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234
233화
– 감염종의 행성(5)
“미안해.”
사람들이 흩어지고 기절한 중년 여성까지 숙소로 올려보낸 후, 나진이 이현에게 사과를 해왔다.
“내가 못 미더워서 나선 거지?”
폭력과 강압이 아니라 대화와 논리로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통하질 않았다.
나진은 어두운 안색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현은 그런 나진에게 고개를 저으며 히죽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그렇게 과격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 원래 네 성격도 그러지 않고.”
이현이 아무리 필요할 땐 칼 같더라도 기본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나진은 알고 있었다.
그런 이현이 격까지 사용해서 사람들을 압박하면서 그들을 위협한 건 본인이 잘못한 탓이리라.
“그렇게 생각할 거 없어요. 누나는 잘해주었어요. 진심이에요.”
이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웅덩이를 흐리는 미꾸라지가 한 마리 있었을 뿐이었다.
“누나는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그런 방해꾼은 제가 정리할게요.”
“이현아…….”
“어차피 이제 격이 올라서 예전처럼 친근하게 대하기도 어려운걸요.”
이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현의 격이 5성이 되면서 격이 없다시피 한 일반인들은 이현과 한자리에 있는 것도 힘겨워했다.
기존의 이현을 알고 있는 공원 사람들마저도 그를 어려워하는 편이었고, 격이 높은 나진 정도가 이현을 평범하게 대할 수 있었다.
‘가장 고생하는 건 이현인데…….’
그런 이현이 제일 미움받는 역할이라니. 나진이 복잡한 표정이 되어 이현을 바라보았다.
“하하, 진짜 괜찮은데.”
이현이 볼을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너스레가 아니라 진짜로 괜찮아서 하는 말이었다.
사실 이현에게 새로 생긴 500명은 짐이나 다름없었다.
이현에게는 그런 사람들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같이 고생하며 전장을 헤쳐온 동료들이 더 중요했다.
“그렇다고 버리진 말구요.”
“누가 버린대? 그냥 관리만 하겠다는 거지.”
이현이 티타니아의 핀잔에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곤 분위기를 전환할 겸 환하게 웃으며 나진의 손을 잡고 끌었다.
“따라와요. 누나가 좋아할 만한 게 있어요.”
“어? 그게 뭔데?”
“보면 알아요.”
이현은 히죽 웃으며 나진을 끌고 히든 던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곳엔 이현을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이 있었다.
“고블린!”
녹색 피부를 확인한 나진의 창이 쏜살같이 뻗어 나갔다.
* * *
“쳇, 현은 왜 저런 거랑 나를 같이 두는 거야. 안 그래도 만들 넥타르랑 암브로시아가 산더민데.”
이현은 비밀 유지를 위해 맥도일을 히든 게이트가 있는 방이 아닌 다른 방에 이아코스와 함께 대기시켰다.
덕분에 벌레 신의 종자들이 남긴 역병 포자에 감염된 종족이랑 같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이아코스는 불만이 가득했다.
반면, 맥도일의 눈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이게 대체 뭐지?”
지구인에게는 단순한 사무실이었다.
그것도 구형 컴퓨터와 책상, 그리고 사무 문구가 전부인 초라한 관리인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증기 엔진 기술자인 맥도일에게 이곳은 미래의 기술이 집약된 최첨단 공간이었다.
“이, 이건 전기 등불인가? 그런데 백열전구가 아니네?”
그의 세계에서도 전등은 있었다.
마석 엔진으로 전기를 사용하는 도구들이 발명되기 시작했는데, 백열전구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백열전구보다 더 밝으면서도 눈이 시리지 않은 LED 전등을 보며 맥도일이 놀라워했다.
그 외에도 간단하고도 편리한 사무 용구들을 보며 계속해서 감탄을 터뜨리기 바빴다.
“저게 뭐라고 저렇게 신기해하는 거람.”
