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73
172화
-순례의 길, 수련의 길(2)
툭, 치이익.
분명히 돛대에 묶여 있어야 할 목소리의 주인공이 온몸에서 독혈을 흘리며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어, 어떻게?”
“피를 좀 흘렸어.”
죄인을 돛대에 단단히 동여매고 있어야 할 밧줄은 독기에 삭아 모두 끊어져 있었다.
“그나저나 피를 많이 흘렸더니 어지럽네. 거의 먹지도 못했더니 몸에 힘도 하나 없고 말야.”
“너, 그 몸은……!”
온몸에 독혈이 범벅되어 있는 세멜레의 모습을 보면서 갈라테이아가 경악했다.
지구의 캠핑용 로프를 녹이기 위해서 세멜레가 쏟아야 했던 독혈은 보통 양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입안에 상처를 내어가며 피를 쏟아 밧줄을 녹인 그녀의 몸은 자신의 독에 녹아내려 만신창이였다.
“내 독인데 내가 아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 쉰 목소리로 칭얼거리는 세멜레의 눈은 고통 때문인지, 떨어진 체력 때문인지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이 갈라테이아에게 끔찍하리만큼 무서웠다.
“다가오지 마!”
“너무 그러지 마. 아픈데 바를 약도 없어. 그 인간이 다 가져갔거든.”
검은 뼈가 드러난 상처를 쓰다듬으며 세멜레가 고통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정말 승격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놈을 잡아 죽였을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세멜레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 나 이제 승격했지? 그럼 그냥 죽이면 되겠네?”
승격의 비밀 때문에 이현에게 손을 대지 못했지만, 승격한 지금은 이현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새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환하게 웃는 그녀의 웃음에 갈라테이아의 전신이 공포로 떨려왔다.
“승격? 너 설마!”
갈라테이아는 세멜레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깨끗한 해수로 이루어진 자신의 눈을 비볐다.
예언의 신인 네레우스에게 물려받은 그녀의 뛰어난 눈이 세멜레의 정보를 파악했다.
「이름 : 세멜레 에키온
종족 : 변종 에키드나(용인종)
격 : 1/1,000
스킬 : [독 숨결(C)], [독혈비술(E)], [독니(D)], [카리스마(B), [집착(S)], [채찍술(C)], [약육강식(A)], [???]」
‘맙소사.’
갈라테이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멜레가 추구해왔던 염원, 에키드나로의 승격이 완료되어 있었다.
죄인이 스스로 힘으로 탈출한 것도 모자라 승격까지 이루었다니.
거기다 갈라테이아는 알지 못했지만, 이현이 규격 외의 격으로 봉인해놨던 [독 숨결]의 봉인도 다시 풀려있었다.
‘내가 너무 방심했나 봐.’
갈라테이아가 입술을 깨물며 자책했지만, 사실 정결의 섬을 떠나기 전에 이미 세멜레는 승격을 완료한 상태였다.
이현 일행 그 누구도 세멜레의 승격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갈라테이아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이제 나는 사우레노르가 아니야. 드디어 에키드나가 됐어.”
몽롱하던 세멜레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승격했어!”
입을 한껏 벌리고 기쁨의 웃음을 터뜨리는 세멜레에게선 격한 감정과 함께 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이걸 원했는지 알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지어 저기 묶여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엔 승격밖에 없었어!”
기쁨에서 광기로. 승격에 취한 세멜레의 감정이 들쭉날쭉하며 과격한 격을 뿜어댔다.
“읏!”
반은 영적인 존재에 가까운 갈라테이아는 세멜레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격에 고통스러워했다.
‘어떻게 이런 격이!’
갈라테이아는 지독하리만큼 어둡고 무거운 세멜레의 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에키드나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멜레는 평범한 에키드나와는 달랐다.
변종 에키드나, 그리고 [집착(S)]만 보아도 세멜레의 승격은 비정상적이었다.
“그리고 신들께서 내게 응하신 거야! S급 스킬로!”
