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11
109화. 4번째 S급 (2)
물론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기려는 이미 1층에 도착해 상부의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
고즈넉한 상담실 안.
기다란 가죽 소파에 두 명의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았다.
한쪽은 작년부터 헌터 협회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고병도.
그리고 나머지가 마찬가지로 작년에 각성 검사를 마친 모 헌터.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하지만 그 각성자는 신출내기라고 부르기엔 묘한 구석이 있다.
우선 검 한 자루로 S급 몬스터의 숨통을 끊었다는 비범한 혐의가 걸려있고.
성격은 지나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침착했기에.
“이거 생각보다 금방 다시 보게 됐네요. 김기려 헌터.”
협회장의 말소리에 건너편에 앉아 있던 청년은 흘긋 시선을 들었다.
이무기처럼 새카만 의복을 빈틈없이 갖춰 입은 그 모습은 왠지 모를 위압감이 있었다.
“…….”
턱.
그 직후. 테이블에는 두 잔의 커피가 놓였다.
“커피는 못 마시니 다른 걸로 바꿔줘요.”
김기려는 들이밀어진 잔을 보며 한마디 하지만 긍정적인 답을 받지 못했지.
“죄송합니다. 지금은 커피 종류밖에 준비된 게 없어서요. 그럼 밖에 나가서 다른 음료수라도 사올……?”
“허허, 뭘 그렇게까지 하나. 어차피 금방 이야기하고 일어날 텐데 그냥 물이나 가져오지.”
커피를 타온 직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전하니 맞은편의 협회장이 냉큼 말을 이었으니까.
기려는 자신의 의사도 묻지 않고 물을 부탁하는 협회장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먹을 것 가지고 섭섭하게 하네. 벌써부터 이러면 후회할 텐데.”
묘한 문장과 함께 시작되는 대화.
이야기의 물꼬를 튼 김기려는 우선 상대방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일단 뭐 좀 물어볼게요.”
“음?”
“협회 쪽은 저한테 구체적으로 뭘 바라는 거예요?”
그걸 들은 협회장은 내심 신이 났지.
이때까지만 해도 저놈이 드디어 고집을 꺾고 협회 말을 듣겠구나 싶었으니까.
“아유, 우린 따로 원하는 거 없어요! 그냥 다 절차대로 하는 거지.”
“….”
“그러니 기려 씨는 저번에 말한 대로 자기가 S급이라는 것만 밝혀주면 되는 겁니다.”
협회장이 들뜬 어조로 말하니 기려는 담담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게 협회에 이득이 되나요?”
“예?”
“제가 S급이라고 말하면 여기에 뭔가 좋은 일이 있느냐고요.”
“뭐, 굳이 따지면 이득이라기보다는 명예겠지요? 거 국제 뉴스 같은 곳 봐봐요. 요즘은 OECD 국가들도 S급 헌터 수로 줄 세우기하고 그러잖아들.”
그런데 이 직후에 흘러나온 발언이 충격에 가깝다.
“아, 명예. 그럼 지금 그깟 거 때문에 그런 별 짓거리를 다 했다는 건가.”
김기려는 협회장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곧 태도가 돌변했으니까.
“뭐, 뭐라고요?”
“뭘 모르는 체야? 그쪽이 내 신상 질질 흘리고 다녔잖아.”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잇는다.
“게다가 친한 기자들 시켜서 취재로 정신없게 만들고, 그 뒤에는 이름 팔아 매스컴 도배?”
“…….”
“확실히 그동안은 꽤 잘 먹히는 수법이었겠어. 상급 각성자니 뭐니 해도 결국 헌터들은 20~30대 애송이니까.”
“지금 무슨…….”
“사회 경험은 없지. 지지 기반도 없지. 하지만 또 인터넷은 친숙하니까 이거 언론의 압박을 안 받을 수가 없겠는데?”
이어진 것은 확신이 서린 말투.
“하지만 S급 후보에게도 이러는 건 간이 크네. 협회는 S급이 엇나갈 가능성은 그냥 상정을 안 해요?”
그 각성자는 섬찟한 삼백안을 굴리며 질문했다.
“…혹시 정하성도 이렇게 당했냐?”
기려가 쏘아붙이고 있는 말들은 뜻밖에 사실과 근접한 추측들이었다.
