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13
111화. 징조
그럼 선우연이 말을 멈췄으니 이제는 이쪽이 화두를 꺼낼 차례겠지.
‘우선 게이트에서 나온 수예휘가 어떻게 됐나 좀 물어볼까?’
기려는 이 협회 직원과 할 말이 꽤 많았는데, 아쉽게도 이후의 대화는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 것이다.
“잠시만요.”
게다가 전화를 받아보니 그것의 내용이 전혀 예상치 못한 주제라.
-예~ 플랜택배입니다. 좀 이따가 배송이 있을 예정인데 지금 집에 계신가요?
“택배? 웬 택배요?”
-패션 앤 옴므라는 곳에서 보냈는데요. 아무튼 김기려 씨 지금 집에 계시냐고요.
“어, 글쎄요. 지금은 아니고 아마 곧 들어갈……?”
-네에, 그럼 현관 앞에 두고 갑니다~
“자, 잠깐……. 예?”
이내 끊기는 통화.
그는 택배기사의 말에 당황하다 급히 귀가할 준비를 했다.
뭔지는 몰라도, 택배를 문 바깥에 놓아둔다는 건 알파우리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기에.
‘남이 주워가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그런 짓을 하는 거야?’
기려는 꺼냈던 비수를 회수하며 말했다.
“아니, 주문한 게 없는데 대체 뭐가 왔단 거야. 선우연 씨, 죄송하지만 전 바로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선우연은 별 생각 없이 그를 보내줬다.
택배가 와서 받으러 가야 한다니. 이건 상대방이 외계의 영혼임에도 정말 평범한 이유니까.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김기려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갔다.
“흠.”
그런데, 이렇게 뒷모습으로 보니 좀 더 확실해지네.
선우연은 멀어져가는 4번째 S급을 눈으로 가만히 좇았는데, 그 남자가 걸치고 있는 웃옷은 자신이 얼추 아는 디자인이었다.
‘역시 저거 그 브랜드네.’
M으로 시작하는 프랑스제 패션 브랜드.
물론 그곳의 겉옷은 자신 같은 소시민이 사기에는 다소 가격대가 부담스러웠지.
기려가 걸치고 있던 저 울 코트 한 벌의 정가가 족히 직장인 두 달 월급과 맞먹었으니.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선우연은 항상 후줄근히 다니던 사람이 어쩌다 갑자기 저런 비싼 걸 둘렀는지에 대해 잠시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상대방 또한 자신의 옷값에 얽힌 비밀을 곧 알게 되는데…….
잠시 뒤.
집에 도착한 김기려.
[보낸 분 : 패션 앤 옴므 압구정점 서 요한]그는 상자 위에 적혀있는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하고 놀랐다.
이 의문의 택배들은 다름 아닌 에스더의 형제가 발송한 우편이었으니까.
‘죄다 정장들이야.’
부스럭부스럭.
의복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 안.
바르게 접힌 옷 다발 위에는 작은 카드로 이런 손편지가 남아있었다.
[선물이에요. 겨울 동안 잘 입어요. *^-^* -에스더]아무래도 그 친절한 저주술사가 외계의 이웃이 얼어 죽을까 봐 친히 걱정해준 모양인데.
“오호라.”
이래서 내 주소를 물었구만.
김기려는 뒤늦게 과거의 일을 이해하고 뒤적뒤적 옷 포장을 뜯었다.
공짜로 준다는데 사양할 게 뭐 있겠는가.
어차피 시체의 뇌가 주는 정보에 따르면, 지구에서 옷이라는 건 약 1~2만 원 정도의 가치라 딱히 부담 가질 필요도…….
[₩1,900,000]잠깐. 여기에 웬 가전제품 가격 같은 게 쓰여있는데.
“…?”
기려는 새 옷에 붙어있는 꼬리표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가격 확인을 위해 제품명을 인터넷에 검색해본 결과. 정말 이 조끼 하나가 그 정도의 가치였어서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어?”
그는 비로소 진실을 깨달았다.
에스더의 오빠가 운영하는 매장은 사실 명품 및 하이엔드 브랜드의 의류만 다루는 고급 셀렉트숍이었으며.
자신이 생각 없이 입고 다녔던 정장이 자그마치 기백만 원에 이르는 제품이었다는 것을.
“옷이 내 장기보다 비싸네?”
그는 한국마탑의 길드장이 베푼 호의의 크기를 파악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솔직히 이 정도 가격들이면 전부 팔아넘겨 마도구로 바꾸고 싶지만…….
