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8
17화
-던전 표류(3)
부끄러움을 삭이고 이현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죠. 저 던전 도우미가 말한 대로 제가 이 던전의 보스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고요했다.
티타니아의 등장으로 놀라긴 했지만, 다들 긴가민가한 눈으로 이현을 볼 뿐이었다.
“그거 홀로그램이나 그런 거 아냐?”
PD라고 불렸던 남자가 안경을 추스르며 이의를 제기했다.
“뭐? 말이 짧다?”
티타니아가 발끈하며 주먹을 치켜들자, PD는 움찔하며 물러섰다.
‘이래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겠네.’
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여기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란 걸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티타니아, 빙의해.”
“넵!”
이현이 부러진 도끼를 집어 들자 티타니아가 포로롱 날아와서 도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일순간에 빛을 내며 대형 투척 도끼가 생겨나자 사람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래도 안 믿으시겠습니까?”
“소, 속임수일 게 뻔하잖아!”
“더 보여드리죠.”
이현이 힘껏 던진 도끼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공원에 심어진 나무의 가지를 서걱 베어 버렸다.
“도, 돌아온다!”
스스로 돌아와 이현의 손에 잡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제야 이현의 말을 믿게 되었다.
“진짜 돔 아니, 던전인가 봐.”
“우리도 갇힌 거야?”
이현은 자신의 말보다 변해 버린 도끼에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게 영 떨떠름했지만, 그래도 차분히 던전에 대한 설명을 모두에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돔 안이고, 동시에 던전이란 소립니까?”
“네.”
PD가 물어오자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저렇게 보이는 데도요?”
“저 하늘도 모두 던전이 구현화 한 겁니다. 바깥에서 보면 여러분이 부르는 돔이란 걸로 보이겠죠.”
“겠죠? 정확하지 않은 겁니까?”
PD가 불안해하며 묻자 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돔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6일 전에 강원도 캠핑장에서 던전에 휘말렸어요.”
“아, 그 최초 실종자 중 한 명…….”
이현을 비롯한 던전에 휘말린 사람들의 실종 사실은 뉴스로 알려진 모양이었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현은 그 소식을 들었을 부모님이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강원도라니, 그게 말이 돼? 여긴 서울이야!……요.”
티타니아가 째려보자 아까까지 소리를 질러대던 나이 든 남자가 급히 말끝에 요를 붙였다.
이현은 캠핑장 방향을 가리켰다.
“이 방향으로 십여 분만 걸어가도 강원도에 있는 캠핑장이 나옵니다.”
그 거리라면 원래 궁동공원이 끝나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방향을 보았다.
“돔끼리 연결됐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거기로 가시면 제가 보호해 드릴 겁니다.”
이현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아직 당황해서 그런 거라 여긴 이현은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나진이 용기를 내어 이현에게 질문을 해왔다.
“보호라면, 누구로부터 보호해주신다는 거죠?”
“헌터입니다.”
“헌터요? 그게 누군데요?”
이현은 사람들을 죽 둘러본 뒤, 입술을 깨물었다.
‘다들 패닉에 빠지겠지만, 다들 알아야 하는 사실이야.’
헌터의 존재를 말해주면 혼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하지만 미리 말해줘서 위험에 대해 방비를 시켜야 했다.
그리고 살짝 공포에 질린 편이 자신의 지시에 잘 따를 거란 계산도 이현의 머릿속에 있었다.
“헌터란, 던전 밖에서 침입해오는 사냥꾼들입니다. 사냥감은 우리구요.”
“우리요?!”
이현의 예상대로 사람들은 금세 공황에 빠졌다.
이현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네. 그들에게 우리는 몬스터이자 돈벌이 수단입니다. 인간을 죽여서 피와 내장을 빼갑니다.”
“그건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영화도 아니고…….”
PD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해왔다.
이현은 조용히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상황은 영화 촬영인가요? 제 도끼가 날아다니는 것도요?”
“그건…….”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던전에 들어와 사람들을 죽여요. 그리고…….”
이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현이 말을 중단하자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현은 겨우 입을 다시 열었다.
“……저와 함께 갇혔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생존자예요.”
사람들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보다도 더 큰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까 무시한 걸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배우 고재성입니다.”
정적을 깨고 재성이 굳은 얼굴로 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풀리진 않았지만, 정중히 사과하는 그의 태도에 이현은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이현이 사과를 받아주자 다행이라는 듯 재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매력적이라 이현은 저도 모르게 미움도 풀리는 것 같았다.
“저희를 어떻게 지키실 수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현은 간단히 던전 보스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해주었다.
모든 것을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정도는 말했다.
거기에 티타니아로 몇 가지 묘기를 보여주자 이제는 다들 이현의 말을 단단히 믿는 눈치였다.
“그…… 던전 보스는 저도 할 수 있는 겁니까?”
순간 재성의 눈 속에 탐욕의 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계약으로 보스가 된 거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아… 아쉽군요. 저도 그런 힘을 쓸 수 있었다면 도움이 됐을 텐데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이현은 별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믿었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제 다 함께 저쪽으로 이동하시면…….”
“꼭 그리로 가야 하는 건가요?”