“그 만만한 놈은 살살 몰아서 어떻게 말 잘 듣게 만들었으니 이번에도 똑같은 수법 쓰는 거야?”
하지만 이대로 꿀 먹은 듯 다물고 있을 수도 없을 노릇.
협회장은 머뭇거리며 한마디 했다.
“나, 낭설로 뒤집어씌우지 마세요! 나는 지금 이게 당최 무슨 말인지……!”
그러나 되돌아온 반응은 냉담하다.
상대방은 온기 한 점 묻어나오지 않는 싸늘한 눈초리를 했으니까.
“그래요? 잘 모르겠으면 넘어갈까?”
그 남자는 의외로 개인정보 유출을 크게 파고들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다음에 이어진 주제가 더욱 큰 문제였다.
“그럼 본론부터. 일단, 나는 댁들이 원하는 걸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뭐라고요?”
“상급 각성자가 되면 던전 브레이크 때 협회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며요.”
이걸 어기면 막, 헌터 마켓도 쓸 수 없게 되고 하여간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라던데…….
그는 입을 가리고 웅얼거리다 시선을 슬쩍 치들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뒤이어 흘러나온 것은 순수한 의문의 목소리.
“너희처럼 일 못하는 것들 말을 내가 굳이 왜.”
일부가 생략된 문장이지만 그의 주장은 자명하다.
김기려는 현재 협회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을 확고히 밝혔다.
“허, 허허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원래 재난 상황이 오면 당연히 누군가는 통솔을 해야 하는 것인데…….”
실로 불손한 언사.
협회장은 상대의 태도를 보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는데.
그가 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 상대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 직후.
김기려는 나무 테이블 위로 자신의 휴대폰을 툭 내려놓았으니.
‘전화기?’
반사적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협회장.
[……를 보세요. 사라진 보스들 특성이 대부분 비슷하잖아요. 가만히 놔두면 개체 수가 늘거나, 아니면 사망했을 때 상대에게 버프를 주거나.] [그래서 이게 이무기를 육성하고 있다는 증거다?] [말고도 많아요. 뒷페이지에 자료 정리해뒀어요.] [그런데 이걸 왜 여기에 가져왔어요. 이런 거는 그, 경찰에…….] [아니, 수사과에서 보스 몬스터는 자기들 관할이 아니라면서 여기로 전화 돌렸다고요.] [그래요?]하지만, 이윽고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은…….
“헙!”
상담실 한켠.
뒷짐을 지고 있던 협회의 관리직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라고 하실까 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좌표까지 알아왔어요. 서울시 구 로 163…….]지난 10월.
어느 감정사는 나찰사원이 사라진 보스들을 이용해 테러를 일으키려 한다며 지속적으로 신고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 고발의 끝은 알다시피.
[열심히 잘 찾아오셨긴 한데. 솔직히 진짜 이무기가 나타나기 전까진 저희가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요? 이 상황에서?]협회장은 순식간에 안색이 굳어졌다.
“사실 제가 옛날부터 기록이 버릇이어서요.”
하지만 김기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증거를 떠먹여 줬는데도 대처 하나 안 하더니 너희가 할 말이 있냐.
미필연한 악성은 충분히 예견된 사태였으며.
너희가 수차례 이어진 경고를 무시한 덕에 피해가 커졌다.
그런데 그런 놈들 명령을 내가?
뭐 대충, 그런 비판적인 문장들을.
“그, 그 신고자가 당신이었……?”
“참고로 아랫것들이 일 처리한 거라 자긴 모른다는 둥 둘러대진 맙시다.”
“…!”
“당신도 분명 당일에 부서장 보고를 받았잖아.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복도에 드러누웠으니까.”
“아, 그게.”
“하지만 댁은 그걸 듣고도 협회를 떴고.”
김기려는 그날의 일을 되짚으며 조소를 띠었다.
물론 협회 쪽 사람들은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다. 이는 명백한 그들의 실책이었기에.
“마침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소리인데, 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백날 천날 욕을 해봐야 아무런 타격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들 같은 나라님에게는 여론이 좀 중요할 것 같은데?”
기려는 여유롭게 전했다.
당신들의 흠집내기식 보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쯧, 여하튼 회장이란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 사고를 앞두고 한가롭게 골프나 치고 돌아다닐 수가…….”
하지만 그때.
