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62
60화. FLUKE (2)
그렇지만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
이 순간에도 상황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큭!”
쩡!
시린 얼음 기둥이 지면에서 솟아오른다.
사이비는 얼음을 이용해 던전의 지형을 바꾸며, 상대를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이 신도들의 각성 등급은 각각 A, C, C.
상대방과 동격인 각성자가 고작 한 명인 상황.
그럼에도 안윤승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에게는 제대로 된 공격 스킬이 없으니까……!
‘사거리 차이가 너무 커!’
둔기 한 자루로 저런 광범위한 스킬을 쓰는 헌터를 상대하는 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으으.’
김기려는 싸우는 윤승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다리에 힘을 줬다.
이 와중에도 얼어붙은 발은 떨어지질 않는데.
“기, 기려 형! 좀 도와주세……?!”
안윤승은 그들의 공세에 두들겨 맞으며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기려는 그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아니, 대체 F급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자신이 가세해봤자 도움이 안 될 테니까.
기려는 괜한 기대하지 말라는 식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그러자 안윤승이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숨을 헉 삼켰다.
‘사람을 상대로는 손대중이 어려우니 나서지 못하시는 건가!’
원래는 강한 각성자일수록, 작은 실수만으로도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으니.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제가 어떻게든……!”
안윤승은 당황하는 듯하다가도, 애써 마음을 다잡고 습격자들을 상대했다.
그런데 잠깐.
이거 가만 보니 3:1 치고는 전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뻑!
누군가의 몸이 뒤로 붕 떴다.
윤승의 태클이었다. 방패를 곧게 세워 상대와 부딪힌 것뿐인데 무시하지 못할 위력이었다.
“으헉!”
텅!
벽에 부딪힌 나찰사원 측의 C급 각성자가 단번에 기절했다.
남은 건 단 2명.
‘그 많은 골렘을 쓰러트렸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거야?’
스틸범들은 펄펄 날뛰는 윤승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모든 게 상정 외다.
보통 스틸 범죄는 상대방이 몬스터와의 싸움으로 지쳐있는 것을 전제로 하거늘.
쾅!
“으윽!”
안윤승은 지나치게 멀쩡한 상태였다.
거기에 네오 시스터즈라는 일류 길드의 장비 지원까지 더해지니, 동급의 헌터라고 해도 상당히 버거운 상황.
‘어쩔 수 없지.’
사이비 신도들은 순간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웬 주머니?’
의문은 잠깐이었다.
“큽!”
그들은 품에서 꺼낸 물건을 윤승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얇은 보자기에 감싸져 있던 가루가 팍, 터지며 윤승의 몸에 들러붙었다.
‘기절 아이템 같은 건가?’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라 잠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 가루의 효과는 기려가 생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사실은.
차라리 기절약인 편이 나았지만.
“환장하겠네.”
쿠구구구구구.
기려는 복도 너머에서 어렴풋이 퍼지는 소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마치, 네발 달린 짐승이 질주하는 듯한…….
-카아아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황금색 방에 거대한 괴물이 등장했다.
‘고릴라?’
비대한 두 주먹.
발달한 상체.
어찌나 팔 근육이 무시무시한지 상대적으로 하반신이 얄따랗게 보일 정도군.
[그리드] [등급 : A]이 던전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뛰쳐나왔다.
즉, 그들이 던진 가루의 정체는.
“크르르르…….”
“윤승아! 튀어!”
몬스터를 꾀는 향료!
기려는 습격자들의 목적을 알아채고 윤승에게 외쳤다.
하지만 2명의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잠깐, 윽!”
윤승은 어설프게 도주를 시도하다가, 되려 얼음 마법에 다리가 붙잡히게 되었다.
까드득.
하얀 서리가 몸을 뒤덮을 때쯤.
광분한 거대 괴수는 윤승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아참, 물론 그리드도 일종의 골렘이다.
문제는 이 생체 골렘은 꽤 신식에 속해서 비상정지를 알아내려면 시간이 든다는 것.
‘제기랄. 트라우마를 이기게 하려고 데려왔더니 이러다 더 심해질 판이네!’
기려는 피부가 뜯겨나갈 각오를 하고 다리를 잡아뺐다.
드디어 얼어붙은 발이 떨어졌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이런!’
보스 몬스터에게 공격당한 안윤승이 방금 막 녹다운됐다.
“커헉!”
쿵!
몸통박치기를 맞은 안윤승은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기려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상비 중이던 마력 증폭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인제 와서 F급이 나서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최소한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니까.
“뭐야, 얼음에서 벌써 나왔……!”
얼음술사가 놀라 외칠 무렵.
