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5
13화. 백의 미로
‘눈을 감았다 뜨니 다른 세상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네.’
아까까지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이곳은 어떤 건축물의 안이다.
마치 신화 속 거인이 지나다닐 것만 같은 높은 천장. 그리고 흰 복도.
뒤와 양옆은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곧게 뻗은 길이 오로지 정면을 가리킨다라.
“진짜 게이트 안인가.”
불붙이는 마법 하나 쓸 수 없는 나약한 생물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지?
‘외계인 살려…….’
우선 막다른 곳에서 몬스터를 만난다는 최악의 상황만은 싫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뒤, 어떤 특이한 장소에 도착했다.
“음?”
4개의 갈림길이 있는 네모난 방.
정면에 보이는 길은 기려의 근력으로 감히 밀 수도 없는 거대한 문이 가로막고 있었고.
나머지 3개의 길은 훤히 뚫려있다. 참고로 하나는 내가 방금 지나온 곳이다.
“뭔가 적혀있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바로 방 한가운데에 박혀있는 이 비석.
나는 의문의 비석을 살피기 위해 몸을 숙였다.
동시에, 양옆의 통로에서 각각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히익!’
여기에 다른 생물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가끔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포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잠깐 움츠러들었는데….
‘어라? 이거 지구인 발소리잖아?’
저벅, 저벅, 저벅.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에서 나온 것은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큰 체격의 인간.
오른쪽 통로는 기려보다 조금 어린 듯한 단정한 인상의 사람.
다행히 둘 중 하나는 안면이 있다.
“강창호?”
“흠?”
나는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강창호가 가벼운 손 인사를 건넸다.
강창호가 왜 여기 있는지는 둘째치고. 그럼 이제 한 명이 남는데.
‘까만 머리에 까만 눈. 전형적이군.’
오른쪽 통로에서 나타난 저 사람은 누구일지 추측하던 와중, 돌연 강창호가 나섰다.
“아, 정하성!”
그는 반대편에 선 인물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싱가포르에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대답이 저렇게 딱딱할 정도면 둘이 썩 친하진 않은가.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나는 그들 근처로 걸어가며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내 말을 듣더니 놀란 눈치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니, 왜?
“김기려 헌터. 혹시나 하고 묻는 건데, 정하성을 모르나?”
지구에 온 지 2주 차인데 알겠냐?
그런 대답을 할 수도 없을 노릇.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자 강창호가 재미있는 꼴을 봤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봤어? 정말 널 모르나 본데.”
“…….”
“이거 아무래도 활동을 더 열심히 하셔야겠어. 봐, 코앞의 헌터가 정하성이 뭐 하는 놈인지 당최 관심도 없다는 듯이 굴잖아.”
대체 누구길래 이런 반응인지.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할 말이 없어서 잠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통성명이 이어지자 식은땀이 슬쩍 흘렀다.
“아무튼 서로 모르는 사이면 호칭만 번거로우니 미리 소개할까. 자, 이쪽은 정하성.”
“아…….”
“한국 헌터 랭킹 1위야.”
이런 제기랄.
“밖에서는 국민 영웅 소리를 듣고 다니는데, 당신은 모른다니 그건 넘어가고.”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데.
외계인인 게 들키면 어쩌지?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정하성이란 사람 쪽을 흘긋 봤다.
그러나 상대는 차가운 얼굴로 침묵할 뿐이라.
“그리고 정하성, 이쪽은 김기려 헌터. 등급은 F급.”
“아, 안녕하세요.”
“예.”
정하성의 시선은 꽤 오랫동안 내게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짧게 질문했다.
“두 분도 이 장소에 갑자기 끌려오신 겁니까?”
우리가 끄덕이는 걸 본 정하성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제 손목에 있던 시계를 잠시 조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어.”
정하성의 시야에 네모난 푸른 화면이 떠오른다.
홀로그램 같기도 하고, 어쨌든 빛으로 된 건 확실한데.
[미확인된 게이트] [설명 : 게이트 정보가 없습니다.] [등급 : EX]설마 저것도 분석기인가?
