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One Target RAW novel - Chapter 25
준희는 맨 어깨에 닿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는지 동굴 속도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어있는 옆자리를 확인하고 눈길을 돌려 모닥불이 피어있던 자리를 보았다. 희미한 연기만이 피어오르는 잿더미를 바라보니 불이 꺼진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듯 보였다.
준희는 침낭 위쪽에 단정히 개어져 있는 자신의 옷을 챙겨 입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굴 밖으로 나간 것인지 그의 흔적이 없었다. 자신의 배낭 옆에 놓여있는 그의 배낭만이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포를 깨끗하게 개고 침낭을 둘둘 말아 침낭에 달린 끈으로 바싹 조였다. 그리고 작게 접은 모포는 자신의 배낭에 넣고 둘둘 말은 침낭은 강욱의 배낭에 얹었다.
여전히 힘 있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너머를 바라보니 이제 곧 날이 밝을 듯 어스름한 어둠이 가시고 있었다. 아마도 얼마 후면 해가 뜰 것이다. 그녀는 동굴 끝 폭포 쪽으로 다가가 동굴 속에 흐르는 작은 내에 손을 담그고 얼굴을 씻었다. 상쾌했다. 현재 자신의 기분만큼이나 상쾌했다.
순간 준희는 뒤쪽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깼어?”
강욱이었다.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그의 손에는 손질된 물고기 두 마리가 들려있었다. 저 물고기를 구하러 다시 바위절벽을 내려갔다 온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준희는 그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힘들게 왜 그랬냐고도 묻지 않았다. 돌아올 답을 아니까. 아무렇지 않게 ‘괜찮아.’라고 말할 그를 아니까.
“낚시라도 한 거야?”
“훗. 그래. 낚시 했다.”
“고기 많아?”
“그래.”
현 상황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대화였다. 무장군인들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시간 안에 해안에 도착해야 하고 또 배를 무사히 타야했다. 이런 긴장 속에 그들의 대화는 낚시에 관한 시시껄렁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준희의 얼굴에도 강욱의 얼굴에도 조금의 그늘도 없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렇게 편안한 대화를 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5년만에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느라 이런 대화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지금의 이 평화를 오래 끌고 싶었다.
준희는 강욱이 다시 불을 피우는 것을 보며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구워 먹으려고?”
“음.”
“비늘 벗겨야 하는 거 아냐?”
“대충 했어.”
“머리도 떼고 내장도 빼야지. 소금은 있어? 생선 싱거우면 난 못 먹는데.”
강욱은 쉼 없이 재잘거리는 준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야 나의 준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은 눈빛이었다.
“내장은 뺐어. 소금도 있고. 머리는 그냥 구워도 돼. 됐지?”
“……응.”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강욱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 피우던 불을 마저 피웠다. 구해 온 가지에 생선을 꽂아 불 위에 가져다대니 그럭저럭 익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생선 꽂은 가지에 불이 옮겨 붙을까 전전긍긍하며 생선을 굽는 강욱을 보던 준희가 ‘푸훗’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 생선 처음 구워보지? 다 타잖아.”
강욱은 옆에서 잔소리를 하는 준희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겉은 이래도 속은 먹을 만할 거야.”
