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94
92화. 새 반지를 끼고 (2)
S급과 긴밀한 친분이 있으며, A급에게 형님이라 깍듯이 불린다니…….
이쯤 되면 더 놀랄 기운도 없다.
‘무, 무슨 놈의 인맥이 저렇게 화려해.’
커흐흠!
협회장은 그들이 인사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멋쩍은 헛기침을 반복하여 빠르게 도망쳐버렸다.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오.’
반짝.
나는 손에 든 반지를 햇살에 비춰봤다.
처음 보는 별자리가 양각으로 새겨진 얇은 띠.
이게 앞으로 함께할 새 장비인가.
‘지구의 부여마법!’
나는 드디어 맡겼던 반지를 되찾았다.
구서형이 인챈트가 다 되었다며 방금 막 아이템을 가져다주었으니까.
‘겉만 봐서는 얼마나 좋아졌는지 잘 모르겠군.’
나는 반지를 손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흐음.’
그나저나 참 이상한 일이지.
아까 반지를 건네받을 때 구서형에게 슬쩍 새로운 제안을 했었는데…….
-인챈트 말고 돈으로 달라고?
-어때? 그편이 너도 더 이득 아니야?
어째서인지 그녀는 은혜를 돈으로 갚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죽하면, 내가 현찰을 달라고 하자마자 표정 관리를 못하고 정색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구 기준에선 예의 없는 말이었나?’
구서형은 굉장히 망설이는 어투로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정 원한다면 돈을 준비해줄 수도 있겠지만, 역시 무료 인챈트를 해주는 걸로 은혜를 갚으면 안 되겠느냐…….
그래서 나도 그냥 알겠다고 했지.
솔직히 말하면 받아먹는 입장에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좀 그래서.
‘어쨌든 공짜면 됐어!’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형님!”
그렇다면 반지도 돌려받았겠다, 이제 오늘의 일정에 집중해야겠군.
“이것 좀 봐주세요! 어때요?”
“오.”
“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스킬을 안정시켜봤어요!”
나는 지난번 레드 게이트 공략을 계기로 매주 목요일마다 저 A급을 훈련시켜 주고 있었다.
“그래. 잘하고 있네.”
하지만 꽤 아쉬운 일이지.
어느덧 수업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스톤스킨]이라고 부르는 저 버프 스킬은 안윤승이 가진 마지막 마법이기에…….‘더는 꾀어낼 핑계가 없군.’
이제 선생질에도 한계가 왔다.
이 다음 단계의 교습은 원시 술사들에게 가르치긴 위험한 영역에 있단 말이다.
‘으으.’
일취월장한 성장은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왜 이리 마음이 복잡한지 원.
저 지구인이 설마 그러진 않을 거로 생각하지만…….
혹시 나한테서 더 배울 점이 없어지면 앞으로 연락을 안 한다거나……?
아니, 아니야. 나쁜 생각하지 말자.
‘유, 윤승이는 착한 지구인이니까 그렇게 지독하게 굴진 않을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Wake up! 매일 아침 떠오르는♩♪~
그런데 그때.
윤승의 품속에서 갑자기 맑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휴대폰 벨이었다.
“어? 실장님이 이 시간에 왜 전화하셨지?”
“길드 연락이야?”
“예. 잠깐 받을게요.”
이윽고 통화를 시작하는 안윤승.
물론 김기려의 청력 따위로는 그들의 통화 내용을 엿들을 수 없었다.
“헉.”
하지만 저 반응을 보면 일단 좋은 소식은 아닌 듯하군.
“왜 그래. 무슨 일 났어?”
“그게…….”
잠시 뒤.
통화를 마친 안윤승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회사에 무언가 긴급한 사태가 벌어져서 말이다.
“이, 이상 변이래요!”
오늘은 네오 시스터즈의 C급 헌터팀이 게이트 공략을 나서는 날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지.
던전의 난이도가 변하는 현상이 일어나 C급 게이트가 B급으로 바꿔치기 됐으니까.
“한 명은 어찌저찌 탈출했는데, 나머지가 아직 게이트 안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에는 심지어 그곳의 구조까지 큰 폭으로 변화해서.
덕분에 몇몇 길드원들이 미로처럼 꼬인 게이트 내부에 고립된 상태라고 한다.
‘저런.’
이대로 가면 길드의 C급 헌터들이 무더기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그래서 네오 시스터즈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일정이 빈 A급들을 불러 급히 구조팀을 편성한 것이다.
“윤승아, 택시 잡아줄까?”
“부, 부탁드립니다!”
안윤승은 허겁지겁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그런데 잠깐, 이 급박한 장면에서 나는 왜 이리 여유롭냐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 같은 F급은 이번 사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좀 과장하면, 솔직히 김기려 같은 물몸보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더 공략에 도움 될 판이니까.
“그래. 잘 다녀와~”
필연적인 수수방관.
나는 그들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
.
.
물론 이 험난한 세상이 자기 생각대로 돌아갈 일도 없었다마는….