반면, 지구에선 고대 문명에 가까운 에트나 행성에서 온 이아코스는 흥미가 없다는 듯 하품을 해댔다.
과학 기술의 차이가 너무 커서 이아코스에겐 그 대단함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신기하긴 했지만, 지구의 현대 기술은 이아코스에겐 기적과 비슷한 취급이었다.
“어? 현 나왔다.”
이현과 나진이 히든 던전의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을 감지한 이아코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루해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이아코스를 보며 맥도일이 목을 움츠렸다.
‘그 악마 아니, 보스가 왔나 보다.’
그가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자, 곧 그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이현과 나진이었다.
‘와, 인간 여자다.’
나진을 발견한 맥도일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께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실 거야. 인간 남자와 인간 여자를 모두 보게 되다니.’
고블린과 인간의 심미관은 달랐지만, 나진의 미모와 매끄러운 피부는 그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고블린!”
맥도일을 발견한 나진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바로 등에 메고 있던 창을 꺼내 들었다.
“어? 어?”
그리고 맥도일이 반응할 새도 없이 바로 쏜살같이 창을 내질러 왔다.
‘주, 죽는다?!’
눈앞에 시퍼런 기운이 맺힌 창날이 쇄도해오자 맥도일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맥도일의 얼굴이 나진의 창날에 꿰뚫리는 일은 없었다.
“휴, 나진 아가씨. 위험하잖아.”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이아코스의 목소리만 들리자 맥도일이 살짝 실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솔방울이 달린 지팡이가 그의 얼굴 앞에서 나진의 창날을 막아내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는 나진의 창을 이현이 잡아당겨 뺀 다음 그녀를 진정시켰다.
“누나, 적이 아니에요.”
“어? 아냐?”
“네, 아니에요. 이아코스, 막아줘서 고마워.”
“헤헤, 뭘 이런 걸 가지고.”
이현의 감사에 이아코스가 해맑게 웃으며 솔방울 지팡이 티르소스를 흔들었다.
그래서 그가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는 오로지 맥도일만 들었다.
“사실 그냥 죽게 놔둘까도 했는데 말이지.”
이 던전에 들어온 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의 목숨에 맥도일은 울고만 싶었다.
이현은 나진에게 맥도일과 이번에 던전에 연결된 세계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쳐들어올 헌터들이 고블린이라는 거야?”
“고블린, 오크, 오거, 트롤이 함께 사는 행성이래요.”
이현의 대답에 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전부 꽤 센 종족들이잖아.”
크라쉬의 던전에 속해 있던 몬스터들을 생각하면 쉽게 볼 이들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네.”
나진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기세를 다졌다.
그동안 춘잠토심결로 내공을 정순하게 쌓아온 그녀의 눈빛은 마치 반딧불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나진을 보며 이현이 멋쩍게 웃었다.
“저기, 그게 말이죠. 전투는 없을 거예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현의 말에 나진의 화르르 피어오르던 기세가 뚝 꺾였다.
나진이 황당해하자 이현은 맥도일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가 대답해 봐.”
“네, 넵!”
보기만 해도 두려운 던전 보스 이현과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이아코스에 이어 매서운 나진의 눈빛까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맥도일은 기합이 바짝 들어가 대답했다.
“저희는 던전을 공략하지 않습니다!”
“뭐?”
나진이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던전을 공략하지 않는다니?
“저희는 던전과 거래를 합니다. 던전에 저희 상품을 팔고, 대가로 마석을 받습니다.”
“마석?”
“이걸 말하는 거예요.”
나진이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현이 사념 에너지 결정을 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사념 에너지 결정을 대량으로 내보내서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는 모양이에요.”
“그럼 뭐야? 안 싸우는 거야?”
나진이 혼란스러운 듯 묻자 맥도일이 소리높여 대답했다.
“넵! 저희는 던전과 싸우지 않습니다!”
“쉬어가는 단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파밍 하는 단계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전투는 없을 거래요.”
