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72
171화
순례의 길, 수련의 길(1)
판가이온 산의 초입에는 순례자들의 마을이 있었다.
허락받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판가이온 산이었지만, 그 중턱까지는 순례자라면 누구나 출입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사우레노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순례하러 오고 싶은 곳이 바로 판가이온 산이었다.
그리고 사우레노르의 발길이 자주 닿는 곳엔 언제나 장사치들이 모이게 마련이었다.
“에잉, 요즘 사우레노르라곤 비늘 하나 보이지 않는구만.”
보잘것없는 차림새의 사우레노르 하나가 파리만 날리는 마을 입구를 보며 투덜댔다.
그는 순례자 부부가 버리고 간 아이로 이 마을에서 걸식하며 자라온 집 없는 떠돌이였다.
그가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마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안내하고 등을 벗겨 먹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벌써 열흘이나 손님 구경도 못 했다.
“어이, 오늘도 공쳤어?”
“시끄러! 걱정할 거면 병아리콩 한 주먹이라도 줘!”
“너 줄 콩이 어딨냐?”
“에이, 퉤!”
그처럼 고아로 버려져 안내꾼 노릇을 하는 동료가 킬킬대며 지나갔다.
“저 운 좋은 놈. 내가 그날 조금만 빨리 나왔어도…….”
한순간의 차이로 오랜만에 마을에 들른 순례자를 동료에게 빼앗겼다.
더군다나 그 순례자가 어딘가의 귀족 나으리인 모양이라 한몫 든든히 챙긴 듯했다.
그들에게 안내 삯으로 받은 구리 조각을 짤랑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자신의 턱 뿔을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늦잠을 잔 거지. 신들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선량하고 배곯는 놈에게 그런 복을 주실 것이지.”
한탄하던 그의 눈에 마을 근처를 지나가는 일련의 일행이 보였다.
“순례자다!”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그는 혀를 날름대며 주변을 살폈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 다들 그늘로 피한 탓에 다행히 주변에는 동료들도 없었다.
‘내가 독차지한다!’
그는 손을 흔들며 순례자들에게 달려갔다.
“순례자님들! 똘똘한 안내꾼 하나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기회를 놓칠세라 목청껏 외치며 달려가던 그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변했다.
“어? 그쪽이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순례자들은 기본적으로 마을에 들러 순례 용품을 구매하고 산을 오를 채비를 한다.
조금 가격이 비싸지만, 이 근방에서 순례 용품을 구할 곳은 순례자들의 마을밖엔 없었다.
그런데 저 일련의 순례자들은 마을에 들르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로 산으로 직행하고 있었다.
“물건 챙겨가셔야죠! 거기 막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오랜만의 호구 아니, 손님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내꾼이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어느새 순례자들은 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헉, 헉, 뭐가 저렇게 빨라?”
기묘하게 생긴 수레를 끌고 있던 순례자 일행은 마치 꼬리에 불이 붙은 황소 같은 속도로 산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길, 또 한동안 굶어야겠네.”
눈앞에서 손님을 놓친 안내꾼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주린 배를 부여잡고 마을로 돌아갔다.
“저기서 뭐라고 하는 거 같은데?”
이아코스가 멀리서 달려오는 사우레노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시선을 끌려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우리랑 상관없는 이들이야.”
“그건 그렇네요.”
리코스의 말에 이아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아코스, 바로 앉아. 그러다 다치겠어.”
“네.”
디르케의 질책에 이아코스는 수레 밖으로 빼낸 고개를 집어넣었다.
3일 전.
“이곳이 판가이온이 있는 땅.”
보름이 조금 넘는 항해 끝에, 이현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목적지인 신들이 사는 판가이온 산은 내륙에 위치했기 때문에 육로로 가야만 했다.
이현 일행은 판가이온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에 배를 정박하고 갈라테이아에게 배를 맡겼다.
“그럼 갈라테이아 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레우스의 딸이자 바다의 님페인 그녀가 함께할 수 있는 곳은 해변까지였다.
그녀의 아버지 소유인 정결의 섬에서는 그녀가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괜찮았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판가이온의 영역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극즈엉 흐즈므. 쩝쩝, 느믄 미드어!”
“적어도 입에 있는 건 삼키고 말씀해주실래요?”
입에 한가득 넣은 마스티하의 눈물을 오물거리느라 발음이 뭉개지는 그녀를 믿자니 영 신뢰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꿀꺽! 나만 믿어!”
“……믿겠습니다.”
이현은 세멜레의 감시도 함께 갈라테이아에게 맡기곤 하선했다.
부탁의 대가로 마스티하의 눈물을 잔뜩 안겨준 건 덤이었다.
“조심히 다녀와. 바다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이 있기를!”
축복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환한 얼굴은 품에 담긴 마스티하의 눈물 자루 덕분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매들인 네레이데스들도 열렬히 손을 흔들며 이현 일행을 배웅해 주었다.
“저게 그렇게 좋을까.”
냄새를 제거해줄 뿐인데 저렇게 좋아하는 게 이현으로선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누나도 냄새에 민감해요?”
“응? 냄새?”
이현이 나진에게 가서 묻자 나진의 표정이 순간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나 냄새나?”
“아뇨, 그건 아닌데…….”
그녀의 오해에 이현이 서둘러 해명하려 했지만, 이미 나진은 이현에게서 한참을 떨어진 뒤였다.
“그러고 보니 온천에 들어간 이후로 제대로 씻지도 못했네.”
“누나?”
“물티슈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빨리 씻을 만한 샘이나 강가를 찾아야겠어.”
무섭게 중얼거리며 멀어져가는 나진을 보며 이현이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게 아닌데.”
“삼촌은 섬세하지가 못해.”