준희는 새까맣게 탄 생선의 껍질을 벗겨주는 강욱의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상한 그의 손길에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심장 가득 뿌듯하고 꽉 찬 무언가가 온 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내 남자……나만을 바라보는 남자……나의 행복만을 바라는 남자. 준희는 순간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놀란 그가 생선을 만지던 손으로 그녀를 마주 안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어색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알았지만 준희는 그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잘 할게. 다시는 네가 날 떠나지 않도록 잘 할게. 쓸데없는 감정을 흘리고 다니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테고 너만 바랄게. 그러니……그러니 다시는 날 떠나지마……
지금은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지만 준희는 그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 바라며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만큼 자신도 마주 바라보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준희는 뒤에서 자신을 밀어주는 그의 힘의 반동으로 힘껏 몸을 들어올렸다. 드디어 바위 산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녀는 주위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재빨리 둘러보았다. 그러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의 광경에 놀란 입을 벌렸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평원의 끝에 아스라이 걸려있는 구름집단과 그 주위를 흐르고 있는 안개가 평원을 더욱 신비스럽게 비춰주고 있었다. 준희는 자신의 옆으로 강욱이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저 멀리 평원의 끝에 보이는 산과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뜨고 있었다. 그 화려하고 눈부신 광경에 강욱과 준희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그 위엄에 알맞게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의 맨 꼭대기에 올라있는 것 같았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푸른 하늘과 서늘한 주변의 공기를 감싸고 있는 희미한 안개……마치 신들의 영역인 것 같았다. 가끔씩 흩뿌리는 옅은 이슬방울은 차가움보다는 맑은 공기에 청아함까지 더해주고 있었다. 이보다 아름다운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이보다 더한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그와 함께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준희는 자신의 눈앞으로 불쑥 나오는 그의 손을 보았다. 그러다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함께 가자고,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 대지를 밝히듯 우리도 새로운 세상을 함께 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영원히……
준희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힘주어 붙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희미한 안개를 뚫고 광활한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둘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서 강욱과 준희는 몸을 바싹 엎드린 채 해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가 몇 채 떠있었지만 수상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탈 배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강욱은 반드시 지정한 시간 내에 배가 들어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임성환은 믿을 수 있는 아군이었다.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용병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동료로서, 같은 일에 목숨을 걸고 서로를 의지하는 아군으로서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능력 있는 특수 대원으로서도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강욱은 자신의 옆에 엎드려있는 준희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집으로 갈 것이다. 무사히 배만 타게 된다면 탈출에 거의 성공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곧장 남인도를 향할 것이고 남인도에 무사히 도착하면 거기서부터는 안전했다. 곧장 공항으로 가 비행기만 타면 한국으로 가게 된다. 그녀가 무사히 비행기를 타면 자신은 미 해군 네이비씰로 돌아가 나머지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뒤따라 갈 것이다. 그녀가 기다리는 집으로.
강욱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무사히 배를 탈 때까지, 무사히 남인도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준희의 안전이 걸린 문제였으므로.
약 30여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해안의 왼쪽 끝 귀퉁이를 돌아 빠른 속도로 해안가로 다가오는 쾌속정 한 척이 보였다. 강욱과 준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기다리던 배였다. 저 배 안에 분명 임성환과 나머지 용병들이 있을 것이다. 강욱과 준희는 확신했다.
쾌속정이 부둣가에 무사히 정박하고 갑판위에 몇 명의 남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관광객으로 가장한 듯 흰색 셔츠와 밀짚모자를 쓰고 음악을 틀어놓은 채였다. 건들거리며 하릴 없이 갑판 위를 거니는 폼이 분명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강욱은 그 중의 한명을 정확히 알아보았다. 불룩한 바지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놓은 채 부두를 살피는 그의 뒷모습이 상당히 눈에 익었다. 성환이었다. 성환이 또다른 용병 남병진으로 보이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무어라 지시를 내리자 남자가 배에서 내려 해안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강욱은 갑판 위의 성환을 확신하고 고개를 돌려 준희를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볼 테니 내가 신호할 때까지 넌 여기 있어.”
준희는 그의 단호한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지시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 먼저 가서 상황을 살펴야 했다. 그녀가 가는 것을 두고 볼 강욱이 아니니 당연히 그녀가 남아야 할 것이다.
“알았어……내 저격총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강욱은 그녀의 중얼거림에 자신의 배낭을 벗어 땅에 내려놓았다.
“MSG-90이었나?”
준희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간 변형된 소총인데 네가 쓰던 것과 많이 틀린 지 한번 봐.”
그리고는 배낭에서 분해된 소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순식간에 소총을 조립한 후 그녀에게 내밀었다. 준희는 소총을 받아들고 엎드린 채 소총에 달린 스코프에 눈을 가져갔다. 자신이 사용하던 MSG-90과는 약간 조종방식이 틀렸지만 사용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이걸로 거리를 조정하고 여기가 안전장치야. 탄환은 매그넘탄이고 여기를 이렇게 빼면 탄창이 빠진다. 할 수 있겠어?”
