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95
93화. 새 반지를 끼고 (3)
‘이, 이게 어떻게 된…….’
이곳은 B급 게이트다. 즉, 함정 또한 동급의 각성자를 상처입힐 수 있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설마?’
유추할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나의 오른손을 훑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은은히 빛을 발하는 검지의 은색 반지.
[(강화된) 중급 반지] [등급 : 일반] [설명 : 보호의 마력이 깃들어 있는 반지. 착용 시 피해를 소량 경감한다.]구서형이 인챈트해준 바로 그 아이템이다.
‘헉!’
이렇게 직접 성능을 체감해보니 왜 다들 인챈터의 스킬에 매달리는지 알 것 같군.
설마하니 이런 반지 하나로 저 매서운 공격이 모두 막힐 줄이야.
‘구서형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내 몸뚱어리가 어떻게 됐을지…….’
덜덜덜.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다시는 마도구를 깜빡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와의 약속을 나눌 즘에는, 어느덧 몬스터 토벌도 완료된 상황이었지.
“키리리리릭!”
퍽!
A급들은 괴물의 마지막 파편을 처리하자마자 곧장 달려온다.
길드원들이 죄다 바닥에 뒤엉켜 쓰러진 상태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마수를 빠르게 정리하지 못해서 감정사님까지 혼란을 겪게…….”
석궁을 든 A급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몬스터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죽었으니 이렇게까지 사과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괜찮습니다.”
이쯤 되면 작은 불안감마저 드는군.
생판 초면인 그녀가 저렇게 미안하다고 나올 정도면 심약한 안윤승은 아주 땅에 머리를 박을 터.
‘음?’
그런데 웬걸. 다행히 걱정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형님……!”
나에게 다가온 그 A급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태도로, 예상되지 않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으니까.
“역시 형님밖에 없어요. 설마 C급 헌터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실 줄이야!”
윤승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존경에 찬 시선을 보내왔다.
***
네오 시스터즈의 안윤승은 사실 이상 변이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긴급 동원된 A급의 수는 고작 2명에 불과하고.
곧이어 한 시가 바쁜 와중에 길드의 감정사들과 마찰까지 벌어졌으니.
-B급 게이트에 D급을 넣겠다고요?
-난 절대 못 가요!
-인권침해입니다. 이거.
아이템을 둘둘 휘감게 해준다고 해도.
A급들이 최대한 보호해준다 약속해봐도.
길드의 감정사들은 끝내 게이트 입장을 거부했다.
아무리 회사의 명령이어도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큰일이네.’
물론 네오 시스터즈 쪽도 쉽게 물러나진 않았지만, 이 협의가 길어질수록 조난된 헌터들의 생존율도 떨어지는 상황.
그래서 안윤승은 어쩔 수 없이 행동에 나섰다.
어쨌든 그도 지인 중에 아는 감정사가 하나쯤은 있었으므로.
“여, 여보세요? 기려 형?”
김기려는 이 일에 실로 적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감정사 중에서 가장 유능하며, 또한 헌터로서의 능력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아니던가?
“형님. 죄송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도와주세요!”
심지어 그 각성자는 인품의 측면마저 완벽했다.
-알았어.
세상의 어느 헌터가 남의 길드의 조난자 따위를 선뜻 구하러 와주나.
하지만 역시, 김기려는 대인군자답게 자신의 요청을 바로 들어주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지.
“미리 말해두는데, 난 진짜 감정 스킬만 쓰다 갈 거야.”
김기려는 통화를 할 때부터 이 부분을 강조했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깔끔하게 길만 열겠다고.
물론 이쪽도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불렀으니 당연히 감수할 일이지만…….
‘아하!’
윤승은 뒤이은 대화를 듣고 나서야 상대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했다.
“너 내가 F등급인 건 기억하고 있지?”
“아, 네.”
“그런데 만약에라도 몬스터가 내 쪽으로 오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이 사람이라면 이딴 게이트의 몬스터쯤이야 날벌레 잡듯이 쉽게 죽일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런 장면을 네오 시스터즈의 다른 길드원에게 보이면, 상황이 꽤 이상해진다.
‘등급을 위장한 게 밝혀져 버려……!’
