잠자는 산영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의 주인은 그를 닮았으나 그가 아니었다. 희사는 시리고 얼얼한 가슴을 짓누르며 숨을 헐떡였다. 이윽고 망상 속 산영이 새초롬하게 형제를 바라보다가 입을 맞추었다.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손끝이 떨렸다.
냉정해진 것은 오직 그의 낯이었다. 눈빛은 봄 추위에 언 숨결처럼 차가웠고 간신히 붙든 미소는 날아갔다. 일이 잘못됐음을 느끼고 뒤따라 나온 첫째의 발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쏘아진 화살처럼 매우 빨랐다.
“잠깐! 희사야!”
부르짖는 첫째의 목소리는 마음속 초조함을 건져냈다. 마침내 길을 꺾어 들어가 뒤뜰로 나아갔을 때는 눈앞이 하얘졌다. 망상에 사는 산영이 형제의 목에 손을 감은 후였다.
둘째는 별당을 바라보며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침상에 누운 이가 곤히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망상에 빠져버린 희사의 눈에는 산영을 탐하기 위한 전조로 보였다.
나쁜 것을 배운 희사는 자신의 천상위존의 검을 불러들였다. 경쾌한 휘파람 소리를 따라온 보검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희사는 결단을 내렸다.
“둘째야!”
하나 둘째는 만만치 않게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정 아니 되면 자신이 산영을 훔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이런 식의 대치가 한번은 있을 것이 자명했다.
햇볕을 받아 눈부신 칼날이 다가왔다. 희사의 눈은 익히 알던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둘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천상위존의 검을 쥐었다. 혈육의 피를 원하는 천상의 칼이라니. 첫째의 발은 한층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희사가 아닌 둘째에게로 쏠리었다. 하나 희사의 칼날이 찌를 듯 겨누어졌다. 자제를 잃은 희사는 웃는 얼굴이었다. 추측하건대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어 상황에 적합한 표정을 짓는 것이 어려운 듯싶었다. 성질을 부리거나 상흔을 입을 적에 실없이 웃고 있으니 말이다.
“나와. 거기서.”
형제에게 차마 검까지 겨누지 못한 둘째의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하나 검을 쥔 손은 파르르 떨고 있음이었다. 칼이 제게 겨누어졌다는 모욕감 때문인지, 감히 피를 바라는 아우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감정에 좌우되지 않으려 했으나 십분 비통하였다.
둘째는 신뢰가 무너진 눈으로 희사를 바라보았다.
“참. 재밌다, 재밌어.”
“더 재밌게 해줄게. 내려와.”
“이 안에 꿀단지라도 숨겨두었어? 하기야 무얼 잡수기는 하셨지.”
희사의 눈은 더 이상 형제를 형제로 보지 않았다. 둘째가 발가벗은 산영이 든 별당 앞에 서 있을 때부터 열기가 일렁거렸다. 예전이라면 당치 않았을 분노가 당장은 기꺼웠다.
성이 나면 성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희사를 들뜨게 했다. 신경을 조이는 두통이 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끓고 더운 숨이 흘러나온다. 이유는 자신이 아니라 상대에서 찾는다. 날로달로 고민의 깊이도, 고민의 길이도 짧아지고 있었다.
어디 한번 베어보라는 듯 자신만만한 형제에게 다가가 휘두를 수 있을 만큼. 기꺼이 형제의 피를 보아 눈앞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싶을 만큼. 의심해야 한다는 올바른 생각은 뒤로 밀려났다. 망상이 실재가 되기 전에 씨를 말리라는 명령만 따를 즈음이었다. 바깥의 소란을 감지한 별당의 주인이 신음을 내며 일어났다.
‘아고 시끄러…….’
서로를 노려보느라 바빴던 형제의 눈이 뒤로 향했다. 문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 나더니 여인의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홀딱 벗겨놓고 어디를 간 것이지.’
여차하면 발가벗겨진 채로 납치당했을 수도 있었거늘. 바깥 사정을 모르는 산영의 그림자가 주섬주섬 바닥에 있는 웃옷을 주워 꿰입었다. 눈살을 찌푸린 둘째는 욕설을 지르며 손 안에 검을 흩트렸다. 꼴사납게 신령의 앞에서 칼싸움하는 창피를 당할쏘냐. 이러나저러나 그들은 품위 있는 천제의 씨앗이었다.
골골거리는 산영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조심조심 별당의 문이 열렸다. 바람을 들이는 것이 목적인 듯 활짝 열지는 않았는데 문 앞에 인기척을 눈치챈 모양인지 고개를 쑥 내밀어 본다.
“이거… 희사, 아니지.”
산영은 세모꼴로 눈을 세우며 둘째를 바라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고개를 돌리고 돌리던 산영이 멈칫했다. 별당 앞에 버티고 선 희사와 첫째를 발견한 것이다. 기습하듯 닥친 세 명의 사내를 보며 놀라는 것도 잠시. 산영은 피투성이가 된 희사의 웃옷과 범상치 않은 칼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것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야. 희사 님… 그 피가 다!”
까무러치게 놀란 산영의 동공이 커졌다. 희사의 웃옷을 훔쳐 입은 꼴로 후룩 날아오를 기세였다. 하나 검을 놓친 희사의 걸음이 먼저였다. 품이 큰 웃옷이 산영의 몸에서 흘러내릴 차였다. 단숨에 별당 툇마루로 뛰어올라 산영을 안아 들었다.
둥실 떠오른 산영이 당황할 틈을 주지 않고 별당 안으로 데려가 문을 닫아버린다. 돌차간 들어오게 된 산영은 파악이 늦되었다. 빨간 핏빛의 웃옷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쩌다가, 이 꼴이 되어가지고…….”
나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에 나가려 했음이었다. 하나 희사의 입술은 엉큼스러운 욕심을 채웠다. 산영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누른 뒤에 막 깨어난 산영의 살내음을 맡았다. 산영의 야무진 손이 그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려 할 때, 바깥에서 산통을 깨는 목소리가 건너왔다.
‘열흘.’
딱 부러진 둘째의 목소리는 그 말만을 남기고 그림자를 거두었다. 아차 싶은 것은 찰나.
희사는 산영을 안전한 별당에 놓아두고 문간을 넘었다. 하나 형제의 등은 하늘 위로 떠나가는 중이었다. 앞에서 기다린 듯이 선 첫째는 골치 아픈 한숨을 내쉬었다.
[열흘이야. 이게 마지막 나의 인내다, 아우야.]열흘 안에 일을 제대로 처리할 것. 그것이 아니면 아까 꺼내진 형제의 칼은 희사가 아닌 다른 이를 벨 것. 모르지 않는 소리였다. 형제의 마지막 배려임을, 일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간 아우에게 주는 마지막 유예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모르지 않는다고 행할 수 있었으면 오래전에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별당에 먼지를 덮어쓴 바람이 불었다. 형제가 떠나가고 비가 올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