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74
173화
-순례의 길, 수련의 길(3)
판가이온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은 항상 엄숙하고 고요한 순례의 길이었다.
가끔 산짐승이 출몰해서 순례자들을 위협하는 사고가 벌어지곤 했지만, 순례자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은 없었다.
이 산의 꼭대기에는 사우레노르의 위대한 다섯 신이 거처하는 신성한 신전이 있었으니까.
그 앞마당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신성한 순례자의 길을 소란스럽게 오르는 일행이 있었다.
부러진 애각창과 청동 방패를 손에 든 나진이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이현이 수련을 위해 수레를 끌고 있으니 나진도 자처해서 무게를 늘린 것이었다.
그 뒤로는 소중히 부화함을 안고 있는 디르케와 이아코스가 뒤를 따랐다.
“삼촌, 나 무겁지.”
발이 짧아 함께 걸으면 뒤처지는 민아는 이현이 끄는 수레에 올라타 있었다.
이현의 땀을 닦아주거나 물과 약을 챙겨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민아는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전혀, 안, 무거워!”
1t 무게의 수레에 20kg도 안 되는 민아의 무게가 얹어진다고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으랏차!”
“삼촌, 힘내!”
민아의 응원을 들으면서 이현이 재차 한 발을 디뎠다.
일행의 제일 후미에선 리코스가 후방을 지키며 따라오고 있었다.
“더럽게 힘드네, 진짜.”
캠핑이 취미인 이현에게 등산은 산책이자 가벼운 운동이었다.
하지만 판가이온 산의 길은 그런 이현조차 버거울 정도의 산길인 데다 수레까지 끌고 올라가려니 죽을 맛이었다.
“이현아, 저기에 평지가 있어. 저기서 조금 쉬었다 가자.”
선두에 있던 나진이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에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현만큼은 아니지만, 이 거친 산길에 다들 지쳐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먼저 가서 쉴 준비를 해놓을게.”
제일 뒤에 처진 이현과 리코스를 제외한 일행은 속도를 높여 산길 중간에 쉼터처럼 펼쳐진 공터에 도착했다.
“설악산도 이것보단 쉽겠네.”
체력에는 그나마 자신이 있던 나진에게도 버거운 산길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훈련을 해왔지만, 창과 방패까지 들고 올라오려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학, 학.”
나진마저 그러할진대, 평범한 인간인 이아코스는 거의 죽을상이었다.
바닥에 드러누워서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수준이었다.
“나진, 힘든 건 알겠지만 경계를 게을리하면 안 돼.”
들고 왔던 부화함을 소중히 내려놓은 디르케가 주변을 경계하며 나진을 타일렀다.
“디르케는 정말 체력이 대단하네요.”
“뭘 이 정도로.”
30kg이 넘는 청동 장비를 착용하고 행군을 하고 산을 넘는 사우레노르 군인 출신인 디르케였다.
그런 그녀가 이 정도 산행에 지칠 리가 없었다.
“보스와 리코스가 오기 전에 주변을 정찰하고 쉴 준비를 하자.”
“네.”
지쳐 쓰러진 이아코스와 짐을 내버려 두고 나진과 디르케는 주변을 살폈다.
“여긴 순례자들이 머물렀다 가는 곳인가 봐요.”
공터 곳곳에 돌을 쪼아 만든 신상과 공물이 놓여 있었다.
“이상해.”
“뭐가요?”
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상이라고 해봤자, 산길에 놓여 있는 돌탑 수준이라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는 길이 없어.”
“어? 정말이네요?”
디르케의 지적에 나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공터로 올라오는 길만 있지, 공터를 벗어나 위로 올라가는 길이 존재하질 않았다.
“지금 보니 저 신상들…….”
얼핏 보면 무작위로 놓인 것 같았지만, 신상들은 공터 주위를 빙 둘러싸며 일종의 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 공터에서 더 나가지 말라는,
“결계 같아.”