준희는 그의 설명을 듣고 소총을 다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많이 틀리지 않았다. 거리조절 장치만 조심하면 다른 장치들은 모두 MSG-90과 거의 비슷했다.
“할 수 있어.”
“그래. 내가 신호할 때까지 절대 나서면 안 돼. 알았어? 그리고 만약…만약 돌발 상황이 생겨 일이 커지면……”
“됐어! 일이 생겨도 나 혼자 도망가는 일은 없어.”
죽더라도 너와 함께야.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강욱은 굳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강욱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짐했다. 그리고 재빨리 준희의 입술에 강렬한 키스를 했다.
“내 신호를 기다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준희는 그런 강욱을 바라보다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저격소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몸을 긴장시키며 스코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순간까지, 아니 남인도에 도착해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준희는 스코프를 통해 강욱이 부두에 정박된 배에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변을 살피며 최대한 몸을 숨겨줄 수 있는 건물과 다른 고깃배 사이를 재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윽고 대기하고 있는 쾌속정 근처로 다가간 강욱이 배 근처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던 남병진에게 접근했다. 스코프를 통해 그들을 살피니 주변을 살피기 위해 배에서 내렸던 남자는 남병진이 확실했다. 강욱을 알아 본 남병진은 급한 걸음으로 쾌속정을 향해 움직였다. 준희는 총구를 움직여 콘테이너 박스 뒤에 최대한 몸을 숨기고 있는 강욱을 확인 한 후 다시 방향을 틀어 쾌속정 갑판 위를 살펴보았다. 남병진의 보고를 받는 임성환과 김영태가 보였다.보고를 받은 임성환이 남병진과 김영태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고 김영태만을 남겨두고 임성환과 남병진이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강욱이 있는 콘테이너 박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준희는 그런 그들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는 위험한 움직임은 없었다. 남병진이 배 주변을 다시 확인하는 동안 임성환과 강욱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고 순간 임성환의 눈길이 그녀가 있는 언덕 위를 향했다. 준희는 스코프를 통해 확실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고 그도 미소를 짓고 있는 듯 했다.
준희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그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려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준희는 무언가 부두를 향해 움직이는 이상한 무리들을 확인하고 올리려던 손을 내리고 바싹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다시 스코프에 눈을 대고 그 무리들이 있는 방향으로 총구를 돌렸다.
제기랄. 군인들! 군인들이었다.
준희는 다시 강욱이 있는 곳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강욱은 임성환과 무슨 작전을 짜는 듯 준희가 있는 곳을 보지 않고 있었다. 준희는 강욱의 바로 옆에 있는 젖은 목재들이 쌓여있는 위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소총의 총알이 발사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정확히 그녀가 조준한 목재더미에 총알이 박혔다. 그러자 강욱과 성환이 곧바로 몸을 숙이고 권총을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총알이 날아온 방향이 준희가 있는 언덕임을 알고 그들이 내뱉는 욕설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준희는 그들이 그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자 곧바로 손을 올려 무장군인들이 나타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들도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군인들을 확인한 강욱이 다시 그녀를 쳐다보자 준희는 다시 손을 올려 손가락을 하나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강욱은 그녀의 손가락이 차례로 펴지는 것을 지켜보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준희는 다시 총구를 돌려 군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곧장 쾌속정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쫒기는 듯 뒤를 돌아보며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지만 준희는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미 남병진과 김영태마저 군인들을 확인하고 긴장한 채 총을 꺼내들고 있었다.
전운이 감돌았다. 군인들의 목표는 분명 준희 일행이 탈 쾌속정이었다. 그들이 준희 일행을 잡기 위해 온 것인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들의 목표는 쾌속정이었다. 준희는 급히 총구를 돌려 강욱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콘테이너 박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강욱과 성환이 보였고 배로 돌아간 남병진과 김영태가 쾌속정을 지키고 있었다.
