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88
87화
산영은 온몸 땀구멍에 냉기가 차는 기분이었다. 산영은 정적인 자세로 서서 망연자실했다. 뒤돌아본 희사가 물린 한숨을 불러왔다. 기이하게도 그 한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우렛소리처럼 자신을 질책하는 한숨이었다.
원통한 마음이 들기 전에 배알이 꼬였다. 저 치 때문에 옥룡산에 못 가본 것이다.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는데 말도 못 하는 네 처지를 봐. 고자질하는 속내가 열성을 다해 흉보고 있었다.
여태껏 마주치기 꺼리던 미움이 보지 못하는 데서 몸집을 부풀렸나 보다. 암것도 모르는 희사는 산영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당기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어도 이러네.”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머릿속은 옥룡산 생각뿐이었다. 냇가고 꽃동산이고 뒤로 밀려난 지 한참이다. 들어갈까 묻는 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곤 타닥타닥 걸음을 뗐다.
난만히 핀 봄을 닮은 노오란 꽃봉오리가 길에 깔렸다. 안색이 나빠진 산영에게서 그는 눈을 떼지 못했다. 염려, 불안, 투기 허튼 것은 죄 모인 그의 시선이 뾰족했다. 산영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름 핥는 눈길이 떠나가지 않고 고인다. 산영은 무시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바깥 구경을 체념한 산영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도 마음이 걷어차인 덕분에 웬만한 건 놀라지 않았다. 굳은살 배긴 마음이 예상한 일 아니었냐며 산영을 채찍질했다. 산영도 그 말에 동의하는 참이다. 희사의 눈치를 보느라 그놈의 후임도 똑바로 정해두지 않고 옥룡산 소식은 입 밖에 꺼내보지도 못했다. 요사이 한층 심하게 구는데 너를 보내줄 성싶어. 고 말에도 속으로 끄덕끄덕했다.
물렁물렁해진 몸을 침상에 누이고 헛기침을 시작했다. 산영의 비단 신을 벗겨주던 희사의 낯이 달라질 수밖에.
“고뿔이 들었나.”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달려와 이마를 쓸어주는 손은 다급했다. 그 큼지막한 손으로 산영의 얼굴을 누비듯 돌아다녔다. 열 기운보다 활기 없는 목소리에 고뿔을 확신한 모양이었다.
희사는 대번 산영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양심은 남아 있어 골골대는 사람에게까지 그러기는 저쪽도 싫은 눈치다. 그러게 진즉에 그럴 것이지. 산영은 기대 없는 눈길로 희사를 올려다보았다. 고고하게 내리깐 그의 시선이 냉랭해졌다. 무어가 또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러시나. 비틀어진 입술이 산영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누가 보면 낭군이 아니라 남을 보는 줄 알겠어.”
하나 아픈 사람을 추궁하기에는 상황도 마음도 좋지 않을 테다. 고작 그 말을 서리하게 던지고 사람을 부르려는지, 약을 부르려는지 문 쪽으로 걸어나간다. 한데 산영의 눈에는 그것이 도망치는 작태로 보였다. 제 눈을 들여다보다가, 실없이 실망하며 아파하다가, 황황히 뒤돌아서 나가는 것이다. 면경이 있다면 제 눈이 어떤지 알고팠다.
마침 희사가 없는 이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산영은 바로 누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깨부터 배까지 힘을 나누어주니 선명한 앞이 흐릿해지고 탄내가 불거졌다. 마른기침이 나오는 냄새에 산영의 마음은 불길한 물가로 뛰어들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며 시야를 헤매다가 어렵사리 호랭이의 눈을 빌릴 수 있었다.
먼젓번 그 나무꾼 짓이 틀림없었다. 눈을 부릅뜨는데 호랭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 앞에 창을 든 사내 여럿이 호랭이를 겨누고 있었다. 호랭이의 맹랑한 울음소리에도 뒷걸음질만 칠뿐 서슴없이 나무를 베고 불을 지른다. 나무꾼의 소행이 아니란 말인가. 하면 저들은 대체 누구지.
‘어떻게 좀 혀봐!’
‘호랑이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겨!’
창을 든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산영은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흐트러진 정신을 모았다. 호랭이의 경고가 그치지 않자 사내들은 허둥대며 불 지르는 데에 정성을 쏟았다. 이러다가 사내 대여섯이 달려들어 호랭이에게 덤비면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겁먹은 산영은 호랭이에게 어떻게든 위험을 전하려고 애썼다.
“도망가. 도망가렴.”
호랭이의 주위에 그물을 두르고 차차 거리를 좁혀온다. 지금이라면 한 명을 뒤로 자빠뜨리고 도망칠 수 있겠다. 산영이 눈물을 지으며 외쳐대는 차에 용맹한 호랭이가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본다. 누가 보아도 저를 기다리는 몸짓에 산영의 눈물은 강을 이루었다.
집 떠난 저를 기다리며 외롭게 옥룡산을 지켰을 호랭이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했을꼬. 가슴을 쥐어뜯어 버려버리고 싶다. 산영은 고개를 쳐들고 희사가 나간 문간을 바라봤다. 다 저분 때문이다. 저분 때문이야.
못난 마음이 책임을 한쪽에 돌리려 애썼으나 양심은 반대편에서 팔짱 끼고 산영을 질책했다. 하면 마음이 편한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무심히 손 놓고 있던 건 너도 마찬가지라. 원망이 한 덩어리로 뭉친 가슴께를 누르며 산영은 정신을 챙겼다.