돛대에 묶여 있었으면서도 항상 염원했던 승격에의 집착.
그 [집착]이 쌓이고 쌓여 결정적인 순간 S급으로 등급이 올랐다.
“어떻게 S급을…….”
세멜레의 환호성에 갈라테이아가 탄식을 내뱉었다.
S급이란 일종의 초월을 이룬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단계였다.
수천, 수만 번의 행동이 반복되어서 스킬이 만들어지고, 그 제곱의 숙련도가 쌓여 등급이 올라간다.
S급은 일생을 스킬과 행동에 바쳐도 달성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단계였다.
그리고 그 S급을 달성한 까닭에 격이 올라 한 발짝만 남겨두던 승격을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
‘어떻게 집착이라는 감정에 그렇게 매달릴 수가 있는 거지?’
지구에서부터 에트나 행성까지.
절대 짧지 않은 생을 살아온 갈라테이아도 처음 보는 광기였다.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인생을 망친 폴리페모스도 그녀 정도는 아니었다.
“넌, 넌, 규격을 벗어난 존재야…….”
“그거 마음에 드는 말인데? 규격 외라니.”
세멜레가 만족한 듯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갈라테이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있잖아.”
“오지 마!”
“나 지금 굉장히 배가 고파.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
침일까 독혈일까.
시커멓게 변색 된 액체가 세멜레의 입에서 떨어져 갈라테이아의 몸에 닿았다.
똑, 치이익!
“아악! 아파악!”
정결한 바닷물로만 이루어진 갈라테이아의 몸에 세멜레의 체액은 최악의 독이었다.
몸이 끓어오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갈라테이아의 몸으로 독이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넌 맛있을까?”
세멜레가 입가에 흐르는 침을 삼키며 히죽 웃었다.
“안 돼!”
* * *
“크으윽!”
이현은 동틀 때부터 해 질 녘까지 10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1t이 넘는 무게의 수레와 함께한 대장정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이현의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결국 터져 버렸다.
“이현아, 약 먹자.”
나진이 서둘러 가져온 마스티하의 눈물을 먹자 고통이 가라앉았다.
덤으로 피부 밖에 정혈의 봉교 연고까지 발라주자 상처는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허벅지가 완전 딴딴한데?”
이아코스가 탈진한 이현 대신 약을 발라주면서 혀를 내둘렀다.
“수년은 뜀박질만 한 사람 다리 같아.”
근육량을 늘리기 위해선, 근육에 강한 자극을 주고 이를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이현은 1t이 넘는 수레를 자전거로 끌면서 하체에 과격한 자극을 주었고 마스티하의 눈물로 치료하길 반복해왔다.
리코스가 이 원리를 알고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어찌 보면 이상적인 훈련에 가까웠다.
‘이러다 허벅지가 허리만큼 두꺼워지겠는데.’
사념 에너지 강화로 더 강한 힘을 내고 더 오래 버틴다.
그리고 근육이 한계에 달하면 영약으로 급속도로 치유한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운동을 몇 배나 더 강하게 몇 배는 더 빠르게 하는 것과 같았다.
근육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나자 저 멀리 보이던 판가이온 산이 어느새 코앞이었다.
“보스,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셔야 합니다.”
“네가! 밟아! 보든가! 으악!”
달리는 말을 채근하는 듯한 리코스의 말에 이현이 오만상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리코스가 채근하지 않아도 덜컹대며 달리는 수레의 속도는 저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에 비할 정도로 빨랐다.
그 속도의 동력은 이현의 두 다리였다.
“으자자자잣!”
강화 스킬을 걸어 놓은 다리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페달을 밟았다.
이현이 힘껏 페달을 돌릴 때마다 일행 전부를 태운 수레는 쑥쑥 나아가고 있었다.
지난 3일간의 결과로 이현의 하반신은 사이클 선수 안 부러울 정도로 튼튼해져 있었다.
“훌륭합니다, 보스. 한계를 넘으셨군요.”