관두자.
그랬다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저주로 죽을 테니까.
***
요즈음, TV는 4번째 S급의 등장으로 연일 시끄럽다.
이렇게 작은 국토면적에서 4명이나 되는 S급이 등장했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라던데.
뭐, S급 비율이야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없지.
그중에는 등급을 날로 먹은 각성치 위조자가 하나 껴있으니.
‘높은 지위가 생기니 기자들의 방문도 뚝 끊겼군.’
이곳은 김기려의 원룸 안.
나는 다시 결계가 있는 안전한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여느 때처럼 휴대폰을 손에 쥐고 검색 삼매경에 빠진 상태다.
날이 갈수록 치솟는 유명세!
네티즌들은 이제 S급이 4명이나 있으니 더욱 세상이 안전해졌다고 좋아들 하고 있었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조금 녹록지가 않다.
‘내가 미쳤냐? F급의 몸뚱어리로 너희를 돕게?’
물론 이렇게 제 마음대로 굴면 여론이 나빠지는 걸 피할 수 없겠다마는.
어차피 미래에 쏟아질 질타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이쪽은 곧 새로운 몸으로 갈아탈 예정이니까.
“어디 보자, 협회장이 슬슬 입금을 했으려나?”
나는 인터넷 뱅킹을 열어 통장을 확인했다.
물론 현금 30억이라는 큰돈은 바로 준비하기 어려운지 아직 잔액에 변화는 없었다마는.
‘여전히 1억밖에 없네.’
그런데 잠깐.
사라진 이무기를 대비하느라 돈을 다 썼던 사람이 1억은 어떻게 들고 있느냐고?
일단 에스더가 준 정장에 손댄 건 아니다.
나는 그 섬유들이 아니라, 보다 튼튼한 중고물품을 판매했으니까.
“에휴, 하여간 기사의 맹약이란 게 그렇게 비싼 물건일 줄은 몰랐어…….”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나는 테러 현장에서 사용했던 [헤르메스의 신발]을 마켓에 되팔았다.
협회장에게 쓸 계약서가 자그마치 2억 원에 가까워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뭐, 이 몸은 체력이 안 좋아서 아이템 효과를 오래 받을 수도 없었으니.
안 어울리는 마도구는 빨리빨리 처분해야지.
‘고작 며칠 신은 것뿐인데 중고가가 자그마치 천만 원이나 깎였지만…….’
그리고 이제는 장비 따위에 매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쪽은 계약서에 적힌 대로 2주 안에 30억을 받게 될 것이며, 새로운 폐를 구하면 육체를 옮기는 마법을 쓸 수 있기에.
‘폐만 고치면 이 거지 같은 몸과는 안녕이다!’
나는 슬슬 갈아탈 육체의 선정에 나섰다.
매장한 지 얼마 안 된 각성자의 시신을 노리거나. 아니면 던전 브레이크 때 죽을 사람이 나오길 바라거나.
여튼 수단이야 많잖아.
그리고 며칠 뒤.
【싱싱한 한국 사과】
“…….”
약속대로 협회장은 요구한 30억을 보내주었는데…….
자금 추적이니 뭐니 하는 문제로 상대가 현찰을 보내줬다는 건 뭐 그렇다 치자.
이 많은 돈이 웬 사과 포장용 상자에 담겨있었단 것도 일단 넘어가고.
나는 휴대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색어 : 용의 폐] [검색결과 : 0건]톡, 톡, 톡.
새로고침을 눌러봐도 화면 속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내가 겪는 문제를 알아챌 수 있겠지.
“매물이…….”
매물이 없어.
가장 중요한 [용의 폐]의 판매자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 것이다.
“제기랄!”
나는 텅 빈 화면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분명 용의 폐를 사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까지만 해도 거래소에 매물이 있었어.
딱 하나뿐이었지만, 용의 폐는 구하는 사람이 적어서 장장 몇 달 동안이나 리스트에 남아 있었다고!
그런데 인제 와서 그 악성 재고가 팔린 뒤, 새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니?
‘이 망할 자식들아!’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샀던 모 인력거꾼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나는 26억을 훌쩍 넘는 재산을 갖췄음에도 정작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아이템이 시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뭔가 일이 내 생각이랑 다르게 돌아가는데……?”
그런데.
새로이 돌아온 이번 주 월요일.
드디어 한국의 헌터 마켓에도 놀랄만한 물건이 나타났다.
