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6
14화. 백의 미로 (2)
S급 2명에 F급 1명.
누가 불쌍한 희생양이 될지 투명하다.
‘망했는데?’
내가 죽음을 대비하는 한편.
S급 헌터들은 여전히 흉흉한 분위기였다.
“저는 뭐 사정이 다릅니까? 똑같은 리스크가 있는 겁니다. 게다가 벌써 두 번이나 희생했고요.”
“김기려는? 저기에도 헌터가 한 명 더 있는데 저 사람에게 부탁해보지 그래.”
“S급 헌터가 둘이나 있는데 F급에게 의무를 떠넘기라?”
정하성은 들고 있는 적색의 검을 치켜세웠다.
그는 마치 네가 협조하지 않겠다면 강제로 피를 뽑아내겠다는 듯이 굴었다.
저 사람의 검술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S급 헌터의 싸움에 말려들어 좋을 일은 없겠지.
‘제발 이쪽은 관심 가지지 마라.’
나는 불똥이 튈까 두려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그르르르르…….
홀을 채우는 짐승의 그르렁거림.
이 소리를 들은 S급 헌터들은 말을 멈추고 동시에 눈을 휙 굴렸는데, 하필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이 내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그렇다면 이 짐승이 내 뒤에 있다는 뜻이고.
‘아니, 잠깐만.’
나는 긴장 탓에 잘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렸다. 그러자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 그래도 적은 없는 거 아니었냐?’
몸이 그림자로 이루어진, 여덟 마리의 흑랑.
…몬스터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
-아우우우우우!
그 검은 늑대 무리의 수장은 허공을 향해 크게 하울링했다.
이는 동료를 부르는 소리였는지 이어서 나타난 새로운 흑랑들이 새하얀 빛밖에 없는 이 방을 검게 물들이듯, 넓게 퍼져나갔다.
왜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났지?
“사자상의 눈이 빛나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 정하성이 답을 내렸다. 이 중에서 게이트 공략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은 그였으니.
“일정 시간 피를 바치지 않으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시스템인 모양이죠.”
희생양을 선정하는 데 지지부진하면 등을 떠밀겠다. 이건가!
욕지거리할 시간은 없었다. 이어서 나타난 흑랑 무리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왔다.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시퍼런 마력이 굳어 있어, 김기려의 여린 지방층 따위는 손쉽게 가를 수 있을 터.
‘으아악!’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오는 법이다.
나는 숨을 삼키고 흑랑을 피하고자 빠르게 걸었다.
‘걸어서 어느 세월에 늑대를 따돌려!’
하지만 김기려의 뛸 수 없는 다리 탓에 도망은 턱도 없고…….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벌써 흑랑 하나가 이쪽을 따라잡았다.
이제 갈가리 찢길 일만 남았나?
‘인류의 몸 구조가 궁금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고 싶다고는 안 했어……!’
나는 다가올 해체 쇼를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공포는 잠깐이었다.
-화르르륵!
“윽?”
얇은 눈꺼풀 너머로 일순간 붉은빛이 스쳐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피부 위에선 따끔한 열기가 느껴졌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괴물을 태우고 있는 강렬한 화염.
‘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꽃이라고?’
나는 던전의 초입에서 겪은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불 속성 마법을 사용했던 술사가 있었지.
“…뒤로 빠지세요.”
정하성!
그는 검을 고쳐잡고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지키듯 앞장서서 흑랑을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세찬 물결과도 같은 힘 있는 검격에 줄줄이 떨어지는 몬스터의 목.
게다가, 이 사람은 검사의 고질적인 문제인 공격 범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이게 원시적인 술사의 마법이라고?’
화르르르!
정하성이 사용한 각성 스킬에 의해 주변이 다시금 불꽃으로 넘실거렸다.
이만한 화력을 단번에 피워올릴 수 있다니.
나는 화염을 다루는 정하성을 보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마냥 원시 술사라고 무시할 수는 없겠는데?’
게다가 어디 정하성뿐이랴. 화려한 불길에 이목이 끌려 잠깐 잊고 있었지만 이곳에는 최상위 각성자가 한 명 더 있었다.
“흠.”
강창호.
그는 몬스터가 나타났는데도 제자리에서 상황을 관망하다가, 흑랑 한 마리가 달려들고 나서야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호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서 흑랑의 길쭉한 주둥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그러자 주먹을 맞은 흑랑의 머리가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터져나갔다.
“몸이 무른 걸 보니 얼추 C급 마수겠어.”
어마어마한 괴력…….
강창호의 각성 스킬은 신체 강화인가.
‘어? 마법을 되찾아도 지구 정복은 좀 힘들 것 같기도?’
정신을 차리니 S급 헌터들이 주변의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도륙 낸 상황.
나는 창백한 얼굴이 됐다.
이 와중에 위로가 되는 건, 정하성과 강창호 모두 자신이 초기에 각성한 1계통의 능력만 쓰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나…….
지금 속성이 1개인지 2개인지가 중요할까?
내가 속성 0개를 쓰는데?
‘이런 젠장.’
마법을 되찾기 전까지는 S급 헌터들에게 대들지 말자.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강창호가 입을 뗀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제한 시간이라.”
강창호는 팔에 묻은 흑랑의 잔해를 가볍게 털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사자상 앞.
이어서, 강창호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자기 팔을 사자상에 집어넣어 제물을 바쳤다.
-쿠구구궁…….
강창호의 혈액을 먹고 만족한 사자상이 문을 연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함정까지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쉽게 협조할 줄 몰랐는데.