“후우.”
약 40분 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어느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지금으로부터 몇 분 전.
안윤승에게서 한 통의 연락을 받았으니 말이다.
“기, 기려 형!”
“저분이 부른다는 그 사람……?”
“이쪽이에요. 이쪽!”
나는 네오 시스터즈의 길드원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 우선 한마디 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진짜 감정 스킬만 쓰다 갈 거야.”
이쯤 되면 이쪽이 무슨 역할로 불린 것인지 명확해지지.
-형님! 제발 도와주세요!
알고 보니 이 변이된 게이트는 공략에 감정사가 꼭 필요한 모양이라.
-…네오 시스터즈에는 쓸만한 감정사가 없냐?
-아, 아뇨. 감정 스킬만 놓고 보면 당연히 수준은 다들 대단하죠. 그런데 문제는 각성치가…….
-각성치가 뭐.
-모두 D급 이하라. B급 게이트에 들어가기 싫다고 퇴짜를 놨어요.
중간에 작은 실랑이는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결국 상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저 A급 헌터는 일단 빚을 만들어두면 무조건 결초보은하거든.
‘에휴.’
뭐, 마침 이용할 구실이 떨어져서 걱정이었는데 잘되지 않았나.
나는 이번 사건을 이용해서 훗날 또 크게 한탕 칠 생각이었다. 그런 시커먼 마음이라도 없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다는 말이다.
“흠.”
그럼 지금부터가 본론인데.
“구조팀은 이게 다랬지?”
“예! 형님!”
“협회 쪽 입장 허가는 떨어졌고?”
“이런 상황에서는 선조치 후보고 하면 된대요!”
분석 계열 각성자가 게이트에 진입하게 된다면 보통 역할은 하나였다.
‘함정의 간파.’
감정사의 스킬은 처음 보는 트랩도 어떻게 작동되는지 대충 설명을 볼 수 있다나?
그리고 어찌 보면 당연할 일이겠지만.
이 게이트는 내부에 심할 정도로 장치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함정부터 시작해서 던전의 진행 경로를 결정하는 스위치까지.
그야말로 감정사가 없으면 한 발짝도 진행할 수가 없는 상황.
“윤승아.”
그러니 나를 찾은 안윤승의 심정도 이해는 가는데, 일단 이것만은 확실히 해두자.
“너 내가 F등급인 건 기억하고 있지?”
“아, 네.”
“그런데 만약에라도 몬스터가 내 쪽으로 오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뒷말은 아꼈지만, 이 정도면 뜻이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송장 치울 거라고 알아둬라.’
안윤승은 긴장이 바짝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 구조팀에는 A급이 자그마치 2명이나 있으니 크게 걱정할 일도 없지.
“아유, 아무렴요. 귀하디귀한 감정사님을 모시고 들어가는 건데 저희가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
나는 말을 걸어오는 다른 A급을 흘긋 살폈다.
A급 2명과 F급 1명.
아무리 급조된 팀이라지만 균형이 정말 엉망인데.
“자, 그럼 진입들 하세요.”
“갑시다!”
잠시 뒤.
우리는 팀장이라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 게이트에 발을 들였다.
아, 참고로 이번 일은 블루 게이트에 진입해야 하니 강창호에게도 따로 보고했다.
아쉽게도 네오 쪽에서 거부해서 동행까진 어려웠지만…….
A급 2명과 함께 다닐 거라고 하니까 쉽게 넘어가더라고.
물론 새로운 대화 수단인 파이로맨서 네크리스 때문에라도 잘 넘어가셔야 했겠고.
***
덜컥, 덜컥, 드르륵…….
쿵!
“해제했어요.”
“오오!”
이윽고 시작된 게이트 공략.
나는 던전의 외부 마나를 분석해 빠른 속도로 길을 열어갔다.
게다가 중간마다 나타나는 몬스터는 A급 헌터들이 순식간에 해치웠으니, 당연히 결과는 이렇게 되지.
“아!”
“왜 그러세요?”
“벽 뒤에 각성자가 있네. 3명.”
“조난된 사람 수랑 똑같아요!”
우리는 쾌속 전진을 거듭한 끝에 고립된 길드원들을 찾게 됐다.
“잠깐, 분명 여기 어디쯤 벽을 여는 장치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빨리 구해야지.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곳의 설비를 건드렸다.
정확히는, 동굴 바닥에 그려진 짐승 표식을 순서대로 건든 것이다.
‘개, 사자, 그리고 마지막이 양?’
원래는 4개의 그림을 경우의 수대로 여러 번 밟아 해결하는 퍼즐인 모양이지만 나한테 걸리면 장사 없지.
-쿵!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벽을 무너트렸다.
그런데, 뚫린 길 사이로 보이는 광경이…….
‘어?’
어째 좀 섬뜩하다.
“이게 다 무슨……!”
“으헉.”