즉, 상대가 한 말은 이런 뜻으로 해석됐다.
-나는 대외적으로 F급이니.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몬스터가 제게 오지 않게 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윤승은 이 순간, 기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리라고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뭘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걱정 마세요. 형!’
하지만 뜻은 좀 어긋났더라도 서로 원하는 바는 이룰 수 있었지.
어쨌든 기려는 몬스터에게 공격당하길 원치 않았으며, 이쪽도 나름대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노력할 예정이었으니…….
.
.
.
결론만 말하자면.
윤승은 약속을 훌륭히 지켰다.
저승의 지네처럼 생긴 흉측한 괴물이 갑자기 8조각이 났을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신속히 배제했기에.
[보호의 방패]윤승은 각성 스킬을 이용해 던전에 원형의 장막을 펼쳤다.
자신을 중심으로 거대한 보호막을 생성해 몬스터를 역으로 가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간이 결계처럼 쓸 수 있댔어.’
보호막의 겉과 속을 거꾸로 뒤집어 전투에 공격적으로 활용하다니!
이는 김기려라는 헌터가 직접 알려준 방어 스킬의 응용법이었다.
이제는 스킬 하나를 써도 그 F급의 뛰어남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는 말이다.
“오! 윤승아, 잘했어!”
“선배님! 오른쪽부터 빠르게 잡아주세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감상에 젖어있을 수는 없으니, 윤승은 스킬로 가둔 괴물의 파편을 빠르게 제거했다.
퍽!
그것의 단단한 껍질을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고…….
“어?”
그런데 그때.
윤승은 보호막 바깥에서 비치는 풍경에 일순 의문을 가졌다.
‘기려 형이 왜 뛰고 있지?’
탁탁탁.
다른 C급들이야 뭐, 몬스터를 보고 놀라서 저럴 수도 있겠다만…….
김기려가 질주하는 것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그 냉정한 헌터는 평소에 당황하는 일이 좀체 없고, 애당초 저런 고고한 강자가 B급의 잡몹을 보고 도망칠 리도 없어서.
‘대체 왜?’
그렇다면 기려는 지금 왜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걸까?
윤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문을 해결하게 되었다.
“잠깐!”
“윽!”
“커헉!”
선두를 달려가던 C급들이 우르르 쓰러진 것으로 이내 작은 사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어?’
보호막 안에 있던 윤승은 바깥의 길드원들이 갑자기 왜 넘어졌는지조차 이해를 못 하고 있었는데…….
그 찰나, 천장에서 무언가 쏟아졌다.
그들이 밟은 스위치 탓에 칼날 비가 내리는 함정이 발동된 것이다.
‘헉!’
아무리 A급 헌터라 할지라도 이런 급작스러운 일까지는 대처하지 못하는 법.
윤승은 급하게 버프 스킬을 쓰려 했지만, 캐스팅 준비 때문에 제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틱!
하지만 괜찮다.
이 보호막 바깥에는 이미 일련의 전개를 모두 예측한 인물이 있었으니.
“으아악!”
바닥에 넘어진 길드원이 비명을 지를 때쯤.
김기려는 그들과 함께 넘어지는 척하며 일행의 위를 감쌌다.
제 신체를 방패 삼아 칼날을 모조리 받아낸 것이다.
-틱, 티딕!
김기려가 일부러 마지막에 쓰러져주지 않았더라면, 그 밑에 있던 C급들은 과연 어떤 꼴이 됐을지?
‘혼잡한 순간에 저런 빠른 판단을?’
윤승은 탄성을 뱉는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간다.
C급 헌터들이 패닉하여 통제가 되지 않자, 김기려는 그들이 함정을 밟을 거라 가정하고 함께 뛰었던 것이리라.
‘여차하면 저렇게 지켜줘야 하니까!’
감동적이다.
B급 게이트의 함정에 생채기조차 나지 않으면 의심이 쏠릴 수도 있을 텐데, 이조차도 기꺼이 감수하여 약자의 보호를 택하다니.
‘와. 기려 형은 진짜,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그야말로 이타심의 아이콘.
윤승은 그 헌터를 향한 경외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만 생각하던 말을 뱉어버렸다.
“역시 형님밖에 없어요. 설마 C급 헌터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실 줄이야!”
