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71
170화
-정결의 섬(3)
모두가 온천욕을 즐기며 쉬고 있을 무렵, 이현은 홀로 섬 중앙에 있는 화산을 오르고 있었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뒤에선 갈라테이아가 별종을 본다는 눈빛으로 이현을 따라오고 있었다.
“산은 왜 오르는 거야?”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갈라테이아는 본연의 모습일 때와 다르게 이현과 말이 통하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이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답했다.
“섬 전체를 조망할 위치를 찾기 위해섭니다.”
정결의 섬이라 불리는 이 섬은 화산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평평하고 지대가 낮았다.
그래서 산 중턱에만 올라도 섬 전체를 관찰할 수 있는 시야가 나왔다.
“난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힘들단 말야.”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가 안내역이거든?”
숨을 헐떡이며 갈라테이아가 이현을 흘겨보았다.
이현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아이 같은 님페가 어떻게 미소년과 키클롭스를 한꺼번에 꼬신 건지.’
혹시 동명이인인 건 아닐까 해서 이현이 슬쩍 떠보았더니 오히려 신이 나서 과거 연애담을 늘어놓은 건 본인이었다.
“아니, 생각해 봐. 내가 폴리페모스 그놈을 인간 노릇 아니, 거인 노릇 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동물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것은 물론 식인도 서슴없이 하는 것이 키클롭스였다.
하지만 신화에 따르면 폴리페모스가 갈라테이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식인을 그만두고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등 문명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키스가 잘생기긴 했지. 저기 이아코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정말 잘생겼었어. 그래서 잠깐 만난 것뿐이거든?”
“…….”
“근데 폴리페모스가 그걸 오해하고 바로 바위를 던져서 아키스를 죽여 버린 거야. 내가 기껏 성격 고쳐놨더니 말짱 도루묵이더라고.”
“…….”
“그랬더니 나중엔 오디세우스라는 인간한테 속아서 하나뿐인 눈도 잃었다더라. 으휴, 불쌍한 놈.”
이현은 진심으로 폴리페모스가 불쌍해졌다.
‘나 같아도 폭발했겠네.’
폴리페모스가 어장 관리당한 불쌍한 과거에 동정하며 이현은 화산의 정상까지 올랐다.
훈련으로 다져진 몸에 강화 스킬까지 걸어놓은 터라 꽤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오를 수 있었다.
‘사화산은 아닌 거 같고, 휴화산인가?’
분화를 멈추고서도 꽤 시간이 흐른 듯, 분화구에는 작은 칼데라호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분화구 주변에 초목이 없고 화산 특유의 검은 흙이 있는 걸 보니 그렇게 오래전에 분화한 것 같지도 않았다.
“갈라테이아 님, 이 화산이 언제 분화한 지 아십니까?”
“여긴 우리 아빠 관할이야. 아빠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안 터져.”
“……그렇군요.”
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선 지구에서의 과학지식도 무용지물이 되는 느낌에 이현은 맥이 빠졌다.
하지만 이현의 목적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사우레노르들이 사는 육지에서 보름이나 걸리는 동떨어진 섬. 그리고 휴양지처럼 풍족한 환경. 마지막으로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분화할 일 없는 화산.’
이현이 원하는 지리적 조건에 딱 부합하는 섬이었다.
거기에 격을 올려주는 신성한 온천 샘까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이현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하고 있자 갈라테이아가 의아해했다.
이현은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제정신이야?”
“그럼요.”
“지구에서도 이 행성에서도 너 같은 또라이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질렸다는 얼굴로 이현을 바라보던 갈라테이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쁜 이야기는 또 아닌 것 같네. 아빠한테 말은 해볼게.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
“말씀이라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짜 하지 마!”
갈라테이아가 재차 경고했지만, 이현의 직감은 이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 * *
이현 일행이 온천욕을 즐기며 하하 호호 웃고 떠들던 시각, 여전히 배의 돛대에 묶인 세멜레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강렬한 염원으로 인해 [집착(A)]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열대에 가까운 섬의 기후와 내리쬐는 뙤약볕이 파충류인 그녀의 체온을 미친 듯이 올리고 있었다.
사우레노르들은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그늘에서 낮잠을 자곤 했다.
하지만 돛대에 매여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세멜레는 고스란히 열기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염원으로 인해 [집착(A)]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무, 물…….”
뜨거움을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승격조차 하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었다.
세멜레의 풀린 눈에 광기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강렬한 염원으로 인해 [집착(A)]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살아남아야 해.’
평범한 이였다면 진즉에 삶의 희망을 포기했겠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승격을 향한 그녀의 집착이 너무 강렬했다.
“크흑!”
몸이 타오르는 듯한 더위의 고통을 참기 위해 앙다문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오죽하면 포유류와 달리 치아가 없는 사우레노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무튀튀한 핏방울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치이익!
[독 숨결]이 봉인되었어도 그녀의 핏속에 담긴 독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바닥에 떨어진 독혈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갑판을 태웠다.
독이 타오르는 매캐한 검은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르는 게 흐릿한 세멜레의 시야에 들어왔다.
“물…비라도… 제발…….”
지독하게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 그녀의 몸을 식혀줄 비가 간절했다.
그런 그녀의 간절한 염원과 독혈의 연기가 결합 되었을 때, 작은 기적 하나가 일어났다.
[강렬한 염원으로 인해 [집착(A)]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숙련도의 증가로 [집착] 스킬이 S등급으로 상향됩니다.]툭.
핏방울이 아닌 맑은 물방울이 갑판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 투둑,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주 약한 소나기였다.
비에 맞아 젖는다고 해도 한 시간이면 다 말라 버릴 잠깐의 비.