급히 침상에서 뛰어 내려가 면경 앞에 둔 자개함까지 갔다.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내 박아둔 고아한 자개함 안은 노리개나 연옥 가락지 따위가 아니라 큰 형님이 주신 종이새 차지였다.
만에 하나 쓰일 곳이 있을까 싶어 감쳐두었더랬다. 산영은 종이새를 꺼내어 가슴골 안에 숨겨두었다. 문간을 열댓 번 확인한 산영은 날렵히 창가로 달려가 걸쇠를 풀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며 탁한 분위기를 트여준다.
산영은 바람에 종이새를 날려 보냈다. 위태위태하게 휘청거리며 종이새는 날아갔다. 갖은 기대를 거기에 실어 보낸 산영은 종이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이 벌어졌는데도 낭군이 아니라 저 종이새에 의지하는 제 처지가 우스웠다.
산영은 희사의 모진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해서 보내달라는 거야? 사람을 보내면 되지, 라고 하며 앞길을 철저하게 막아둘 터였다. 그는 비상한 말씨로 저를 굴복시켜 밧줄로 꽁꽁 묶어둘 터다.
타당한 상상을 마친 산영은 날아가는 종이새에게 기도하고픈 심정이었다. 한데 멀쩡히 날아가던 새가 갑자기 고꾸라진다. 희사의 개입인가 싶어서 간이 쫄딱 쪼그라든 찰나. 종이새를 잡는 하얀 손은 지아비 형님의 것이었다.
그는 종이새를 잡자마자 하늘로 비상하더니, 날쌘 바람 위를 걸으며 산영의 코앞으로 내려왔다. 옥에 갇힌 죄인처럼 고개 내민 산영의 손에 종이새를 돌려주려 했다.
“나보고 가보라고 하던데.”
입 내밀며 툴툴거리는 저 만사가 귀찮은 태도를 보니 작은 형님이었다. 덤덤한 산영의 얼굴을 보고는 설명이 필요한 것을 아는지 작은 형님은 골을 냈다.
“갑자기 희사가 쳐들어왔단 말이야. 해서 나를 대신 보냈다고.”
어디를 갔나 했더니 그쪽으로 넘어가 제 쌓인 화를 푸는 모양이다. 아픈 사람이니 어디 가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한 눈치다. 산영은 훌쩍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비약적으로 우울해진 산영의 분위기에 작은 형님은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내가 무어라 했다고 울어 울기는.”
“작은 형님은 도와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그나마 그 큰 형님이란 사람의 마음이 넓고 깊었다. 이 작은 형님은 산영의 허리가 동강 부러져도 조심 좀 하지 그랬냐며 혀를 찰 사람이었다.
산영은 기대가 사라진 눈빛으로 저 먼 산을 바라봤다. 옥룡산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가지 못하는 제 처지가 죄수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아프다더니.”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나 봅니다.”
“걔는 뭐 너를 조롱에 가두어두는 새처럼 가두어두는지.”
시무룩한 산영이 안쓰러운지 안 해도 될 말까지 겨우 붙여놓는다. 산영은 자조하며 쓸쓸한 어조로 답했다.
“혈상약의 통증이 저 때문이라니 어쩔까요. 못 오를 나무를 탐한 저의 죄이지요.”
혀를 쯧쯧 찬 작은 형님은 갈 데 없는 것처럼 발을 굴리다가, 위로랍시고 산영의 머리통을 살짝 밀었다.
“그거 순 지가 지 꾀에 넘어간 거지. 그게 왜 네 탓이야.”
“다 저를 갖고자 감당하시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그니까 지가 뭐 관심 없다는 둥 그런 맹세는 뭣하러 했는지.”
옥룡산 걱정에 작은 형님의 말을 건성건성 흘려듣던 산영은 멈칫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분명 저같이 낮은 신령을 아내로 들이기 위해 혈상약의 통증을 참는 것이라 여겼는데.
“맹세는 저 때문에 하신 거 아닙니까?”
“그게 뭐 꼭 그런 것도 아니고 지 성질에 못 이겨…….”
“해서 제가 없으면 더 아프시지 않습니까.”
“어이?”
당황한 작은 형님의 눈과 자그마한 의심을 품은 산영의 눈이 맞닥뜨렸다. 한쪽은 뒤통수를 맞은 터라 속 보이게 감정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산영은 그의 허술한 표정에서 많은 것을 건졌다. 이 조롱에 갇힌 신령이 무어라 떠드는 것인가. 혹 파둔 덫에 잘못 걸린 것인가. 되돌릴 수 없는 말실수를 한 것인가. 죄책감으로 다져진 마음의 땅이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의심의 덩굴이 파고든다.
산영은 뒷걸음질 치는 작은 형님의 옷고름을 잡아챘다.
“잠시.”
도망 못 가게 막는 그 작은 손이 어찌나 야무진지. 산신령의 손길에 천제의 아들내미가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묻고픈 게 있습니다.”
작은 형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저승사자 저리 가라였다. 산신령의 눈은 제맛이 아니었다. 맛이 가서 쉬어빠진 눈동자가 작은 형님을 추궁하려 들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했던가. 부부 싸움에 아주버니 등골 빠지기라는 말도 나올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