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12
110화. 4번째 S급 (3)
겨우 여기까지 왔군.
‘휴!’
그래.
나는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다.
이 정도 협박거리가 없었으면 애당초 협회를 찾지도 않았거든.
“일단 들어보세요.”
나는 지금까지의 대화를 근거로 하여 그들에게 몇 가지 요구를 전했다.
첫째, 추락한 나의 명예를 책임지고 복구시켜라.
둘째, 나는 앞으로 협회의 명령 일체를 듣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한 페널티도 감수할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온 조건만큼은 그들에게도 희소식이었지.
“그리고 셋째, 나를 S급 헌터 명단에 이름 올릴 것.”
“예……?”
나는 이들의 예상을 엎고 한국의 새로운 S급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요구를 들은 협회장은 아까는 자기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겠다면서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느냐 반문했는데.
여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나는 S급으로 선언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거든.
“내가 말한 건 댁들 지시를 듣기 싫다는 뜻이었지. 상위 등급을 인정하고 말고는 다른 문제예요.”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취할 입장을 선택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이목이 끌려버린 이상. 차라리 절대적 강자로 이름을 날리는 편이 그나마 안전할 테니 말이다.
S급 몬스터도 마무리할 수 있을 만큼 특수한 능력을 지닌 헌터.
그런데 그놈이 밑바닥 폐급 각성자인 게 밝혀지면 앞으로 어떤 위험이 도사리겠나?
‘납치, 강도, 그 외 기타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납치 3절만은 좀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S급 헌터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 진짜로 S급인 걸 인정하겠다고요?”
하지만.
협박으로 상급 각성자의 의무를 파기해봤자 결국 던전 브레이크 때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대중들에게 온갖 욕을 들어먹을 터.
이참에 그들에게서 앞으로 생길 정신적 피해를 미리 보상받아야겠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한국의 4번째 S급의 되어주는 대가로 협회가 30억을 준비해줬으면 하는데…….”
“뭐라고!”
“참고로 자금 출처는 고 회장 당신 사비로요. 나도 괜히 세금 통 건드렸다 욕먹긴 싫거든. 당신은 이곳의 대표니까 그 정도는 책임져요.”
30억.
갖은 음해로 상처를 입은 각성자가 ‘숨통’이라도 트려면 이 정도가 딱 적절할 터.
“S급 헌터의 집 주소와 이름값이 설마 30억도 안 되나?”
나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 한 것이다.
“게이트 처리도 않고, 심지어 던전 브레이크 수습도 나서지 않을 거라면서 이름을 올려주는 데에만 30억?!”
고 회장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길길이 화내기 시작했지만 네가 그렇게 놀라면 안 되지.
나는 헌터 협회가 제대로 신상보호를 해주지 않은 탓에 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거니까.
“회장님,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예요. 다른 나라 사례들 봐봐요. S급 헌터 한 명 영입하려면 이거에 몇 배는 우습게 들어가던데…….”
“그건 자기들 밑에서 일한다는 조건이니 전제가 다르잖습니까!”
이렇게 세간의 이목이 쏠려있으면 돈벌이도 해 먹기 어렵다.
나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폐 값만은 어떻게든 구해둬야 했던 것이다.
“마, 만약 내가 그 돈을 못 준다고 하면?”
하지만 상대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이성을 잃은 것 같으니. 이쯤에서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해주자.
“안 주셔도 상관은 없죠.”
“예?”
“정 못 준다고 하시면 이제 조사한 걸 풀면 그만이니까.”
“…!”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툭.
나는 테이블에 올려놨던 휴대폰을 회수하며 짧게 말했다.
“댁들은 내가 무슨 계열 각성자인지도 모르잖아.”
이보다 살벌한 공갈이 어디 있을까.
게이트가 생긴 이래. 지구의 지식인들은 서로의 머리를 맞대 스킬의 파악에 몰두했다.
그런데 던전 쇼크가 일어난 지 이제야 7년 차인데 벌써 세상의 모든 비밀이 밝혀졌겠나?
“하여튼 참, 내가 염동술에 재능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뇌라도 확 찌그러트리면……. 어느 날 길을 걷는데 뭔가가 뒤에서 차도로 밀기라도 하면 참 어쩌시려고.”