배로 다가간 5명의 무장군인의 3명은 배 주위를 경계하고 2명이 배로 가까이 다가가 갑판 위에 있는 김영태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순간 김영태와 군인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군인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들어 김영태를 겨누었다. 그러자 김영태가 두 손을 들며 군인들을 향해 무어라 말을 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그가 그에게 겨누어진 소총의 끝을 발로 차 총구를 돌려버렸다.
그것을 신호로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준희는 김영태에게 총을 겨누었던 군인을 정확이 저격했고 갑판 아래 숨어있던 남병진이 배로 다가왔던 또 다른 군인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머지 배 주변을 살피던 세명의 군인들은 자신들의 뒤에서 총격을 가하는 강욱과 성환에 의해 쓰러지고 또 남병진과 김영태의 총에도 쓰러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 1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부두는 총격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부두에 얼마 없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었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할 테고 군인이든 경찰이든 몰려올 것이다.
준희는 재빨리 자신의 배낭을 짊어지고 강욱을 쳐다보았다. 강욱이 그녀를 향해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직접 그녀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준희는 소총을 거둬들여 어깨에 메고 재빨리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빨리 배를 타야했다. 다른 군인들이 나타나기 전에 어서 배를 타고 섬을 벗어나야 했다.
준희는 언덕을 내려와 부두를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 앞에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강욱을 보며 더욱 속력을 내고 있었다. 강욱의 뒤로 성환이 뒤따르고 있었고 남병진과 김영태가 배를 출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집으로 가는 것이다. 이제 강욱과 함께 이모와 할머니가 있는 집으로 갈 것이다. 얼마나 좋아하실지……얼마나 기뻐하실지……이모와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탕!
!!
아!
아……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하늘이 빙글 돌고 세상이 돌고 있었다. 허리 어딘가에 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의 무릎이 꺾이고 땅이 치솟고 있었다. 준희의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차가웠다. 바닥에 누군가 흘린 물로 차가웠다. 준희는 자신의 정면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욱이 보였다. 그가……그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뭐라고? 뭐라고 하는 거야? 안 들려. 안 들려. 강욱아.
그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성환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녀를 쏜 다른 군인을 향해 쏘는 것이리라……
준희는 다시 강욱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왜……그가 하얀색 해군 정복을 입고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색 정복을 입은 그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가슴에는 각종 훈장을 달고 맑고 밝게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햇빛도 눈부시고 더워 죽겠는데 넌 뭐가 그렇게 좋아? 바보……멍청이. 그러게, 그러게 검사가 되라고 했잖아……나 같은 거 따라 해군이 되지 말고 검사가 되라고 했잖아. 그랬으면, 그랬으면 그렇게 힘들지 않아도 됐는데……아무도 없는 미국 같은데 안가도 됐는데……내가 없어도 조금만 슬퍼하면 되는데……다른 세상도 좀 보지. 나 말고 다른 세상도 좀 보지. 내가 있는 세상만 바라보더니 이제 어쩔거야? 내 말 안 듣더니 이제 어쩔거야!……나 죽으면 너 슬퍼서 어떡해? 나 없어지면 너 괴로워서 어떡해? 어떡할 거야? 이 바보야!
거친 호흡을 내쉬며 그가 다가와 떨리는 손길로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허리 쪽을 향했다. 그리고 급히 자신의 배낭을 내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녀의 허리를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그가 무어라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들리지가 않았다.
살고 싶어……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이제 겨우 널 만났는데…이별 같은 거 이제 싫어. 지긋 지긋해. 이별 따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무섭단 말이야. 이젠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이젠, 이젠 웃고 싶어……이젠 매일매일 웃으며 살고 싶다고! 얼음여왕이니 그딴 별명 가지고 싶지 않아. 싫단 말이야!
……젠장. 햇빛은 왜 이렇게 눈부신 거야…
힘이 없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마저 힘이 들었다. 점점 세상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얼굴이 줄어들고 있었다.