그 모습을 보던 민아가 옆에서 한숨을 푹 내쉬며 혀를 찼다.
“민아야?”
이현이 울상을 지었지만, 이미 입에서 떠나간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나진과 민아의 차디찬 시선을 받으며 이현은 자전거에 올랐다.
배가 정박한 해변과 판가이온 산과의 거리는 도보로 가기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시간도 아낄 겸, 이현은 다시 자전거 수레를 꺼내 들었다.
“속도 내기엔 이것만 한 게 없지.”
이미 던전에서 이스메이아를 거쳐 옹케스토스까지 오면서 그 속도가 보장된 자전거 수레였다.
“보스, 이 기회에 수련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수련?”
수레에 여행 물자를 싣던 리코스의 말에 이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보스의 몸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까지 단련이 된 걸로 보입니다.”
“그 정도인가?”
그동안의 끊임없는 훈련과 경험으로 이현의 육체는 잘 갈고 닦여 있었다.
리코스가 보기에 이현의 몸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까지 끌어올려 진 상태였다.
“예. 그래서 이젠 그 이상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평범한 인간을 넘어서 몸을 단련하기 위해선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마치 나진의 재능처럼.
“나진은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재능을 살리면서 몸을 단련해가도 될 겁니다.”
“역시 재능이란…….”
이현은 민아와 함께 놀아주고 있는 나진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보스는 다릅니다. 보스께는 재능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육체 단련에 더 힘을 쏟아야 하죠.”
단점을 어설프게 극복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이 리코스의 교육 지론이었다.
때문에, 리코스는 이현이 어설프게 검술이나 기교를 연습하는 것보다는 육체를 한층 더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이현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전투 스킬도 얻었으니, 스킬 숙련도에 치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페르세우스의 검술]과 [용기의 걸음].이번에 이현이 얻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전투 스킬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애착이 가는 스킬인데, 아직 등급이 낮아 조금만 숙련도를 쌓아도 스킬 등급을 올리기가 쉬웠다.
그래서 이현의 마음은 체력 훈련보다는 그쪽으로 더 쏠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하지만 리코스는 단호했다.
“전투 스킬의 등급을 올리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 보스에게 제일 중요한 건 육체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리코스는 시범 삼아 창을 들고 세차게 휘둘렀다.
파르륵.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스킬에도 급이 있지만, 육체에도 급이 있기 마련입니다. 육체의 급이 올라가면 같은 스킬이라도 그 위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맞아요, 보스. 같은 창술이라도 일반 사우레노르와 승격자가 휘두르는 창은 서로 다르죠.”
옆에서 알을 돌보던 디르케마저 리코스를 거들고 나섰다.
“우선은 한계에 부딪혀 있는 보스의 육체부터 급을 올려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건데?”
이현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사실 그도 최근 자신의 훈련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가 반년이 조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해왔던 훈련과 전투들로 인해 이미 몸에 실전형 근육이 자리 잡은 이현이었다.
이젠 일과가 된 달리기나 근육 트레이닝만으로는 훈련한 느낌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보스, 전사가 가져야 할 몸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근력인가?”
“바로 하체입니다.”
“하체?”
리코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찌르건, 검을 휘두르건, 방패로 적을 막건 제일 중요한 건 하체입니다.”
하체가 중요하다는 건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현도 알고 있었다.
하체가 부실하면 몸이 흔들린다.
몸이 흔들리면 무기가 빗나가고 적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다.
리코스가 이현에게 하체 훈련을 시키려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지금까지도 하체 훈련은 해오지 않았어?”
“그걸로는 모자랍니다. 보스에겐 한계를 뚫어내는 극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의 필요성을 이현에게 설명하는 리코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넘쳐나는 리코스의 의욕에 이현이 질릴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얘 [교육] 스킬 가지고 있었지.’
훌륭한 제자를 키워내겠다는 열의에 가득 찬 리코스를 보니, 이현은 못 하겠다는 말도 꺼내기 힘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네. 그러자.”
그 결과가 모두를 수레에 태운 채 이현이 자전거로 끄는 것이었다.
“으랏차차차!”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리코스를 포함한 일행의 몸무게만 해도 300kg을 넘겼다.
거기에 무게도 늘릴 겸 수레에 가득 실어놓은 청동 주괴의 무게까지 합하면 1t이 훨씬 넘는 수준이었다.
“윽!”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던 이현은 종아리에서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사념 에너지 강화로 근력을 키우고 방어력도 올렸음에도, 버거운 무게였다.
“고통이 동반될수록 한계를 넘기 쉬워지는 법입니다.”
수레에 올라타서 입으로만 외치는 리코스의 응원에 이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냐, 한번 해보자고.”
이를 악물고 발을 내디딘 순간, 이현에게 지옥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 * *
“흥흥흥~ 참 예의 바른 인간이었어.”
갈라테이아는 이현이 잔뜩 주고 간 마스티하의 눈물을 하나씩 입에 넣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현 일행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배를 지켜주기로 한 그녀는 뱃머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걔들이 그분들 앞에서 버틸 수나 있으려나.”
갈라테이아는 판가이온의 위대한 다섯 신을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도 바다의 노인 네레우스의 딸이었지만, 위대한 다섯 신을 직접 만난 적은 손에 꼽았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의 하찮은 몸을 터뜨릴 것 같은 거대한 신격에 버티는 것도 고역이었다.
자신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필멸자인 인간과 사우레노르들은 더더욱 힘들 터였다.
“뭐,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갈라테이아는 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그녀의 성격은 필멸자의 일로 오래 고민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다 위대한 다섯 신들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호오, 그거 재밌는 소리네.”
갈라테이아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거, 나한테도 좀 알려줄래?”
피 냄새보다도 더 비릿한 웃음을 짓는 세멜레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