“……!”
“참고로 날 어떻게 해서 침묵하게 만들겠단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다. 이건 진짜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내가 잘못되면 엄청나게 화낼 S급이 또 하나 있어.”
마법은 그들에게 있어서 미지의 영역.
심해생물처럼, 지상의 것들은 상상도 못할 스킬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니.
“콜록!”
협회장은 지금쯤 죽을 맛이겠지.
국민들은 아직도 미필연한 악성 사태라는 미증유의 수난에 관심이 쏠려있는데.
이때 자신들이 감정사의 신고를 무시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후폭풍이 어마어마하리라.
‘어쩌면 책임지고 옷 벗게 될지도?’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맞은편에서는 S급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헌터가 갖은 압박까지.
그야말로 걸려도 제대로 걸린 상황.
“역시 사비로 30억은 좀 부담스럽나? 그럼 조건을 더 걸까요?”
나는 선심을 쓰는 척 덧붙였다.
“우리 약속을 하나 하자고요. 저는 한국의 S급 헌터로 이름 올리면 앞으로 절대 협회를 적대하지 않을게요.”
“뭐?”
“어차피 명령도 무시하는데 서로 터치할 일이 있겠어요? 특히 협회장님에게는 결단코 상해를 입히지 않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F급이라 상해를 입힐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이렇게 겁이라는 겁은 다 줘놓고 나중에 말을 바꾸기라도 하면…….”
협회장이 저런 말을 할까 봐 미리 적절한 도구도 준비해왔다.
이 현대 사회는, 새끼손가락을 거는 것보다 확실한 약속 방법이 있었으니.
부스럭.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양피지를 한 장 꺼냈다.
협회장은 아이템에 적힌 계약 내용을 보고 식은땀을 주르륵 흘린다.
지금의 나는 대부분의 힘을 잃어 타인의 내면을 훔쳐볼 수 없지만, 그래도 저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유추되는군.
‘아마 상급 각성자를 향한 증오로 몸서리를 치고 있겠지.’
이곳의 기득권층이 헌터를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각성자란.
자신이 평생을 가꿔온 권력을 폭력이라는 무기로 빼앗는 실로 품위 없는 포식자였으니까.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풀영상] 고병도 헌터 협회장 기자회견]나는 휴대폰으로 보던 영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반응으로 알 수 있듯이 어제의 교섭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상대방이 결국 계약서에 서명했거든.
[(속보) 한국, 4번째 S급 등장!] [OECD 국가별 헌터 보유 순위] [‘위기 속 대전환’ 새로운 S급이 탄생했다고?]하루 만에 뒤집힌 여론.
나는 고병도 회장과 이야기를 맞춰 협회가 그동안 숨겨놓았던 비공개 각성자가 되기로 했다.
특수한 함정수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F급인 척했다며 그럴싸한 변명을 내세운 것이다.
‘아니꼬운 소리들이 쏙 들어갔네!’
그나저나, 설마 ‘앞으로 회장을 해치지 않겠다’는 그딴 항목을 위해 30억을 덜컥 내놓을 줄이야.
만약 내 진짜 등급이 밝혀진다면 그때는 절대 곱게 넘어가지 않겠군.
하지만 당분간은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이걸로 다 된 겁니까?”
나는 방금 막 자신이 S급이라는 것을 증명한 참이니.
“예예! 이제 정말 가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김기려 헌터님.”
나는 등급 정정을 위한 3차 각성 검사에서 교묘한 술수를 부렸다. 마석을 갈아 넣은 약품을 마셔 기계의 측정값에 간섭한 것이다.
‘쉽구만.’
각성치를 부풀려 신고하는 것.
즉, 이번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진짜 등급 조작……!
‘그러게 누가 기계를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랬나?’
물론 나는 사기를 치고도 죄책감 하나 없었다.
어차피 이쪽은 검사를 안 했을 때에도 암묵적으로 S급 취급을 받고 있었잖아.
이건 그들의 믿음에 보답을 해준 것뿐이라고.
“흠.”
터벅터벅.
등급 검사를 마친 뒤.