“안 돼! 서준희. 눈을 떠! 눈 감으면 안 돼! 내 말 들려?”
그의 고함소리와 그녀를 흔드는 그의 손길에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에게 중얼거렸다.
“아……파…아파……”
강욱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알아. 알아. 조금만 참아. 준희야. 서준희? 눈 감으면 안 돼. 제발! 제발 눈 뜨고 있어. 눈 감으면 안 돼. 알았지? 조금만 더.”
그가 자신에게 소리를 쳤다가 다시 중얼거리고 또 다시 애원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 눈 안 감을게.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내가 그랬잖아. 이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한다고……
얼마 후 그가 자신을 조심히 내려놓는 것을 느꼈다. 그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등 뒤로 푹신한 이불이 느껴지고 곧바로 그가 그녀를 안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귓가에 느껴지고 그의 손길이 얼굴에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배가 출발했어. 가장 가까운 곳에 배를 댈 거야. 병원으로 간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그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준희는 눈길을 돌려 강욱의 어깨에 번지는 핏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뭐?”
강욱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대었다.
“하…하아…피가 나……네 어깨에서 피가 나……”
그녀의 속삭임에 강욱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은 깊은 총상으로 사지를 헤메고 있으면서 그의 어깨에 난 작은 상처를 보고 눈물 흘리는 그녀를 보며 강욱의 눈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입 다물어……”
잇새로 내뱉듯 나직이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거친 물기가 묻어있었다.
“누구 맘대로 총 따위나 맞으라고 했어! 누구 맘대로……”
준희는 자신을 외면하는 그의 숙여진 고개를 보며 그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울어?”
“……”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그의 어깨의 떨림이 슬펐다. 아팠다. 너도 이랬니? 5년 전 날 떠나던 그때에 너도 이처럼 괴롭고 힘들었니? 남겨질 나보다 떠나는 네 가슴이 더한 아픔으로 몸부림 쳤었니? 지금의 나처럼?
준희는 그를 남겨두고 먼저 갈지도 모를 사지의 기로에서 그를 가슴 아프게 쳐다보았다. 널 두고 어떻게 가니? 날 잃고 네가 어떨지 아는데…너무나 분명히 보이는데……
“욱아……”
그녀의 부름에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숙여진 고개는 그대로 굳은 채 간혹 떨리는 그의 어깨만이 그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랑해”
!
강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는 이미 젖어있었다. 그의 젖은 눈을 바라보며 준희는 힘겨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랑해……사랑해 최강욱.”
강욱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못 들었어. 난 지금 네가 말한 거 못 들었어! 다시 해. 지금은 아니야. 그따위 사랑고백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하란 말이다!”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두려웠다. 그녀가 자신을 영원히 떠날까 미치도록 두려웠다. 아아……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이가 이 세상에 없다고 느끼며 살았을 그녀의 그 피 맺힌 깊은 절망을 이제야 뼛속 깊이 알 것 같았다.
하느님. 안 됩니다. 신이시여. 안 됩니다. 제발. 안 됩니다! 들리십니까? 신이든 누구든. 들리십니까? 안 됩니다. 안 됩니다……못 데려갑니다. 제발……제발…
그때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선실 입구로 성환이 나타났다.
“최강욱! 해군이야! 빌어먹을 해군이 왔어! 조금만 참아! 서준희. 너 잘못되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알았어? 대한민국 해군이 왔다고!”
울부짖듯 소리치는 성환의 말에 강욱의 눈길이 급히 선실 창밖으로 향했다. 저 멀리 함정이 보였다. 태극기를 단 대한민국 함정이 보였다. 강욱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성환을 바라보았다.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여!”
“알았어.”
성환이 급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강욱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그녀의 머리가 스르륵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다. 강욱은 천천히 눈길을 내려 그녀를 보았다. 감겨진 눈과 힘없이 꺾인 그녀의 얼굴,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보였다.
“안……돼…안 돼……서준희…넌 못 가. 넌 못 가. 준희야. 날 두고는 못 가……정신 차려. 정신 차리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