재성이 이현의 말을 도중에 끊고 질문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씀을 들어보니 던전의 게이트에서 여기가 더 멀고, 안전한 것 같군요. 거기다 여기엔 체육관과 매점이 있어서 숙식도 편합니다.”
재성이 가리킨 것은 3층 건물이었다.
1층은 체육관, 2층은 매점과 샤워실, 3층은 사무실이 있는 공원 관리소였다.
“이곳이 더 좋은 데 굳이 그곳으로 가야 할까요?”
“그건…….”
이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현이 그들을 캠핑장으로 데려가려 했던 것은 언데드 병력과 동굴의 존재 때문이었다.
헌터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언데드 몬스터들이 있으면 보호가 쉬울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 사람들에게 말하기엔 일러.’
언데드 몬스터의 존재를 알게 되면 과연 그들이 자신의 말에 따를까?
게다가 그 언데드 몬스터들이 과거에 자신들과 같은 한국 사람이었다면?
이현의 침묵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점점 재성의 의견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텐트들도 다 이리로 가져오면 되겠네.”
“그 위험한 곳으로 꼭 가야 해요?”
“여기서 지켜주시면 되잖아요.”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하기 시작하자 재성은 더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이현을 보았다.
“이현 씨가 던전 보스시라지만, 민주적인 의미로 보스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이런 중요한 일은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정해야죠.”
마치 자신이 그 민주적인 의미의 지도자라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가 이현에게 거슬렸다.
‘나는 분명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온 거였는데?’
자신이 보스 노릇을 하겠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분위기는 점점 이현이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치 이현이 독재자인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당장은 말씀 못 드리지만, 저쪽으로 가면 더 안전할 겁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여기가 더 안전하지 않습니까? 왜 꼭 굳이 그곳을 고집하시는 거죠?”
재성이 말을 마치자마자 사람들이 ‘맞다!’를 외쳐대며 이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참 뻔뻔하네요.”
티타니아가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이현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려고 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격이라니.
“혹시 이곳에 탐나는 물건이 있으신 건 아닙니까?”
“네?”
이현이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보자 재성은 매점이 있는 건물을 쳐다보았다.
“제가 이번에 생존 영화를 찍었죠. 거기서 배운 건 식량 확보가 우선이란 겁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저희를 그쪽으로 옮긴 후에 이 매점의 식량을 독차지하려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그는 지금 일부러 이현을 강도로 몰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주도권은 내가 잡아야 한다.’
그는 남 밑에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현이 말도 안 되는 초능력을 보여줬지만, 그가 보기에 남 위에 설만 한 재목은 아니었다.
‘초장에 기를 팍 꺾어서 내 부하로 삼으면 된다. 저 능력은 확실히 쓸모가 있어 보이니까.’
잘생긴 외모와 목소리, 그리고 그의 평판은 여론을 끌어모을 최적의 수단이었다.
아마 그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게 되리라고 재성은 자신했다.
“이봐요. 캠핑장에도 식량은 많아요. 제가 왜 매점까지…….”
“모르는 일이죠. 식량은 한정되어 있을 테니까요.”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건 이현도 고민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이현이 입을 다물자 재성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공세를 이어나갔다.
“이것 보시죠. 왜 대답을 안 하시죠?”
“고재성 씨, 그건 너무 앞서 나가신 거 아닌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나진이 나서서 말했다.
첫인상이 그녀에게 좀 못나 보이긴 했지만, 나진은 이현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재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진 씨가 마음이 여려서 그래요. 생존 상황에선 항상 모든 걸 경계해야 합니다.”
자기 멋대로 자신을 여린 사람으로 판단하는 그의 말에 나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작 영화 하나 찍었다고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네?’
나진이 울컥해서 나서려는 순간, 재성의 입에서 폭탄이 튀어나왔다.
“사실, 살아있던 사람들도 그쪽이 죽인 거 아닙니까? 먹을 입을 줄이려고?”
“고재성 씨!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나진이 놀라서 그를 질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뚝.
이현의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이현의 입가에 아주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뭐라고 했냐?”
이현의 말투가 바뀌자 재성이 움찔했다.
“아니, 나는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뿐,”
“입 닥쳐.”
“뭐?”
자신한테 함부로 말하는 이현에게 재성이 발끈했다.
하지만 이현의 눈을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사람 눈 맞아?’
가만있어도 무서운 눈이었는데, 이현이 차갑게 화를 내고 있으니 마치 맹수의 눈처럼 바뀌어 있었다.
“당신들 의견은 잘 알겠어.”
으스러지게 악다문 이현의 잇새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던전 보스로서 맹세하지. 당신들 중 여기 남아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구하겠어.”
이현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심지어 재성마저도 아차 싶었던 듯 급히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내, 내가 말이 좀 심했습니다.”
“닥치라고 했다.”
이현의 눈이 그를 향하자 재성은 입을 다물었다.
이현은 차가운 눈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캠핑장으로 넘어와. 그 사람들은 지켜준다. 단, 너 빼고.”
도끼로 재성을 찍은 뒤, 이현은 입술을 비틀었다.
“넌 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 먹을 게 모자란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르잖아?”
재성은 이현의 위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이현 씨, 잠시만요!”
나진이 그를 소리쳐 불렀지만, 이현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