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87
86화
산영은 세 살배기처럼 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기르는 닭을 실에 매어둔 건 보았어도 사람을, 그것도 부인을 매어두다니. 남이 해도 기가 찬다고 할 판인데 하물며 그 짓을 한 사람이 낭군이란 자였다.
문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접고 고대로 침상에 끌려온 참이다. 등 돌린 낭군은 손목에 밧줄을 휘둘러 감고 잠들었다. 괜히 말똥한 정신으로 뒤척뒤척했다. 자세를 바꿀 적마다 뒤집어쓴 이불이 털럭거렸다. 좁은 침상이 세상사의 전부 같았다.
혼인날부터 사정이 나빠졌다. 저가 나가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걸 넘어, 슬그머니 바깥 얘기만 해도 찬 바람이 불었다. 그러다가 혈상약의 상처를 알고부터는 귀양살이하는 죄인 심정이었다. 꿈에 부푼 짝짜꿍은 헛발길질로 판명 난 셈이다.
실망한 저가 토라질수록 희사는 섬찟해졌다. 하면 저의 심신이 안락하겠는가. 한이 한을 낳는 악순환만 거듭될 뿐이었다.
“자.”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산영의 시선은 알알이 빛나는 노란 주렴에 닿아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나가게 해줄 테니.”
참말입니까. 말로만 하는 소리가 아니고요. 엊그제라면 선떡 먹고 취한 모양새로 안겼을 테지만 사정이 바뀌었다. 산영의 발목에 묶인 오돌토돌한 밧줄은 견고했다. 혹 냅다 도망이라도 칠까 봐 그러나.
해탈한 마음가짐으로 헤아려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하룻강아지도 아닌 부인을 이리 묶어둘 수 있는 것인가. 삭힌 엿기름처럼 끈적거리는 감정이 머리를 찔러왔다. 사무친 적개심이었다.
마음에서 버적거리며 자리 잡아갈 무렵 뻗어진 손길이 있었다. 산영의 머리통을 당겨와 제 가슴팍으로 데려간다. 토닥토닥 달래주는 손이 산영의 등을 문질렀다. 도마에 올려두고 잘게 썰다가, 고생한다며 약 발라주는 꼴이었다.
저를 듬쑥 끌어안고 숨 고르는 낭군이 미울 뿐이었다. 하기야 옛날부터 그랬다. 좋아 죽겠다고 몸살 난 건 혼자고, 저 낭군이란 사내는 간혹가다가 능수능란하게 여인의 혼만 빼놓지 않나.
혼례를 잘못 올려도 한참 잘못 올린 모양이다. 마음은 애초에 몸져누웠다. 와중에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이 해님처럼 따스울 건 무언가. 모진 사람이라며 침도 뱉지 못하게 한다. 해도 해도 너무 꼴사나웠다. 그는 소리 죽여 우는 산영의 뺨을 낚듯이 올렸다.
“울어?”
독하게 벼르듯 볼때기를 잡아 누른다. 오기로 이를 간 산영은 자는 척을 했다. 못내 그의 심기를 거슬렸나 보다. 어처구니없다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픈 사람은 나인데, 우는 건 네가 할 참인가.”
죽어도 안 본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희사는 비아냥거리며 산영의 젖은 입술을 핥았다.
“밤새 안겨볼래?”
상처 난 곳을 들쑤시며 아프지, 아프지 하는 것이었다. 산영은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품에서 도르르 굴러 나왔다. 구석에 처박힌 것처럼 등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야 그의 숨 냄새도 맡기 싫었다. 닭장의 뭣처럼 묶여 그의 모진 말을 듣는다니. 산영은 입을 틀어막고 헐떡이며 울었다.
한데 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기어코 굴러가 누운 아내의 등 뒤에 딱 붙었다. 축 처진 부인의 배 밑에 손을 억지로 쑤셔 넣고 들어 올렸다. 눈물로 흠뻑 전 산영을 기어코 제 몸 위에 올려둔다. 희사는 못나진 부인의 얼굴을 양손으로 쓸어 만지며 닦아주었다.
“산영아.”
“부, 부르지 마시지요.”
눈 감고서 싸늘하게 선을 긋는다. 산영은 빨간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억울한 건 하필 그의 배 위에서 훌쩍거린다는 거다. 희사는 점잖게 기다린다. 산영의 울음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자세였지만 그럴수록 설움은 배가 되어 뭉쳤다.
눈물 줄기가 뺨에서 흐르다 못해 목으로 넘어갔다. 목 끝까지 채워진 눈물은 독설이 되어 뱉어진다.
“아예 저를 애 대신에 키우시렵니까?”
영영 안 보겠다는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외쳤다. 빨개진 코로 열심히 그를 할퀴었다.
“어여쁜 비단옷, 비단 신은 무엇하러 주십니까. 어차피 이 방에서 꼼짝 말고 살 것. 아깝게 그런 것은 왜 주셨는지요.”
눈물에 말이 막혀도 뻐끔뻐끔 입을 벌렸다. 울려오는 답 없는 메아리였다. 낭군의 낯이 어떤지 빤했다. 동요 없이 목석 같은 자세로, 저를 깔보며 싸하게 있겠거니 했다.
하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쓸쓸한 광경이다. 눈물만 없다뿐이지 그는 처절히 괴로워했다. 열 손가락을 생으로 분질러도 저 얼굴은 안 나오겠다. 여린 마음이 딱하다며 혀를 찼다.
“그, 그런 얼굴 하면…….”