기려는 손을 뻗어 술식을 발동했다. 간단한 수마술이었다.
“으윽!”
촤아아아악.
쓰러진 안윤승의 머리 위로 세찬 물이 쏟아졌다.
“그르르르륵?”
그리고 역시나, 안윤승을 덮고 있던 가루가 씻겨져 나가자 보스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킁! 킁!”
자신을 자극하던 마도구의 흔적이 갑자기 옅어지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수속성 각성자?’
꿀꺽.
보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사이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안윤승을 겨우 처리했나 했더니, 이젠 가만히 있던 헌터가 나설 줄이야.
‘저 인간은 대체 몇 급이지?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평소 같았으면 이 유인향(誘引香) 하나로도 충분했을 터이다.
하지만 저들이 1시간 만에 게이트를 휩쓸어버린 탓에 향에 이끌려오는 몬스터가 너무 적었다.
게다가 한쪽은 물 속성 스킬을 쓴다.
그럼 몇 번을 던지든 가루는 다 씻겨져 나가버릴 테고…….
“이, 이익!”
하지만 이때.
-파삭!
이쪽이 생각에 잠긴 사이.
옆에 서 있던 C급 신도가 다시금 가루를 적에게 뿌렸다.
김기려에게 말이다.
이를 본 얼음 술사는 크게 화를 냈다. 그게 얼마짜리인데!
“이봐요! 어차피 뿌려봤자 금방 씻어낼 텐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 어, 어. 그렇지만 마수가 이쪽을 쳐다보길래 당황해서!”
그리드는 콧김을 씩씩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윽고 새로운 표적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그래도……!”
그런데 저 사람.
왜 이번에는 유인향을 씻지 않는 거지?
“….”
가루를 뒤집어쓴 금발의 헌터는 제 삼백안으로 보스를 조용히 올려다봤다.
‘그 가루가 1세트 더 있으셨어……?’
참고로.
김기려는 안윤승을 씻기느라 오늘치 마력을 다 써서 더는 물을 만들 수 없다.
“기, 기려… 형?”
스읍.
그는 차분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한 마디 유언을 남겼다.
“윤승아, 넌 이 틈에 빨리 회복약이나 마셔둬라.”
“네?”
문장이 끝나자마자 광분한 그리드가 날뛰기 시작했다.
“우! 우! 우!”
콰르르.
기려는 곧바로 윤승과 거리를 벌렸고, 그리드는 내달리는 표적을 따라 주먹을 휘저었다.
쿵!
보스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던전의 아름다운 황금 벽은 난잡하게 파괴되어갔다.
하지만 지금 금 따위가 중요할까? 누군 목숨이 달아나게 생겼는데.
‘흐아아아악!’
쿵!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그리드의 몸집이 너무나 거대해 속도가 느렸다는 것이고.
“윽. 하여간 나도 참, 형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나…….”
기려가 보스의 시선을 끄는 사이. 드디어 안윤승이 회복을 마쳤다.
스틸범은 경악한 듯 외쳤다.
“왜 바로 씻어내지 않나 했더니. 저 미친놈! 설마 보스를 자기 혼자 상대하려는 거야?!”
이에 윤승은 말했다.
“당신들 운 좋은 줄 알아. 저분이 지금 얼마나 봐주고 있는 건지 알아?”
“뭐?”
“사람 잘못 치면 죽을까 봐 참고 계시는 거라고!”
그러니 선 넘기 전에 슬슬 알아서 그만둬라.
안윤승은 눈앞의 습격자들이 딱하다는 듯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그의 진지한 얼굴과 확고한 믿음에 스틸범들은 점차 혼란에 빠졌다.
‘사람 살려!’
물론 이쪽의 상황보다 혼란스럽진 않겠지만.
‘이거 한 대라도 맞으면 진짜 골로 간다!’
쿵! 쿵!
기려는 여전히 아찔한 술래잡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몸은 작고 날쌔다.
괴물 고릴라는 자신의 체중 때문에 방향 전환이 어려우니, 이를 이용해 어찌저찌 버텼지.
“헉!”
쿠구구구구구…….
하지만 사냥감이 도통 잡히질 않으니 보스도 결국 화가 난 걸까?
이 순간.
게이트의 주인인 그리드는 고유 능력을 발동했다.
‘이게 무슨.’
던전의 한쪽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끝없는 심연이 채운다.
기려는 도망치려던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길이 끊겼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드에게는 이 게이트의 지형을 바꾸는 능력이 있나 본데.
‘윽.’
휘이이이이잉.
절벽처럼 깎여나간 길 너머에선 살벌한 바람 소리가 울렸다.
