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조심성이 지나치게 없는 간 큰 도둑이었다. 다가가 문을 여는 그의 손길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하나 문고리를 잡자마자 기척은 소리소문없이 죽었다. 일부러 절커덕거리며 낚시를 던진 느낌이었다.
별당 안은 무척 고요했다. 둥그렇게 부푼 이불 동산, 짧아지는 촛대에 가물거리는 촛불, 그리고 침상을 가린 너른 등판이 보였다.
누구냐며 따져 물을 수 없었다. 묵지 같은 머리칼에 푸르른 웃옷을 즐겨 입는 사내. 희사의 외양을 빼닮은 이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인가 했다.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딜 때를 제외하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사내는 산영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었다.
[곱다.]사내가 입을 연 순간 단박에 아버지가 아님을 알았다.
잘난 체하며 산영의 뺨을 쓰다듬는데도 말릴 수 없었다. 희사는 산영을 죽 훑어보았다. 산영의 순조로운 숨소리는 깨어지지 않는다. 다리를 쪼그리고 누운 자세로 새근새근 잠들었다.
사내의 행동은 무례하고 무절제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익숙하였다. 걸음걸이, 말투, 눈빛까지 뺌 없이 자신의 것이었다. 희사를 똑 떼어내 반으로 가른 것처럼 똑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저것은 허구이며 실재가 아니다.
희사는 차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별당을 나가면 허구는 팍삭해진다. 이따위 허접스러운 환시에 속기엔 그는 낡고 묵은 삶을 살았다.
[피하려는 건가?]사내는 집적거리듯 산영의 침상에 올라갔다. 하나 이부자리는 구겨지지 않고 산영 또한 꼼짝하지 않았다. 희사는 떠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가 궁금하여 뒤돌아보았다.
꼴불견이었다. 환시는 산영의 입술을 물고 희롱질했다. 사내나 자신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마구 내려치며 분풀이하고 싶었다. 칼을 빼 든 적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욕정에 져버린 밤을 흉내 냈다. 사내의 큼지막한 손이 봉긋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곤한 산영을 희롱하는 데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대체 자신의 머릿속은 어느 선까지 추잡해지는 것일까. 통증만으로 모자라 비루한 환시에 이르게 되었다.
[진실로 기뻐본 적 있나. 진실로 탐하고, 진실로 아파하고, 진실로 정이라는 게 무언지.]환시 주제에 산영의 웃옷을 슬금슬금 끌어 내려 하얀 가슴을 내보인다. 침 흘리며 유혹하는 꼴이었다.
[알 수도 있어.]나아가던 발길을 멈춘 희사는 사내를 직시했다. 삐뚠 웃음을 지은 사내의 손이 산영의 머리칼을 빗겼다.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은 비열하며 비릿했다. 감정이 물씬 살아난 사내의 표정은 낯설었다.
쳐다보는 얼굴이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사내는 다 아는 것처럼 그를 동요시켰다.
[한 걸음만.]사내는 산영의 머리칼에 감긴 손을 내밀었다. 가슴께를 낫으로 찌르다가 뛰쳐나온 것처럼, 올바른 길을 두고 우회하고 있는 자신을 질책하는 것처럼, 산영을 곱게 안아 든 사내는 몹시 감격하고 있었다.
희사는 사내의 손을 잡지 않고 물었다.
“네가 나의 제약이로구나.”
무정, 다정, 나태. 아비가 걸어둔 제약을 무심중에 깨고픈 자신이 만들어낸 환시.
희사는 발목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질질 끌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당차게 발을 휘감으며 뒤얽는 덩굴이 있었다. 덩굴의 줄기는 사내의 몸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이라. 피다 만 꽃봉오리가 몇 개 피어 있었다. 고작 다섯 개 달린 잎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이 꽃봉오리는 아비가 씨를 말려둔 제약일 터.
환시는 안아 든 산영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잠든 산영은 뒤척임 없이 얌전했다. 실제인 줄 알았던 저것 또한 실제가 아닐 것이다. 하나 확고하지 못한 마음은 술렁거렸다. 얼어 있는 싹은 비바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늘하늘했다.
흔들리는 싹은 희사의 마음을 함부로 찢어발겼다. 성숙하지 못한 봉오리에 불과했다. 하나 무시한다면 움을 틔우고, 꽃봉오리를 벌리고, 온 마음에 씨를 뿌릴 터였다.
[새로운 길을 얻을 수 있어.]본 적 없는 새로운 것. 여태껏 그가 가져보지 못한 것. 한 번도 바란 적 없었으나 바라게 되어버렸다. 희사는 책망하듯 눈을 감았다. 이것은 기회였다. 오랜 세월 제약을 깨뜨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진실로 깨기를 단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었기에. 하나 이것이 기회를 가장한 노름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새로운 길이 아니라 추락의 길이 될 수도 있지.”
[그조차 달콤할 텐데.]“추락이라고 부정하지는 않는군.”
[비에 맞으면 젖는 것은 당연한 순리가 아니던가.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볕을 쬐면 땀을 흘리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것이 없었으니.]이 조그마한 별당에서 삶을 가르는 선택을 하리라고 예상해 본 적은 없었다. 담백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나타난 환시는 곧 자신의 의지였다. 누군가 이렇게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이었다. 하나, 한데, 그럼에도.
“내가…….”