입에 독사가 똬리 튼 것처럼 짖어댈 줄 알았거늘. 희사는 담담히 우는 산영의 얼굴에 입을 댈 뿐이었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떼어지고는 끝이었다. 겨를 없이 뱉어둔 독설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한데도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안 나오는 걸 보니 이 마음도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자.”
저의 눈물 때문인지 한풀 꺾인 희사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내일은 꽃동산도 데려가 주고, 냇가도 데려가 주고, 다 데려가 줄게.”
그야말로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셈이지만 산영은 대꾸 없이 그의 배 위에 엎드렸다. 싸울 기운이 떠나가 곯아떨어졌다. 아기 재우듯 등을 만져주는 손도 달았다. 쓰라린 속에 발라주는 손길이 잠을 불렀다. 발목 잡은 밧줄을 생각하면 이 혼례는 아니올시다였지만, 좌우간에 오늘치의 화를 푼 느낌이었다.
혼례를 잘 못 올렸다는 생각은 그래도 너무했지. 백기를 들고 흔들던 연정이 꼬리 내리며 말했다. 참 뿌리 깊고 지독한 연정은 발을 빼지 못하고 산영의 눈치만 살살 본다.
산영은 내일 조금 괜찮아지면, 훌훌 꽃동산에도 가고 냇가도 나가면, 그러면 희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참이었다. 이 밧줄도 내일이면 풀어주겠거니 했다.
한데 푹 잠이 들고 일어나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기지개를 켰을 즈음이었다. 허리가 제법 쑤시지만 오늘이 무슨 날인가. 다행히 약조를 물 말아 먹을 생각은 아닌지 희사는 산영을 내려두고 저고리를 여몄다.
세숫물을 떠온 종을 대신해서 산영을 씻기고 비단 신을 신겨줄 때만 하더라도 설마하니 밧줄을 안 풀까 했다. 어제 일은 실수거니 했건만.
희사는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내어, 대뜸 손목으로 옮겨 묶었다. 그와 저 사이에 긴 밧줄이 이어진 꼬락서니다. 산영은 눈짓으로 이게 무어냐 물었지만 희사는 아무 말 없이 산영을 안아 들었다.
비단 신은 신을 필요가 없었다. 산영은 파리한 낯으로 그에게 안겨 바깥 구경을 나섰다. 문밖을 나서도 가슴이 콩닥거리지 않았다. 머리로 부닥치는 바람이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무더위에 부는 허접한 바람 같았다. 손목을 조이는 밧줄의 감각도 개운치 않았다. 희사는 꽃동산 먼저 갈까, 아니면 냇가 먼저 갈까 묻는다. 산영은 정신 나간 낭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사 님.”
“응.”
“내려주시지요.”
처마에 달아둔 사각 등이 머리통 가까이 있다. 희사의 품에 안겨 높은 세상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쏘다니며 거닐어보고 싶었다. 하나 희사는 산영의 말을 맛나게 잡수셨다. 돌려주지 않고 고개를 삐딱하게 꺾는다.
“냇가로 가는 게 낫겠지.”
또 동네 개 짖는 소리만 못 하게 여긴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산영은 왼쪽 손목을 빙 두른 밧줄, 고지식하게 얼싸안은 사내의 두 팔을 보았다. 저를 묶으려 드는 것들 천지다. 저의 무어가 그리 못 미더워서 이럴까.
석 달도 안 된 낭군이 질린다는 말을 해본 적도 없음이다. 한데도 불면 날아갈까, 눈 떼면 사라질까. 정인의 콩깍지가 아니라 그보다 음험한 무엇이 그를 부추기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냇가로 간다고 해도 무슨 재미가 있나. 그의 품에 안겨 물소리만 듣다가 돌아오는 것에 무슨 낙이 있나.
“나왔는데도 기분이 저조하니. 나의 부인은 따로 가고픈 데가 있으신 모양인데.”
“희사 님.”
산영은 희사의 눈길을 맞받아치며 말했다.
“제 말은 묵살하시면서, 제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십니까?”
“내가 무엇을 묵살하였지? 나가고프다 하여 나왔어. 서러이 울어대서 내 고통은 전하지 않았어. 아직도 모자라?”
“모자라지 않습니다. 과할 뿐이지요.”
나아가던 희사의 걸음이 막혔다. 그는 상대를 가늠하는 얼굴로 요모조모 훑어내렸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줄까. 어떻게 하면 골 난 표정 안 지을래.”
“보아하니 희사 님은 하나도 안 똑똑한 것을요. 아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손목이 묶여 불퉁하고, 내려주지 않아서 답답하다고요.”
“내게 닿기 싫어?”
“희사 님은 고게 문제지요. 제가 하지도 않은 말을 멋대로 오해하시곤 사실로 믿어버리고요.”
기가 하도 막혀서 막힌 둥 만 둥 했다. 살이 송두리째 파내어진 건 저인데 상처받고 일그러지는 건 그였다. 희사는 목으로 침을 삼키더니 저를 버리듯 땅으로 내려주었다.
신이 흙더미에 올라타자마자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따라가지 않으려고 해도 밧줄 탓에 끌려간다. 연정을 강아지에게 메주 멍석 맡겼나. 무에 저리 불안해 어찌할 바를 모를까.
꽃구경은커녕 콧바람도 못 쐴 찰나였다. 호랑이 울음이 등줄기를 뜯듯이 긁었다. 산영의 발이 나아가는 시늉만 했다. 코언저리에서 탄내가 났다. 신령의 감이, 옥룡산에 잇대어진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신력을 나누어 준 호랭이에게 일이 생겼다.
산영의 발은 나아가는 시늉도 버거워졌다. 천애 고아처럼 버려진 옥룡산. 그 옥룡산이 어미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