나진이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디르케의 표정도 심각해져 있었다.
“으아! 도착했다!”
그때, 드디어 도착했는지, 이현의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크윽, 결국 해냈어. 장하다, 도이현!”
돌부리에 바퀴가 걸려 수레가 기울고, 수레의 무게에 바닥이 무너져 전복할 뻔한 위기가 몇 차례.
이현은 그 모든 걸 극복하고 수레를 끌고 올라온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고생하셨습니다, 보스.”
쿵!
직경 2m짜리 바윗돌을 등에 짊어지고 온 리코스가 도착할 때까진 말이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깐 하나도 고생하지 않은 거 같은데.”
이현이 질렸다는 눈으로 바위를 들고 있는 리코스를 바라보았다.
리코스의 키보다 살짝 작은 큰 그 바위의 무게는 대략 가늠해도 5t은 넘어 보였다.
“제겐 이것도 큰 훈련이 되지 않습니다.”
이현의 말에 리코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위를 내려놓았다.
이미 죽은 언데드의 몸은 이현처럼 훈련을 통해 근육이 강화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리코스가 돌을 들고 온 것은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다.
‘내가 자만했다.’
좀비 로드라는 승격을 이루면서 리코스는 내심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원래도 강한 전사였지만, 언데드의 강한 육체와 높은 격을 얻은 후론 누구도 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랬다.
생전에는 비슷한 실력이었던 디르케도, 이스메이아의 숨은 실력자들이라는 에키온 가문의 전사들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방심이 화를 불렀다.
‘내가 더 강했으면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지진 않았을 거다.’
으드득, 리코스의 손가락이 잡고 있던 바위를 으스러뜨리며 파고들었다.
세멜레에게 패배한 건 굴욕적이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그녀에게 당했다.
알을 빼앗길 때 한 번, 독에 당해서 한 번.
에키온 가문의 가주인 데다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지만, 사우레노르에게 당하다니.
자신을 믿고 데려가 준 이현의 기대에 어긋나는 추태였다.
“그렇게까지 생각 안 해도 되는데.”
이현이 보기엔 리코스가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았지만,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었다.
‘또 모르지. 저 수련으로 진짜 더 강해질지도.’
이현은 지구의 옛 신화 하나를 떠올렸다.
시시포스.
신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산 정상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은 자.
끊임없이 반복되는 벌이었지만, 오히려 그 벌의 악명으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진짜 꼭대기까지 저 바위를 들고 올라가면 업적은 몰라도 격은 오르지 않을까?’
이곳은 던전 안은 아니었지만, 시시포스에게 그 형벌을 내렸던 신들이 존재하는 산이었으니 혹시 모를 일이었다.
“리코스, 시시포스라고 알아?”
“그게 누굽니까?”
이현이 리코스에게 시시포스의 전설을 이야기해주고 있을 때였다.
나진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누나?”
“이현아, 여기 뭔가 이상해.”
나진은 디르케와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을 이현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현도 의구심으로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같이 살펴보죠.”
이현은 리코스에게 짐을, 민아에게 이아코스를 맡기고 나진과 공터의 끝으로 향했다.
“확실히 길이 없네요.”
“그렇지? 그리고 신상의 위치가 이상해.”
나진이 미리 살펴본 대로 공터는 사방이 신상으로 막혀 있었다.
“아무래도 순례자에게 허락된 길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공터 밖을 살피고 온 디르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상의 밖으로는 누군가 나간 흔적도 없었어요. 순례자들은 여기서 공물을 바치고 다시 내려갔을 겁니다.”
“흠, 그건 곤란한데.”
디르케의 말에 이현의 시름이 깊어졌다.
순례자들이야 여기 있는 신상에 공물만 바치고 내려가도 된다지만, 이현 일행은 더 올라가야 했다.
갈라테이아의 말에 의하면 신들이 거처한다는 판가이온 신전은 산의 정상에 있었으니까.