< 긴급 재난 문자
[[한국 헌터 협회] 오늘(28) 서초구 헌터몰 앞 도로 미확인 괴물체 발생. 분석 조사 진행 중이며 마켓을 오는 30일까지 일시 폐쇄합니다.]참고로 그 물건의 정체가 용의 폐라고는 안 했다.
“…….”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콧대를 지긋이 주물렀다.
***
28일. 월요일.
아나운서가 굳은 얼굴로 속보를 전했다.
게이트 물품을 취급하는 거래소인 헌터몰의 도로에 정체불명의 물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까만 비석이 길게 솟은 그 모습은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케 합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지.
몽골, 베트남, 스페인, 영국…….
검은 방첨탑은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실로 다양한 국가에 모습을 비췄으니.
이는 전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겪고 있는 현상.
또한 각국에 나타난 비석은 특징도 같았다.
“그곳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86164’이라고 적혀있다고 하네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은 숫자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토론했는데, 현재 가장 확률이 높은 가설은 이것이었지.
“전문가들은 이것이 천문학에서 쓰이는 지구 자전 주기. 즉, 86,164초를 뜻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괴물체는 왜 이곳의 하루를 표시하고 있나. 하루가 지나면 대체 무엇이 일어나길래?
[혹시 터지는 거 아닌가요?ㄷㄷ]이 세계에서 ‘갑자기 나타난 소환물’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얼음궁전 게이트의 묘지 폭발 패턴.
용암 거인 몬스터의 발화석 스킬.
숱한 게이트에서 비슷한 공격법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술들의 파훼법은 공통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소환물을 파괴하면 안전하다’였으니.
협회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내 조치에 나섰다.
“속보입니다. 헌터 협회 측에서 몇몇 각성자를 대상으로 한 동원령을…….”
하지만, 그 의문의 물체는 갖은 초능력을 맞고도 제자리를 우뚝 지키는 터라.
“흐아아아아압!”
“야, 딱 보니 이번에도 틀렸다.”
“저건 대체 뭐로 만들었길래 저렇게 단단한 거야?”
결국 협회는 마지막 확인 절차로 소수의 각성자를 부르게 된다.
[[한국 헌터 협회] (호출) S급 헌터 정하성 님, 확인 후 회신 부탁드립니다.]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그 젊은 술사들을.
***
이야, 하여간 이 행성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개판이다.
아직 이무기로 인한 피해도 채 회복되지 않았는데 벌써 난리니 원.
‘알파우리 출신인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여튼 간에, 지금 내 눈앞은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 단 넷밖에 없는 희귀한 헌터가 돌멩이와 실랑이하고 있기에.
“에이씨, 짜증!”
캉!
에스더는 툴툴거리며 비석을 걷어찼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검은 물체는 흠집조차 없다. 솔직히 S급도 실패했으면 이제 방법이 없다고 본다마는.
“기려 씨도 해볼래요? 아우, 나는 손이 아파서 더는 못하겠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쪽은 현재 검은 비석이 등장한 그 장소에 나온 참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란…….
간단하지.
나는 지금, 진짜 S급으로 보이려고 개수작을 부리는 중이다.
‘매물이 언제 나오려나…….’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용의 폐 구매는 장기전이 될 것 같거든.
하지만 몸을 갈아타는 게 늦어질수록 이 육신의 평판은 땅에 떨어진다.
협회에 미리 엄포를 놓은 대로. 나는 앞으로 발생할 던전 브레이크를 죄다 무시할 거니까.
‘강창호 하는 꼴을 봐. 그렇게 멋대로 굴어도 S급이라 아무도 못 건들잖아.’
시비를 방지하는 데에는 압도적인 위세만 한 게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몬스터도 없고. 위험성도 없고.
심지어는 앞서 온 최상위 헌터들이 비석을 파괴하는 데 줄줄이 실패했으니.
‘이걸 이용하면 나 같은 가짜도 S급이란 생색을 낼 수 있겠어.’
나는 이 안전한 의뢰를 통해 남들과 한 그룹으로 묶일 생각이었다.
비석을 깨는 데 실패한 S급들!
그런 기사라도 나면 힘이 검증된 에스더의 명성에 슬쩍 묻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후후후…. 정말 난 천재라니까.’
다소 비겁한 방법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쨌든 이것도 다 세상의 위험에서 몸을 지키기 위한 선택. 즉, 고슴도치의 가시와 같은 것이니.
“예. 잠깐 옆으로 비켜주세요. 저도 한번 해볼게요.”
나는 허세를 정당화하며 앞으로 나섰다.
숟가락을 얹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