디르케가 이현의 하체를 보며 감탄을 터뜨릴 정도였다.
“이현아, 괜찮아?”
“할 만, 해요, 훅, 훅.”
이현은 3일 동안 쉬지 않고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 덕분에 걸어서 이동했다면, 쉬지 않고 일주일은 걸렸을 판가이온 산의 초입까지 올 수 있었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도착이다!”
평지가 끝나고 더는 자전거로 수레를 끌 수 없는 비탈길까지 오자 이현은 수레를 멈추었다.
그리고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3일 내내 페달을 밟았던 그의 허벅지는 이미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있었다.
“여기까지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엄격한 스승의 눈으로 이현의 하체를 훑어보던 리코스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현은 죽을 맛이었다.
“더 하라고 해도 못 해.”
“더 시킬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자전거라는 도구로 올라갈 만한 길이 아니군요.”
판가이온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지 않아 수레가 다닐 만했지만, 그 경사가 보통이 아니었다.
깎아지를 듯이 높은 판가이온 산의 봉우리로 향하는 비탈길은 걸어서 오르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저길 자전거로 끌고 가라면 그게 악마지, 누가 악마겠어?’
아무리 강화 스킬이 있다지만, 저길 자전거로 오르는 건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할 짓이었다.
“보스, 제가 전에 하체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엔 또 뭔데.”
이현이 다 죽어가는 눈빛으로 리코스를 노려보았다.
3일 내내 승용차의 속도로 달리게 해놓고선 이번엔 또 뭘 시키려는 걸까.
리코스는 이현의 매서운 눈빛에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뭐일 것 같습니까?”
짐작이 가지 않는 이현이 턱을 긁적였다.
함께 교육을 받는 입장인 나진도 미간을 좁히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코어 운동? 어, 그러니까 배랑 허리요.”
“바로 맞췄다.”
“필라테스를 좀 했었거든요. 헤헤. 그때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던 게 코어 운동이었어요.”
“훌륭한 교사로군.”
일명 코어 근육.
몸을 지탱하고 모든 운동의 기본이 되는 근육이었다.
“호흡을 다스리고 몸의 자세를 바로 세우는 것이 허리와 배입니다. 이 부위가 바르게 단련이 되고 튼튼한 하체가 받쳐준다면, 가죽 한 장을 뚫을 창이 가죽 8장을 뚫을 창이 되기도 합니다.”
리코스는 침을 튀겨가며 열과 성을 다해 코어 근육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이현은 자신이 훈련을 받는 건지 헬스 PT를 받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엔 끌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리코스가 수레를 가리키더니 다시 산비탈을 가리켰다.
“……뭐?”
아무래도 리코스 앞에서는 하데스도 울고 갈 것 같았다.
“이걸 끌고 가라고……?”
허탈한 눈으로 수레를 보는 이현의 어깨를 리코스가 두드려 주었다.
“저희는 다 내려서 걸을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현의 죽일 듯한 눈빛을 받은 탓인지 다행히도 리코스는 최악의 선택만은 하지 않았다.
이현은 리코스의 배려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주 고오맙다.”
“……별말씀을.”
그런 이현을 보며, 리코스는 차마 원래 계획은 전원이 수레에 탑승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비탈길에서 이현의 실수로 수레가 전복되면 타고 있는 이들 모두가 위험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수레에는 1t에 가까운 청동 주괴가 실려 있었다.
“이게 다 보스를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날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이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리코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훈련이 아니라 암살 시도인 것 같아서였다.
“크라쉬를 생각하시지요, 보스.”
리코스가 이현에게 곧 쳐들어올 위험을 각인시켰다.
“맞는 말이네. 내가 너무 물렀어.”
던전을 나와서 이 고생을 하는 것도 모두 크라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젠장할,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이현은 이를 악물고 자전거를 분리해낸 수레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리고 평범한 순례자들도 네발로 기어 올라갈 정도의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늙어서 깃이 다 빠져 버린,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한 부엉이 한 마리가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