협회장은 그 각성자의 입에서 골프라는 단어가 나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너, 너 그런 말을 대체 어디에서 들은 거야?!”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일관적이다.
졸지에 S급 후보자 신세가 된 그 남성은 대화 내내 싱거운 표정을 유지했으니.
“에스더 헌터요.”
기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내 폭탄 발언을 꺼냈다.
“제가 그분께 개인적으로 조사를 맡겼거든요. 뭐, 워낙 날 도와주고 싶어 하시길래 혹시 이런 것도 되나 하고…….”
고작 F급 따위가! 한국의 S급 헌터인 서에스더와 친분이 있다고?
“그런데 설마 설마 했지만, 진짜 협회에서 기자들이랑 손잡고 날 공사쳤을 줄이야. 그게 드러나니 에스더 씨가 많이 속상해하던데?”
“….”
“저주 계열의 헌터를 기분 상하게 해놓고 어디 앞으로 괜찮으시겠어요?”
여태껏 협회장이 여유로웠던 이유는, 본인이 벌인 수작을 상대가 쉽게 알아내진 못할 거라고 가정한 탓이었다.
안윤승이든, 강창호든, 그리고 눈앞에 있는 저 청년이든. 결국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힘없는 개인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김기려가 한국마탑의 길드장이라는 엄청난 뒷배까지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상대의 손에 미필연한 악성 사태와 관련한 기관의 치부까지 들어갔다니.
협회장은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충격에 빠졌는데, 사실 정신적인 타격은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어이가 없군.’
사실 이 F급 각성자는 상담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놀라 자빠질 뻔했으니까.
“하여간 무슨 깡으로 S급에게 명령질들인지.”
그가 살던 알파우리에서는.
마나가 없는, 또는 마법을 못 다루는 사람들을 일종의 중병이 있다고 분류하며 사실상 도태시켰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각성자가 소수의 돌연변이고.
게다가 술사도 아닌 것들이 타고난 마법사들을 싸잡아 통제하려 드니 원.
‘세상천지가 아주 거꾸로 돌아가네.’
김기려는 마나도 없는 무능력자들을 경멸의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비각성자들이 기관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사회구조는 외계인에게 상당히 이해되지 않는 문화였다.
“다, 당신…….”
하지만 알파우리가 어쨌든 간에.
결국 여기는 지구라는 이름의 이세계이고, 기존의 권력은 앞으로 몇 년은 유지될 테니까.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내, 내가 한 일이 고까워서 어디 각성 능력으로 난리라도 치겠다는 겁니까?”
“예?”
“지금 우리를 겁박하는 거냐고요!”
아니나 다를까.
협회장은 눈앞의 인물에게 뻔뻔히 엄포했다.
우리라고 S급 헌터를 억제할 수단이 없는 게 아니다.
혹여나 선량한 시민을 건든다면 국제 사회에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 참, 목청도 크시군.
“각성 능력을 시민에게 쓴다니 참 무서운 소리를…….”
물론 S급이 마음먹고 날뛰면 큰일이긴 하겠지만 그들도 일단 사람이 아닌가.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S급들은 동족 살해 등의 중범죄를 쉽게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니 저 권력자도 헌터를 상대로 가벼운 계책을 툭툭 찔러봤던 것일 터.
“걱정 마세요. 제가 왜 죄도 없는 분들을 건드리겠어요.”
기려는 선뜻 말했다.
“내가 꼴 보기 싫은 건 당신들뿐이야.”
그런데 어째, 이어진 말들은 하나같이 살벌한 기색이 담겨있어서.
“내 개인정보 팔아먹고, 내 말을 무시했던 협회뿐!”
그 남자는 뒤집어쓴 시체의 근육을 움직여 눈앞의 인간들을 삿대질했다.
그 뒤로 흐르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공상과는 다른 보다 현실적인 공포.
“내가 아까 들려준 녹음이랑, 당신이 기자를 동원했다는 증거들을 싹 다 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협회 측은 자신들의 태업을 죄다 까발려버리겠다는 그 발언에 크게 움츠러들었는데.
기려는 이야기의 끝에 와서야 비로소 원했던 주제를 이끌어냈다.
“그래도 나는 협상의 기회는 드릴게.”
사람의 두려움이란.
때때로 돈이 되니까.
“누구누구처럼 말없이 선수 치진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