“길도 없이 산을 타야 하나?”
위험한 일이었지만, 정 방법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신상은 누구를 묘사한 걸까?”
“글쎄요.”
나진의 물음에 이현이 지구에서의 지식을 떠올리며 신상을 살폈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사우레노르 즉, 도마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상들이라 신의 특징을 잡기 어려웠다.
결국엔 알아내기를 포기한 이현이 디르케를 보았지만, 막상 그녀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제가 봐온 신상 중에 이런 품질의 신상은 없어서……. 죄송합니다.”
디르케가 멋쩍게 웃었다.
이스메이아의 5대 가문 출신인 그녀가 봐왔던 신상은 이런 조악한 것들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대리석으로 조각해 채색까지 끝내 마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예술작품을 선호했다.
결국, 이현은 리코스를 불러 신상의 정체를 물었다.
디르케보다 종교에 더 신실했던 건 아니지만, 서민에 가까웠던 리코스는 신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전사이신 아레스이시군요. 이건 가정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헤스티아, 이건 여행자와 도둑을 가호하는 헤르메스, 청동을 두드리는 헤파이스토스, 지하에서 망자들을 초대하는 하데스이십니다.”
리코스에게 신들의 이름을 들은 이현과 나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분들이 판가이온에 거처하시는 위대한 다섯 신입니다.”
“우리가 곧 만나야 할 대상들이란 소리군.”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현! 여기 와 봐! 이상한 게 있어!”
어느새 기력을 회복했는지 이아코스가 소리쳐 이현을 불렀다.
이현이 다가가 보니 이아코스가 신상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 이 신상들 좀 봐. 얼굴이 뭉개져 있어.”
“정말이네?”
이현이 눈을 크게 떴다.
이아코스가 가리킨 신상들은 한눈에 봐도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자연적인 풍화 현상으로는 생기지 않는 흔적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불경한 일을……!”
리코스와 디르케가 신성모독이라는 천인공노할 일에 뿔을 잔뜩 드러내며 분노했다.
순례자들이 돌로 쪼아 대충 만든 신상이긴 하지만, 신상은 신상이었다.
“어? 이거 제우스인데?”
그때, 훼손된 신상을 살피던 이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신들의 특징은 잘 몰라도 손에 번개를 쥐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제우스였다.
“이현아, 이건 포세이돈 같아.”
나진이 가리킨 신상은 삼지창을 쥐고 있었다.
“이건 아폴론, 그럼 이건 아르테미스인가? 이건 곡물을 들고 있으니 데메테르인 것 같고.”
“이건 누가 봐도 아프로디테겠다.”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신의 신상을 가리키며 나진이 피식 웃었다.
“처음 듣는 신들의 이름이군요.”
신상의 훼손에 분개했던 디르케는 이현이 열거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망난 옛 신 제우스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리코스가 얼굴을 잔뜩 굳혔다.
“아주 불경한 신입니다. 패악을 부리다가 아레스에게 패해 신좌에서 쫓겨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레우스 님도 제우스를 미워하시던 눈치였지.”
이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와는 상황이 다른데?’
이현과 나진이 알아낸 신상들의 특징은 얼굴이 훼손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모습이네.”
“그러게요. 얼굴이 훼손된 신상들만 다 인간의 모습이에요.”
위대한 다섯 신은 사우레노르 모습에 멀쩡한 상태였지만, 나머지 신들은 인간의 모습에 훼손당해 있었다.
‘하필 훼손당한 신들이 네레우스가 욕하던 그 신들이란 말이지. 우연일까?’
지구에서와 같은 이름에 같은 신들이었지만, 이 행성에서 받는 대우들은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었다.
“대체 신들이 이 행성으로 옮겨온 다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답을 알고 싶으냐.]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 잠깐?”
이건 대체 누구 목소리지?
신성한 신격이 깃든 목소리가 홰치는 소리와 함께 공터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약속된 이들을 위대한 신들의 거처로 이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