‘이게 지구의 기술력…….’
이렇게 세련된 모양의 분석기도 있을 줄 몰랐다.
나는 화면을 훔쳐보며 감탄했고, 정하성은 그곳에 쓰인 글자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게이트 안인 건 확실합니다. 등급은 Extra. 귀찮게 됐네요.”
EX급이 뭐더라.
나는 호주머니에 있던 기기를 꺼내 모르는 단어를 검색하려 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화면이 무지개색으로 노이즈가 끼며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이런, 나도 보호 케이스 없이 들어왔군. 빨리 나가지 않으면 간섭 때문에 휴대폰이 망가지겠어.”
강창호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일반 전자기기는 게이트에서 사용이 어려운 모양인데.
‘그럼 안윤승과 연락할 방법도 없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휴대폰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로 와주시겠습니까? 석판에 뭔가 적혀있어요.”
그 침묵을 깬 것은 정하성이었다.
나와 강창호는 부름에 따라 방 중앙에 있던 기물로 다가갔다. 그곳에 있던 괴이쩍은 조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의미심장한 메시지…….
“공략에 필요한 힌트일까요?”
눈치를 보니, 이곳은 단순히 몬스터를 쓰러트린다고 되는 게 아닌 듯하다.
“진행할 수 있는 방향은 저 문뿐인 것 같은데, 일단 가보죠.”
괜히 입을 열었다간 머리가 빈 것만 들통나겠지.
나는 강제로 과묵한 성격이 되어 정하성의 뒤를 따랐고, 이어서 도착한 장소가 바로 이 방이다.
‘아까랑 똑같잖아?’
흰 방에서 탈출했더니 또 거대한 흰 방.
하지만 상세한 구조는 다르다.
단 하나의 출구. 그리고 석판 대신 놓인 무언가.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자의 머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 동상이다.
입 안에 동그란 입구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딱 사람 팔 하나 집어넣기 좋은 구멍이야.”
그 동상을 보고 뒤쪽에 서 있는 강창호가 툭 말했지만, 누구도 손을 넣어보는 이는 없었다.
미쳤다고 사자 아가리에 손을 넣나. 가뜩이나 게이트 안이라 찜찜하구먼.
“…강창호 헌터. 잠시 도와주시죠.”
“내가?”
그런데 그때.
이 방의 출구에 선 정하성이 덤덤한 얼굴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로서는 별거 아닌 말이었겠지만 이어진 상황은 충격적이다.
“문이 제 힘으로는 안 열립니다.”
S급 헌터, 이들이 지구에서 어떤 존재인지 아는가?
마력에 노출된 인류 중에서도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 술사들은 말 그대로 괴물 같은 능력을 자랑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S급 헌터가……. 둘이나 모였는데.
‘미친.’
문 하나를 못 연다니.
몇 분 뒤.
정하성이 최후의 수단으로 문에 폭발 마법을 갈긴 것을 끝으로 우리는 결론 내렸다.
‘힘으로는 못 여네!’
그럼 뭘 해야 열릴까?
갖은 수단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설마…….’
우리는 방 중앙에 위치한 사자상을 쳐다봤다.
이 방은 허허벌판이니 뭔가 시도해볼 만한 것은 저 사자상뿐.
“파괴해볼까요?”
그 후로도 몇 가지 시도가 이어졌지만 우리는 사자상에 흠집을 내지도, 문을 열지도 못한 채 고립됐다.
그렇게 10분이 지났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오게 됐으니, 이대로 가면 식량이…….’
김기려의 사인이 사인인 만큼, 나는 다가오는 아사의 위험에 민감히 반응했는데.
마침 정하성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그는 뭔가 결심한 듯 사자상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기 손을 사자상의 구멍 안으로 넣었고….
“…!”
그 순간, 백색이던 사자의 눈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꿈쩍도 하지 않던 육중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오.”
“열렸네요.”
그런데, 어라?
사자상에서 손을 뺀 정하성의 기색이 묘하다.
그는 뭔가…. 당황하고 있다.