[내가.]희사는 기세등등한 환시에게 다가갔다. 잠든 산영의 얼굴은 그간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소중스러웠다. 꿍쳐둔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내를 보다 보면 알 수 있었다. 가슴께가 쓰라릴 때마다 자신의 얼굴은 봄 들판이었을 것이다. 애틋하고 가지고 싶고 하나 그것은…….
“나는 추락할 수 없어.”
도리어 달게 졸아든 마음을 깨닫고 확실해졌다. 지독히 달기에 쓴맛이 두드려졌다. 산영을 집어넣은 앞날은 불분명하고 예측할 수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전부를 걸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나의 추락은 하늘의 추락이니까.”
그의 손으로 하늘을 떨어트릴 수 없었다. 형제의 목을 조르던 혼란이 조금씩 걷혔다. 일생 마음 없이 가볍게 떠다니던 그가 버틸 수 있을까. 마음을 달아매 무거워진 몸은 명백히 추락할 터다.
혼란의 이유를 마주한 순간 그는 누구보다 차분할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란은 두려웠으나 이유를 알게 된 혼란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산영이 좋았다. 좋아서 연정을 빈 가슴에 채워 넣고 싶은 것이었다. 속된 말로 정분이 났다. 기어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희사는 산영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엊그제 산영처럼 따듯한 환시였다. 사내는 비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마음은 꽃도 피지 못한 덩굴을 온몸에 감싸고 있었다. 이러고 제 무의식 어딘가에서 평생을 갇혀 있었으리라.
희사는 웃는 얼굴로 칼을 꺼내 들었다. 살아갈 날 동안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무정해야 하니 양해해 줘.”
[기어이.]“나는 결국 네 불운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희사는 산영에게서 몸을 떼었다. 허리를 펴고 산영을 안고 있는 환시의 목에 칼을 가져갔다. 사내가 너누룩이 가라앉은 눈을 치뜬 순간이었다. 그는 취하지 못할 앞날을 베었다.
사내는 혼란을 지운 칼날에 무너져 갔다. 한여름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꽃봉오리를 간직한 싹의 다섯 잎 중 하나가 떨어졌다. 사라지는 와중에도 사내는 산영의 머리칼을 놓지 않았다. 잠시 뒤 서늘한 안뜰과 발등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장만이 남겨졌다.
베어진 마음의 조각은 그의 발등 위에서 떠돌다가 흙 속으로 가라앉았다. 찬바람이 그를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머리를 울리는 가슴께의 통증이 사라졌다. 그때 나뭇잎을 삼킨 흙 위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희사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의 손은 찬찬하게 자신의 뺨을 훑었다. 비가 흘러내린 축축한 자국이 뺨에 남았다. 희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만지다가 눈을 감았다. 어차피 바람에 마를 자국이었다.
* * *
흙에 파묻히는 꿈을 꾸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다행히 꿈은 꿈으로 끝난 것인지 흙은커녕 정결한 이부자리만 보였다. 산영은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정한 임을 찾아야지. 산영은 어기적거리며 이부자리에서 멀어졌다. 밤새 바람을 막느라 지친 문을 열자마자 까만 털이 산영을 반겼다.
“흑둥아!”
무정한 임만큼 무정한 주인이었다. 산영은 허둥지둥하며 뛰어갔으나 예상과 달리 흑둥이의 살은 포동포동했다. 입가에 여물을 묻히고 온 것을 보니 어찌어찌 먹이를 해결한 모양이었다.
정분나버려 못나진 주인의 손을 금세 떠나갔다. 산영은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내 잘못이야. 까맣게 잊었다니.”
하나 흑둥이는 반갑다며 산영의 뺨에 털을 비비적거렸다. 영특하고 정이 많은 영물이었다. 산영은 흑둥이를 끌어안고 무정한 임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또 어디에 간 것인지.”
때마침 흑둥이가 산영의 옷자락을 이로 물고 끌었다. 말도 알아듣는 것이냐며 산영은 손뼉을 치고 웃었다. 주인의 심정을 아는 흑둥이를 따라 얼른 별당을 벗어났다.
늘 그렇지만 하늘의 날씨는 나들이 나가기 좋았다. 만약 고원을 떠나 희사의 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함께 그 아름다운 나무들이 심어진 길을 걷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심통이 났는지 모르겠으나 볼 장 다 본 것을 보면 화도 풀린 것이겠거니. 몸의 추억보다 기억할 거리를 많이 쟁여두고 싶었다.
“사람 부끄럽게끔 만드는 데 재주 있어서.”
산영은 몸에 남은 순흔을 바라보다가 헛기침하며 가렸다. 앞으로는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할 참이었다. 그를 보면 손발이 뜨끈하고 열이 나고 웃음이 난다. 하나 따스한 정을 주었으면, 서로를 애지중지 챙겨주었으면, 하는 버젓한 욕심이 있었다.
이미 갈 데까지 간 사이인 데다가 저를 좋아하니 이 정도 요구쯤은 당당하게 하리라 여겼거늘. 저 멀리에 앉아 있는 희사를 보자마자 들이댈 숫기가 없어졌다.
“저기, 아침이지요? 지금이.”
희사는 안채 툇마루에 어엿이 걸터앉아 있었다. 이렇게 남처럼 떨어져서 말을 해본 게 얼마 만인가. 산영은 흑둥이를 놓아두고 안채의 계단을 밟았다. 그의 앞까지 다소곳한 색시처럼 올라갔다.
“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