굳이 아래를 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거 떨어지면 죽겠구나.
‘제길.’
기려는 주저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오오오오오오!”
그러나, 그리드가 한 번 포효할 때마다 심연은 자비 없이 늘어만 갔다.
점점 도망칠 곳이 없어지고 있다.
콜로세움에 내몰린 전사가 된 것만 같았다.
‘안윤승은 뭐 하는 거야! 빨리빨리 쓰러트리라고!’
유일한 탈출구는 이 방에 들어올 때 쓴 북쪽 통로지만, 그쪽은 강도 녀석들이 틀어막고 있지 않던가?
“-아이스 필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어서 통로 쪽에서 조잡한 영창이 흘렀다.
그 얼음술사는 안윤승의 발을 묶기 위해 사방에 마법을 뿌려댔다.
‘온통 빙판투성이야!’
거울처럼 매끄럽게 얼어붙은 길목.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호떡 신세잖아.’
쿵!
머릿속에 섬뜩한 상상이 스쳐 지나간다.
김기려라는 껍데기를 쓴 외계인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자신은 왜 이리도 불행한 것일까?
오늘은 그저, 돈을 좀 벌고 싶었을 뿐인데.
“허억, 헉!”
하지만 애석하게도, 곧이어 그의 불행은 정점을 찍고 말았다.
‘망할, 방이……!’
쿠르르르.
그리드의 포효에 맞춰 또다시 길이 무너졌다.
이번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어떻게 방향을 틀어볼 새도 없이, 던전 남쪽이 갑작스레 사라졌으니까.
“아.”
뒤를 돌았을 땐 이미 그리드에게 따라잡힌 상태였다.
완전히 코너에 몰렸다.
그리드는 기려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
‘하단이 비었군!’
공격이 내리꽂히기 직전.
기려는 괴물의 품으로 파고들듯이 앞으로 내달렸다.
원래는 이대로 몬스터를 스쳐 지나갈 생각이었다.
‘하하! 이 멍청한 고릴라!’
그런데 그때.
-미끄덩.
맥빠지는 소리와 함께 돌연 혈관에 아찔한 감각이 차오른다.
“엇.”
그러고 보니 이젠 방이 너무 좁아져서, 빙판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지.
“…….”
기려는 사색이 되었다.
도망치기 급급해서 그만 발밑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 탓에 적이 깔아둔 얼음길을 타고 아래로 쭉 미끄러졌고.
‘흐억!’
하지만 웬걸.
빙판에 넘어지며 자세가 낮아진 덕분에 그는 오히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게 됐다.
후웅.
몬스터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콧날을 스쳐 지나간다.
얼음을 밟지 않았더라면, 분명 머리가 터져버렸을 터.
‘휴.’
안심한 그 순간이었다.
기려의 발이 그리드의 왼 다리와 맞닿았다.
우둑!
가속력이 붙은 상태로 A급 몬스터에게 꼴아박았으니 발목이 꺾이는 건 당연지사.
‘윽! 나만 피 봤네. 이런 접촉사고를 내봤자. 어디 골렘에 흠집이나 나겠…….’
뭔가를 생각하던 기려는 곧바로 입을 딱 다물었다.
“구오오오오오!”
그 직후.
거대한 괴수가 앞으로 넘어지며, 끝없는 심연 아래로 훌러덩 떨어져 버렸으니까.
‘예?’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그리드는 상반신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괴물이다.
공격을 할 때면 하중이 앞으로 쏠리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두 다리는 방금까지 빙판 위를 딛고 있었는데.
-구오오오…….
-오……. 오…….
-ㅇ…….
그런 그리드의 다리에 김기려가 힘을 가했다.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
그냥 슬라이딩하다 보니 발끝이 거기서 멈춘 거지.
이다음부턴 그저 당연한 물리학이 적용됐을 뿐이다.
A등급이든 B등급이든.
마찰계수의 영향은 똑같이 받거든.
“음.”
우연히 빙판에 미끄러지고.
몬스터가 그 위를 헛스윙하고.
따라서 몬스터의 자세가 불안정해진 참에, 자신이 이를 걷어차 상대를 낭떠러지로 다이빙하게 만들었다라.
‘어…….’
기려는 아리송한 얼굴로 어둠 너머를 지켜봤다.
그러자 그의 앞에 무언가 불쑥 떠올랐다.
파앗.
옅은 빛에 휩싸인 의문의 물체…….
‘아니, 진짜 이렇게 죽는다고?’
보스 퇴치 보상이다.
그리드가 즉사했고, 게이트는 김기려를 사냥의 최고 공로자로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