“왜 그러세요?”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손은 짐승에게 물린 것처럼 붉은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정하성은 제 손의 상처를 보여주며 말했다.
“피를 빨렸습니다.”
“뭐라고요?”
“놀라서 저도 모르게 팔을 빼려 했지만, 힘을 줘도 빠지지 않더군요. 어깨를 자르는 게 차라리 빠를 정도로.”
다행히 흡혈량은 미미한 정도인지. 그는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왠지 거대한 실험실 속 모르모트가 된 기분이야. 온통 하얗군.’
그런데, 이다음 방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
“…….”
나와 정하성은 문 너머에 있는 광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왜냐, 아까 봤던 것과 똑같은 사자상이 방 중앙에 떡하니 박혀 있었거든.
‘그 짓을 또 하란 뜻인가?’
게이트 제작자가 로마의 휴일을 아주 감명 깊게 보셨나 봐?
‘으.’
어쨌든, 정하성은 이 던전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는지 질질 끌지 않고 팔을 집어넣었다.
다시금 문이 열렸다.
‘휴우, 그래도 덕분에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가고 있네.’
사자상에 팔을 집어넣으면 문이 열린다.
쉽고 간단하다. 정말 쥐새끼도 풀 수 있을 퍼즐이다.
“아, 다음 방에도 사자상이 있네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나갈 수 있는 걸까요?”
그래서 긴장이 풀렸던 건지도 모른다.
“강창호 헌터,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정하성의 몇 마디로 인하여, 이곳의 분위기는 언제 터질지 모를 기류가 흐르게 되었다.
“다음 방을 대신 열어주시겠습니까?”
“왜?”
“동상의 흡혈량이 바뀌었어요.”
“…….”
“첫 번째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두 번째는 조금 현기증이 났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런 던전은 보통 요구량이 점차 늘어나죠.”
우리 교대로 합시다.
그가 정중한 어투로 제안하자. 강창호는 비꼬듯이 대답했다.
“글쎄. 여태껏 잘하던데 그냥 끝까지 앞장서시지?”
이에 정하성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공략에 비협조적이군요.”
“내 헌터 랭킹을 모르나?”
“게이트 클로즈 횟수로 줄 세우는 쓸데없는 호칭에 관심 가진 적 없으니까.”
스르릉, 어디선가 날 선 금속음이 울린다.
이는 정하성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는 소리였으며, 강창호는 그것을 느슨히 지켜봤다.
“한 번만 더 묻습니다. 강창호 헌터, 저희 교대합시다.”
“싫다면?”
“잘린 팔도 문을 열 수 있는지 확인할까요?”
음.
이러다 얘들 한바탕 싸우겠는데.
“저기…….”
나는 그들을 말리려다가, 이어진 헌터의 말에 숨을 삼켰다.
“정하성, 내 입장도 좀 생각해줘. 그렇게 교대로 문을 열다가 하필 내 순서에서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흡혈을 당하면 어떡해. 일단 내게 타이밍을 선택할 권한은 줘야 서로 억울할 일이 없지 않겠어?”
그래. 왜 여태껏 이 생각을 못 했지?
이 자리의 모두는 슬슬, 이 게이트의 의의를 눈치챈 상태였다.
이곳은 인간의 피를 바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를 지녔다. 그리고 피를 채취하는 구멍은 딱 한 사람의 팔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이다.
즉, 이 던전의 해결법은 한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이고.
나는 뒤늦게 EX급이 어느 정도의 위험성인지를 기억해냈다.
그래. 스치듯 어떤 기사를 봤었다. 그러니까 아마, 생환율 통계가 60%쯤 된다지.
결론만 말하면 이곳은 몬스터만 없을 뿐. 절대 안전한 장소는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 강창호의 말대로 온몸의 피를 사자에게 먹혀 죽을 수도 있겠지.
그럼 이제 작은 문제가 생긴다.
“음.”
나는 지금 ‘같이 들어온 사람 중 한 명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이트’에 갇혔는데.
저 사람들 각성 등급이 뭐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