“물!”
세멜레가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빗방울이 조금씩 그녀의 입으로 떨어져 바싹 말랐던 목을 적셨다.
감질날 정도의 수분 공급이었지만, 세멜레에겐 생명수나 마찬가지였다.
“아……!”
잠깐의 비는 결국, 오래가지 않고 그쳐 버렸다.
하지만 뜨거워진 세멜레의 육신을 식히는 데에는 그 잠깐의 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식은 몸과 달리 세멜레의 정신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독혈이 비를 불렀어?’
세멜레는 독혈 한 방울로 낙뢰를 떨어뜨렸던 그녀의 오라비, 이스메이아의 왕을 떠올렸다.
낙뢰처럼 강력한 비술은 아니지만, 그녀의 독혈이 비술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드디어!”
독혈로 비술을 부리는 승격자를 사우레노르들은 바로 ‘에키드나’라고 불렀다.
* * *
꿈결 같은 온천 휴식이 끝나고 섬으로 밀물이 밀려 들어왔다.
배를 다시 띄울 시간이었다.
이현은 사람들을 던전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워터게이트]를 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쉴 수 있게 해준 이현의 배려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던전으로 돌아갔다.
“이현 씨, 잠시만요.”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 주 피디가 이현에게 다가와 민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소리였습니다. 한 귀로 듣고 흘리셔도 됩니다.”
주 피디가 크게 신경 쓰지 말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보다 이현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생각하고 있던 문제니까요.”
“정말입니까?”
“예. 지금 눈앞에 있는 큰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모두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마련할 겁니다.”
이현의 말에 주 피디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보스만 믿고 있겠습니다.”
주 피디를 보낸 후에는 춘식이 이현에게 다가왔다.
“신들을 만난다니, 이젠 자네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것어.”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 됐든 좋은 일이겠지, 암.”
이현이 쓴웃음을 짓자 춘식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몸조심혀. 던전일랑 걱정하덜 말고.”
춘식은 이현을 힘있게 안아주곤 던전으로 돌아갔다.
춘식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던전으로 돌아가고 나자, 이현은 남은 일행들을 보았다.
이아코스, 리코스, 디르케, 나진, 그리고 민아.
첫 출발 때와 다르게 민아를 남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워터게이트]로 인해 언제든 던전에서 피를 공급할 수 있게 된 점.그리고 격의 상승을 위해서였다.
‘신을 만나면 격이 올라간다.’
이미 바다의 노인 네레우스를 만나며 이현과 나진, 리코스가 겪은 일이었다.
이번엔 한 명도 아니고 판가이온에 거주하는 다수의 신을 만날 예정이었다.
‘분명 격이 많이 오를 거다.’
이현이 민아의 격을 빨리 올리려고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포식귀 디바우러인 민아는 먹어야 하는 피의 양이 많았다.
‘지금이야 던전의 초기화로 피를 계속 공급해줄 수 있다지만.’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지구로 돌아간 다음에도 그만한 양의 피를 마셔야 한다면?
민아가 발붙일 땅은 없을지도 몰랐다.
‘민아가 이번에 승격하면 다음은 뱀피르였지.’
뱀피르는 [혈액 구속] 스킬이 뛰어나 마찬가지로 피를 마시더라도 흡수율이 높았다.
지금보다 마시는 피의 양이 훨씬 줄어들 거라고 티타니아도 보장했다.
‘대신, 그 망할 놈들이 뱀피르였지만.’
이현의 던전에 처음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몰살시킨 헌터들.
이현은 민아가 그 원수 같은 종족이 된다는 것이 불쾌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승격하는 것이 지금보다는 낫다는 것은 명백했다.
“자,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해안가에서 밀물에 떠올라 있는 배까지는 꽤 거리가 되었지만,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배 위로 뛰어올랐다.
던전의 베스트 멤버만 모아놓은 일행인지라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갈라테이아 님, 출발해 주시죠.”
뱃머리에서 이현 일행을 기다리던 갈라테이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윳빛 피부가 다시 물색 반투명한 인어로 변하면서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은 한편의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입안 한가득 마스티하의 눈물을 질겅대고 있었다는 점만 빼면.
“판가이온에는 곧 도착할 거야!”
갈라테이아의 말과 함께 네레우스의 배가 스르륵 움직이며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드디어 신들을 만나는 거네.”
“제게 이렇게 영광스러운 기회가 올 줄은 몰랐습니다.”
“리코스는 이미 만나본 적 있잖아. 나는 처음인걸?”
“삼촌, 진짜 신?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에 나오는 신들?”
기대에 가득 차 있는 이현 일행과 기절한 척 독을 품고 있는 에키드나가 판가이온으로 향했다.
* * *
높고 높은 고산준령.
산과 산이 맞닿아 장막을 이루고 5개의 봉우리가 기둥처럼 솟아 있는 곳.
가장 높은 곳엔 신성한 오색구름이 지붕이 되어 위대한 신들의 거처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신성한 신들의 장소, 판가이온.
그곳엔 사우레노르들의 행성, 에트나에서 가장 위대한 다섯 신의 권좌가 존재했다.
“오는군.”
권좌의 가장 중앙에 앉은 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 하나하나에서 필멸자로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격의 울림이 흘러나와 판가이온의 산맥을 울렸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 아버지 어머니의 형제들이여. 오랜만에 돌아올 우리의 동족과 옛집의 피조물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라.”
그의 준엄한 명령에 다른 신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명을 받들었다.
그는 신들의 제왕, 천공의 아버지, 부덕한 아버지를 내치고 판가이온의 수장이 된 자.
전쟁의 신, 아레스였다.
“그들이 과연 우리에게 재앙이 될지 축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