A급들은 새로이 열린 공간을 보자마자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도 그럴 게, 회사 동료들이 실시간으로 수장되는 중이었거든.
“으아악! 도와주세요!”
“어풉, 커흐흡.”
“야! 다 비켜! 이거 그냥 깨버릴 테니까!”
물이 가득한 네모난 결계에 갇혀 허우적대는 길드원들.
여긴 EX급 던전도 아닌데 함정이 왜 이리 많은 걸까.
‘흠.’
그래도 다행히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함께 들어왔던 여자 A급 헌터가 워낙 괴물 같은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터라.
쾅! 쾅! 쾅! 쾅!
쩌적!
그녀가 마음먹고 화살을 쏟아내니 그들이 갇혀있던 결계는 금세 형태를 잃어버렸다.
덫을 통째로 파괴한 것이다.
“선배! 위! 위! 위!”
“위쪽 조심하세요!”
그런데 웬걸.
이제 감격의 상봉이 이루어질 거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수중감옥에서 탈출한 이들이 하나같이 천장을 가리켜서…….
‘위?’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투둑, 투두둑.
하지만 저런 괴생명체와 눈이 마주칠 줄 알았으면 그냥 보지 말 것을.
‘히이이익!’
저 높은 천장 위에 무언가 흉측한 것이 붙어있다.
지네라고 부르기에는 다리의 짝이 맞지 않고, 뱀이라고 부르기에는 몸이 너무 우둘투둘했지.
“저, 저, 저거. 저거에 쫓기다가 우리가 아까 그 함정에 걸린 거예요!”
저건 몬스터다.
게다가 보스급으로 추정되는……!
이를 본 A급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윤승아!”
“예!”
안윤승이 앞장서서 적을 마크하고, 다른 A급이 석궁으로 견제를 꽂아 넣는 이상적인 배치.
그렇다면 저들이 싸울 동안 이쪽도 제 할 일을 해야겠군.
“우리는 좀 뒤로 물러나 있죠.”
“아, 네!”
“그런데 당신은 누구……?”
나는 조난자들을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우리 같은 약자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게 돕는 거였거든.
-쾅!
이내 모 A급의 스킬이 작렬한다.
그녀의 석궁에서는 새하얀 볼트가 은색의 궤적을 남기며 곧게 뻗어 간다.
게다가 그 볼트는 하나하나에 중급 마법에 필적하는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으니,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콰앙!
화살촉이 닿자마자 그 흉물스런 몬스터의 몸마디가 장렬히 터져나갔다.
‘세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됐다.
그 몬스터는 자신의 몸마디가 8개 정도 남았을 무렵.
즉, 빈사 상태가 된 순간 끔찍한 패턴을 보였으니까.
“헉!”
“저게 뭐야!”
파드득!
그것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몸의 모든 마디가 분리되어 버렸다.
그리고 8개로 나뉜 몸의 마디는 각각의 머리가 되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방으로 내달렸다!
“미친! 오지 마!”
“끄아아!”
물론 여기에는 안윤승이라는 A급 방어계 헌터가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상황이 어련히 정리될 테지만…….
‘윤승아, 난 널 믿는다.’
막상 괴물이 달려드니 신뢰고 나발이고 몸이 먼저 움직이더라고.
‘믿지만 지금은 튀어야겠어!’
후다닥!
나는 공황에 빠진 C급 헌터들과 함께 도주 길에 올랐다.
다가오는 마물에 겁을 먹고 전력 질주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나와 그 C급 헌터들은 잠깐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달칵.
이곳은 이상하리만큼 함정이 많은 게이트였다는 것을.
“엇?”
나는 이윽고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직후, 선두의 C급 헌터가 바닥의 장치를 밟고 거나하게 넘어져 버렸으니까.
“잠깐!”
“윽!”
“커헉!”
우르르르.
앞장서 가던 사람이 갑자기 자빠지니, 뒤에 있던 헌터들도 가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연이어 걸려 넘어진 상황.
나는 얼떨결에 일행의 맨 위쪽에 엎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정말 최악의 자리 선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악!’
하필이면 발동된 함정이 천장에서 뭐가 떨어지는 식이거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나는 [쌍둥이 수호천사]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으아아악, 멍청아!’
아무래도 어제 입은 바지에 그대로 두고 세탁을 돌렸나 본데…….
슈슈슉.
짧게 스쳐 간 상념을 끝으로, 하늘에서 시퍼런 칼날 비가 덮쳐든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틱!
흑. 짧지만 좋은 인생이었어. 어쨌든 퇴직도 했고, 그동안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틱!
유일한 한은 지구를 좀 더 즐기지 못했다는 것 정도인…….
-틱, 툭, 투둑.
잠깐, 칼날이 몸통을 꿰뚫는데 왜 이리 맥빠지는 효과음이 나?
‘어?’
번뜩.
감았던 눈을 뜰 무렵.
나는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
왜냐하면, 저 많은 칼날이 F급 하나를 뚫지 못하고 바닥에 비참히 널브러져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