나는 벗어뒀던 코트를 챙기며 측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마주친 지구인들의 반응이 가관이다.
행인들은 지나가는 나를 긴장한 기색으로 흘긋댔으니.
‘두려움의 시선.’
옳거니.
저 공포 어린 눈빛이야말로 바로 강자가 누릴 특권이지.
‘이제 날 함부로 건드리는 놈은 없겠군.’
나는 그들의 반응을 흡족히 즐겼다. 잠시나마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협회의 복도를 지나다 프런트쯤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새카만 긴 머리.
솔직히 처음 환생했을 때만 해도 지구인들은 죄다 도긴개긴으로 보였거늘.
그래도 이제는 슬슬 여기 사람들도 구분이 된다.
“안녕하세요.”
특히 저렇게 쾌청한 마나를 지닌 술사라면 더 알아보기 쉽고.
***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협회의 한 직원은 오전 업무를 끝내고 짧은 휴식을 보내고 있었다.
프런트 옆에 놓인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뽑고 있는 것이다.
“하아…….”
B급 각성자 선우연.
그녀는 사흘 동안 벌어진 폭로 행진에 누구보다 마음 졸인 사람이다.
모르는 척 선 긋기에는 자신은 전부터 그 헌터와 너무 깊게 연관되어 있었고.
또한 그간의 일로 상대방에게 인간적인 정까지 붙었기에.
-비켜요.
-덤으로 죽기 싫으면 이무기의 동선에서 나가라고.
지난 미필연한 악성 사태는 다시 생각해도 정말 섬뜩하지.
그 각성자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
‘나는 그때…. 너무 놀라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
혼비백산한 시민.
들려오는 비명.
그리고, 괴물을 마주하던 차가운 낯의 남자.
김기려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까지 침착함을 유지한 걸까.
그게 단지 힘이 있다고 가능한 일일까?
선우연은 그동안 겪었던 사건들을 찬찬히 되짚는데,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각성치만 높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속보) 한국, 4번째 S급 등장!]그러니 결국.
이 상황은 S급이라는 감투가 마땅한 주인을 찾아갔다고 느껴질 뿐이라.
‘사람들 반응이 순식간에 뒤집혔네.’
선우연은 인터넷을 확인하고 다시금 안도했다.
어제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들 웬 불법 등록자가 S급이라고 비난들이더니만.
협회장이 나서서 해명하자 게시판은 어느덧 김기려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다.’
선우연은 율무차를 머금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에는 자신이 사흘간 쓴 댓글 목록이 떠있었다.
[ye***08 : 욕하지마세요] [ye***08 : 초상권침해하지마세요]앞으로는 이런 소심한 변론을 하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니 참 마음이 놓이는데…….
“안녕하세요.”
그때.
선우연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아, 김기려 헌…….”
그곳에는 화제의 인물이 서 있었지.
짧게 잘린 금발과 마른 시선.
선우연은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상대의 옷차림을 보고 문득 말을 멈췄다.
“헌터님, 안녕하세요.”
대화가 이어진 건 그로부터 3초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기사 봤어요. 그, 이번에 S급으로 새로 등록하셨던데…….”
잠깐은 축하한다고 말할까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현재의 상황은 조용히 살고 싶어 했던 남자의 의향과는 정반대이지 않은가.
“아.”
선우연은 어색한 공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적당히 주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혹시 미필연한 악성은 어떤 아이템을 주던가요?”
“예?”
“공헌자용 사냥 보상이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요.”
“아, 그거.”
그러자 기려는 걸치고 있던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결국 성장하기 전의 이무기 아이템 테이블 안에서 나온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꽝이에요.”
그가 꺼내서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얇고 긴 날의 비수.
[비명말뚝] [등급 : 유니크] [설명 : 피격 상대에게 [고통] 상태 이상 부여…….]대체 어떤 성능이길래 굳이 꽝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
[※주의사항 : 물리 대미지를 입힐 수 없는 특수 장비입니다.]분석 스킬이 없는 각성자는 아이템의 효과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선우연은 그저 비수의 손잡이가 고급스럽다고 생각할 뿐. 달리 특별한 반응은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