윤승은 벅찬 목소리로 예찬을 늘어놓았다.
“어…. 어…. 그런가?”
그가 워낙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하니 함께 있던 다른 A급까지 덩달아 감화되기 시작했고.
“어…. 제가 상황을 잘못 봤나 봐요. 사실 우리 길드원들을 지켜주신 거였군요?”
갸우뚱.
석궁을 든 A급은 아리송한 표정을 하면서도 뒤늦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도 결국 기려가 회사 사람들을 보호해주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덕분에 살았어요. 형님!”
밑바닥 각성자에게 A급 2명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
하지만 정작 인사를 받는 인물은 무덤덤하다. 그는 별다른 대답도 없이 묵묵히 옷의 먼지나 털었으니까.
‘대단한 분이셔.’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초연한 분위기.
윤승은 기려의 반응을 보고 다시금 확신한다.
그는, A급들을 발밑에 두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차원이 다른 강자구나 하고.
‘어, 이 지구인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물론 이쪽은 전혀 다른 이유로 침묵하는 거였지만.
‘이쪽은 가뜩이나 죽다 살아나서 정신도 없는데…….’
뭐 어쩌겠는가.
원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었다.
***
그렇게 그들은 조난자들을 구조해 무사히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정확히는, 보스를 쓰러트리고 정식으로 출구를 연 것이다.
“어허헝!”
“밖이다!”
“진짜 안에서 안윤승 헌터님을 봤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조난됐던 C급들은 안전지대로 돌아오자마자 참았던 설움을 토했다.
방금 막 죽다 살아났으니 오죽할까. 기려는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헌터님?”
그런데 웬걸.
물에 젖은 C급들이 모포를 두르기 시작할 때쯤. 누군가 이 구석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변이 게이트 공략을 지휘했던 담당자. 네오 시스터즈의 김 팀장이었다.
“성함이 김기려 씨라고 하셨죠?”
“네.”
그는 동료들을 구한 게 뿌듯하긴 한 모양인지. 한결 밝은 얼굴로 대화를 걸어왔다.
“오늘은 갑작스러운 도움 요청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형식적인 인사들이 이어졌는데, 이윽고 김 팀장은 기려의 의중을 슬그머니 떠봤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려 씨는 완전 프리랜서 헌터시라던데……?”
하지만 대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단순히 회사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쪽도 현재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한 상태였으니까.
‘제기랄.’
기려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느라 팀장의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해버렸다.
‘안 되겠어.’
그가 하는 고민이란 주로 한 헌터에 관한 걱정이었지.
‘안윤승을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그는 윤승의 존경심리를 제법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을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저 왜곡된 시선은, 게이트 같은 위험지대에서 곧 사고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날 왜 이리 과대평가하느냐고!’
기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내심 다짐했다.
역시 진실을 바로잡자.
나는 쥐뿔도 없는 가난뱅이 F급에 불과하다는 것을 3시간 단위로 확실히 설명하는 거야.
“형님!”
하지만 기려는 안윤승의 뒤이은 행동 탓에 제 다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저기, 이거…….”
“응?”
“아까 보스 몬스터에게서 나온 마석인데요.”
잠시 뒤.
안윤승은 남들이 보지 않는 사이를 틈타 기려에게 무언가를 슬쩍 건넨다.
분홍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타원형의 마석.
이는 수집가들에게도 높은 가치로 평가받는 마석계의 핑크 다이아몬드가 아닌가!
“나한테 이걸 왜 줘?”
기려는 마석을 손에 쥐고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이내 윤승이 설명했다.
“왠지 게이트에 가면 항상 마석을 모으시길래요. 혹시 필요하실까 싶어서 따로 빼놨어요.”
“진짜?”
“어차피 이런 건 제가 가지고 있어 봤자 돈으로 바꿀 뿐이잖아요?”
“어, 어…?”
“하지만 형님 같은 분께 가면 분명 훨씬 의미 있고 훌륭한 곳에 쓰일 테니……!”
안윤승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되물었다.
“맞죠?”
이에 기려는 두 눈을 꾹 감고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한마디 했다.
“너라도 내 뜻을 알아줘서 다행이야.”
“역시!”
그래. 까짓거 대단한 사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