‘S급 싸움에 등 터질 일은 없겠어!’
그의 행동에 정하성의 기색도 한결 누그러졌다. 극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된 순간이었다.
“다음은 누가 할까?”
“우리가 돌아가며 문을 열죠. F급은 몸이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정하성이라는 사람의 인간성을 알게 되었다.
‘정하성 헌터…….’
내가 F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장 먼저 제물 후보에서 제외한 것도 그렇고, 몬스터가 나왔을 때 보호한 것도 그렇고.
과연 국민 영웅답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정하성은 철저히 약자의 편에 섰다.
‘덕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아가고 있지만 이쯤 되면 좀 미안하군.’
이어진 다섯 번째 방.
나는 제물을 바친 뒤 빈혈로 휘청거리는 정하성을 놀란 눈치로 쳐다봤다.
“정하성 씨, 괜찮아요?”
하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차갑게 말했다.
“이런 돌발적인 게이트는 보통 규모가 작습니다. 출구까지 얼마 안 남았을 거예요.”
가뜩이나 피부가 하얀 사람이 이제는 창백할 정도로 얼굴이 질렸다.
나는 정하성이 쓰러질까 걱정되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걸었다. 그래서, 앞장서던 남자가 멈춰 섰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음?”
이번에는 강창호가 문을 열 차례다.
하지만 그는 행동에 나서지 않고 뒤따라 들어온 정하성만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정하성.”
뭔가 할 말이 있나 본데.
“잠깐 진행을 멈추자.”
“왜죠?”
“생각해 보니 이 너머에 출구가 있으리란 확증이 없어. 슬슬 너도나도 몸에 무리가 왔고.”
“…….”
“어쩌면 놓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잠시 지나온 방을 조사하면 어떨까.”
제법 일리가 있어 보이는 제안이다.
그러나 되돌아온 정하성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되돌아간다는 건 핑계고, 사실은 시간 벌이를 할 작정 아닙니까?”
“사람을 뭐로 보고.”
“EX급 게이트는 제시된 조건을 따르는 것만이 정석 공략법이에요. 당신도 모르진 않을 텐데.”
그리고 이때, 정하성의 입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 튀어나왔다.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고 혼란한 상황에서 나를 칠 생각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최진 때처럼 말이에요.”
랭킹 1위의 헌터는 자신이 언제 휘청거렸냐는 듯, 또렷이 고개를 치들고 말했다.
“자기가 손해를 볼 바에는 다 같이 죽는 게 낫다는 게 그쪽 마인드 아닙니까.”
“정하성.”
“나는 댁을 절대 믿지 못하겠고, 이런 게이트에 발목 잡혀 있을 시간도 없어요. 한시가 바쁜 와중인데…….”
그는 허리춤에 걸린 칼날에 버금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의견을 전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문부터 열어요.”
이러다 진짜 싸우기라도 하면 어쩌냐.
나는 그들 사이에서 눈을 바쁘게 굴렸다.
그런데…….
“알았어.”
이건 또 의외다.
강창호는 그 말에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항복한다는 의미로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바로 열 테니까 그렇게 날 세우지 마.”
의외로 이 사람은 순순히 꺾이는 성격이었고.
“지금 공략을 돕지 않겠다고 말한 게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데.”
“무슨 오해?”
“최진 일은 사고였어. 나는 같은 헌터를 무턱대고 공격하는 미친놈이 아니야.”
그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전과자인 건 사실이니 신뢰를 못 받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정하성, 너는 지금 나를 너무 경계하고 있어.”
“그건….”
“그래서 여기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 하고, 조급한 선택을 하는 것 아닌가?”
“…….”
“아까 했던 말은 진지하게 생각해둬. 나는 네 차례라도 뒤로 한 번 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문은 열지.”
그리고 강창호는 뒤를 휙 돌아 사자의 아가리에 팔을 집어넣었다.
철컥,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방이 진동했다. 문이 열렸다.
‘역시 루머는 믿을 게 못 되나.’
상식은 있는 사람 같은데.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강창호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정하성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강창호 씨!”
강창호가 사자상에 손을 짚으며 반쯤 쓰러졌다.
그는 정하성처럼 어지러움을 느끼는 듯했고, 이내 호흡을 거칠게 고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회복약을 가지고 들어왔거든.”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보인다. 강창호의 허리춤에는 힙색이 걸려 있는데, 아마 저 작은 가방에 약이 들어있는 것일 터.
“마시고 나면 두 번 정도는 더 문을 열 수 있겠지.”
그는 자기 무릎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다.
정하성은 그 모습을 보고 잠깐 고민에 잠기더니, 뒤를 돌아 앞장서며 말했다.
“다음 방에서도 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다른 방법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혹여 강창호를 부축할 일이 생길까 싶어서, 정하성과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 걸었다.
옆에 서 있던 강창호는 가방을 뒤져 작은 유리병을 꺼내는 듯했다.
‘저게 회복약인가?’
하지만 나는 직후에 벌어진 지구인의 약품 사용법을 보고 경악했다.
-챙강!
강창호가 쥐고 있던 포션 병을 정하성의 머리에 휘둘러 산산이 깨버렸다.
깨진 병에서 흘러나온 액체는 공기 중에서 순식간에 기화되었고.
공격당한 정하성은 뒤늦게 몸을 돌렸지만 이미 약품에 노출된 상태.
“큭!”
이어서, 정하성이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스르륵 쓰러진다.
마비? 수면? 정확히 무슨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S급에게도 잘 드는군.”
일단 저딴 게 회복약이 아닌 건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