이현이 피식 웃으며 맥도일의 대답에 덧붙여 말했다.
“나쁘진 않아 보이죠?”
이현이 말한 나진이 좋아할 만한 것은 바로 한동안 전투가 없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 * *
행성 스카라반은 한때 거인과 소인, 그리고 요정과 인간이 어우러져 살던 행성이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 즉, 오르쿠스 스포라로 인해 네 종족은 본래의 형태를 잃고 감염종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니까 너희가 원래는 소인이었다는 거지?”
“전설에 따르면요. 하지만 저도 그 전설이 진짜일 줄은 몰랐어요.”
이현의 성채, 화이트 캐슬의 식당에 이현과 주요 간부들이 모여서 맥도일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요 간부란 나진, 리코스, 디르케, 이아코스, 그리고 티타니아였다.
“그냥 어린애들을 놀리기 위한 동화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니…….”
정작 이현 일행보다 티타니아에게 역병 포자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된 맥도일이 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인간이 변한 게 오크라니.”
이현이 쩝, 씁쓸해진 입맛을 다셨다.
“난 트롤이 원래 요정이었다는 게 더 충격적이야.”
나진이 마치 환상이 깨진 아이처럼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역병 포자에 감염된 네 종족은 각각 거인이 오거, 소인이 고블린, 인간이 오크, 요정은 트롤로 변했다고 했다.
반면 리코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 오크와 싸워봤지만, 인간과 유사한 면이 분명 있긴 했습니다.”
“그래? 어디가?”
“저돌적이라든가, 성질을 잘 못 참는다든가…….”
“야, 그거 인종차별 아니, 종족차별이거든?”
“아, 보스나 나진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이현이 그를 살짝 째려보자 리코스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디르케가 웃음을 터뜨렸다.
“페르세우스야, 아빠가 또 멍청한 짓을 했대요.”
“꺄하!”
디르케의 무릎에 앉혀져 있는 사우레노르 아이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알에서 깨어난 지 갓 한 달이 된 리코스와 디르케의 아이였다.
“맘마!”
“그래, 그래. 이거 먹자.”
석양빛을 닮은 오렌지색 비늘이 매끄러운 아기 페르세우스는 사우레노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귀여웠다.
나진이 식사 내내 눈을 떼기 힘들어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귀여움과는 반대로 아이가 집어삼키는 건 거대한 스테이크 덩어리였다.
“왁! 왁! 꺄아~.”
“보스가 해주신 스테이크가 마음에 드나 봐요.”
디르케가 먹성 좋은 페르세우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현 역시 흐뭇하게 페르세우스를 바라보며 코를 쓱 문질렀다.
“좋아해 주니 다행이네. 신경 써서 연한 부위로 골라 구웠어.”
사우레노르의 아이들은 육식만 했다.
그래서 이현이 특별히 신경을 쓴 건데 아이가 좋아해 주는 모습에 이현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저 던전 보스가 저런 표정을 지어? 거기다 요리를 했다고?’
악마 장군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무서웠던 이현의 색다른 모습에 맥도일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먹고 있는 스테이크도 맛이 끝내주게 좋았다.
예전 부유했던 작은할아버지의 개인 요리사가 종종 해주던 것보다도 더.
“서, 설마 이것도……?”
“입에 안 맞나? 나름 그것도 신경 써서 구운 건데.”
“아, 아닙니다. 정말로 맛있습니다!”
겁에 질려 대답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맛있어하는 것이 눈에 보여 이현은 피식 웃었다.
“그럼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았으니, 보답해야겠지?”
“보, 보답이요?”
당황해하는 맥도일에게 이현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은혜 하나에 대가 하나. 원한 하나에 목숨 하나. 받아들이겠어?”
이현의 말에 맥도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목이 떨어지겠지.’
맥도일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맥도일을 보며 이현이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웠다.
“거래 알선을 좀 해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