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320
319화
-전후처리(3)
“마, 말할게!”
이경의 정신은 빠르게 무너져 버렸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당당함과 자존심은 모두 힘에서 나온 것.
그 힘을 봉인 당한 채로 겪는 끔찍한 고통은 그녀를 다시 예전의 연약한 인간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녀는 이현이 다시 고통을 줄까 봐 사시나무 떨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결국, 그녀도 힘에 취한 소인배나 다름없었네요.”
티타니아가 경멸을 담아 이경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힘을 가지면 영웅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힘에 취해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정의라고 믿는 망상을 휘두를 뿐.
이현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이경에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한 영웅은 힘을 얻기 전에도 영웅이었지.”
연약한 약골에 불과했던 그가 영웅심만으로 강화 인간 시술을 받아 미국을 상징하는 영웅이 된 건 유명한 이야기.
“넌 힘이 없어지니 그저 비참하게 구는구나.”
“미, 미안해. 내가 자, 잘못했어. 아니,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이현은 그녀가 눈물 콧물을 짜내며 비는 모습을 보니 더 괴롭힐 마음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에겐 알려줘야 할 게 있었다.
이현은 사슬째로 그녀를 추모비 앞으로 끌고 갔다.
“아아악!”
이경이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를 무시한 채로 이현은 그녀를 추모비 앞에 세웠다.
그리고 추모비에 붙어 있는 사진들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네가 그 힘에 취해서 망나니짓을 하는 바람에 죽어 버린 이들이야. 똑똑히 봐 둬.”
150명의 사진. 모두 생전의 해맑게 웃고 있던 사진들이었다.
누군가는 벚꽃 아래 연인과 찍은 사진, 누군가는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그런 이들의 삶이 이경의 패악질로 한순간에 사라졌다.
“내, 내가…… 이랬다고?”
“자각도 없었나. 정말 답이 없구나.”
사진을 보는 이경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현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내가… 아니야, 내가 정말로?”
이경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깨닫고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현은 그런 이경의 얼굴을 추모비 앞 바닥에 박아 버렸다.
“그전에 희생자들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
“자, 잘못했어요.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다 제 탓입니다. 어허엉.”
이현에 대한 공포와 밀려오는 죄책감, 그리고 고통에 못 이겨 이경이 통곡했다.
이현은 그녀를 울게 놔둔 채 추모비를 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이래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벌레 신의 사기에 물들어 죽은 이들은 던전에 흡수되지도 못하고 그냥 소멸한다.
[망자의 땅]에서 언데드로 부활시키지도 못했다.즉, 이경의 사과를 들을 피해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이현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이현이 추모비 앞에서 빌고 있는 이경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쇠사슬을 힘껏 움켜쥐었다.
“컥!”
“네가 저지른 죄의 대가는 달게 받아야지.”
“제, 제발!”
간절히 비는 이경을 내려다보는 이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티타니아.”
“네, 주인님.”
“이거 끌고 가서 던전수에 비료로 줘.”
이현이 쇠사슬의 끝을 티타니아에게 넘기며 진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산 채로.”
“안 돼!”
이현의 말에 이경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 갈까요? 이 던전의 피와 살이 되는 거니깐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요.”
“아아악! 이럴 순 없어!”
티타니아에게 끌려가는 이경의 비명이 사라질 때까지, 이현은 묵묵히 추모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이경을 산 채로 던전수 뿌리 밑에 묻은 뒤, 이현은 곧장 티타니아와 함께 뉴가텀으로 향했다.
던전 밖으로 나온 티타니아가 헤실헤실 웃었다.
“이제야 주인님이랑 함께 다닐 수 있네요.”
“무슨 소리야? 전에도 몇 번 나왔었잖아?”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현이 잠깐씩이지만 그녀가 던전 밖에 나왔던 일들을 지적하자 티타니아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꾸물대지 말고 뒤에 타기나 해.”
그러거나 말거나 이현은 릭에게 받은 증기 엔진 오토바이에 올라타며 티타니아를 재촉했다.
도로가 아직 건물의 잔해로 엉망진창이라서 자동차는 다닐 수 없는 길이 대부분이었다.
티타니아가 뒤에 타자 이현은 스로틀을 강하게 당겼다.
부르릉! 치이익!
증기 엔진 특유의 배기음과 엔진 소리가 들리며 오토바이가 도로를 내달렸다.
“주인님, 면허는 있어요?”
“너나 나나 넘어져도 다치진 않잖아?”
“넘어지기만 해봐요!”
이현은 겁이 나서 자신의 허리를 꽉 감아오는 티타니아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게 이현이 티타니아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뉴가텀의 외곽이었다.
“저기네.”
한때 창고였던 건물의 잔해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곳에 검붉은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성이경이 도망쳤던 그녀의 던전 게이트였다.
“지금은 들어갈 수 있으려나?”
지난번엔 이현 일행에게 호되게 당한 이경이 던전으로 도망가면서 게이트를 닫아놓았기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도 입장이 불가능하다면 게이트를 강제로 열 수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는 듯했다.
“열려 있는데요?”
던전 게이트를 유심히 살펴보던 티타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확히는 누가 강제로 비집고 들어가서 자물쇠가 고장 났다는 비유가 맞겠네요.”
“성이경 말고 다른 침입자가 있다는 소리야?”
이현이 티타니아의 설명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경에게 들었던 설명에 의하면 뉴가텀이 권속으로 뒤덮이고 그녀가 빠져나오기 전까지 던전에 침입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쟁통에 권속 몇몇이 침입했나? 아니면 다른 생존자들?’
이현은 이경을 묶고 있는 [판타소스의 꿈] 대신 들고 온 스팀건을 점검했다.
상정했던 것 외의 전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런 이현을 보며 티타니아가 살짝 긴장한 채로 물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들어가자.”
이현은 스팀건을 들고 던전 게이트로 발을 들여놓았다.
검은 소용돌이 속을 통과하는 이현의 몸을 기묘한 감각이 덮쳐왔다.
‘그러고 보니 다른 던전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네.’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었지만, 이경의 던전이라고 딱히 다른 것은 없었다.
이현은 평범하게 자신의 던전 게이트를 드나들 듯 이경의 던전으로 입장했다.
“당장 보이는 적은 없나?”
이현은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스팀건으로 사주를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적의 모습은 없었다.
“공기는 당연히 괜찮고.”
당연히 지구의 공기이니 이현에게 문제 될 게 없었다.
“정말로 천남 경찰서 부근이네.”
오랜만에 보는 서울 도심의 모습은 인기척 하나 없었다.
“흠, 던전에 사념 에너지가 가득 차 있네요.”
뒤따라 들어온 티타니아가 농도 짙은 사념 에너지의 향에 코끝을 찡그렸다.
“당장에라도 던전이 파열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요?”
“그 말은 여기에 아무도 없다는 소리지?”
“네.”
사념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사용할 몬스터 없이 방치된 던전에는 사념 에너지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이경이 말한 대로였다.
“일단 그 정글부터 가보자.”
이현은 서울 도심의 모습을 즐기고 싶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에 잠시 참기로 했다.
그러곤 이경이 말했던 동남아의 정글 구역으로 증기 엔진 오토바이를 몰았다.
정글로 향하는 도중에는 이경이 점령했던 군부대도 있었다.
‘저기 배치된 무기들은 나갈 때 챙겨야겠는데.’
스팀건과 골렘이라는 신무기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K2나 수류탄을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마피아에게서 압수한 정도의 현대 화기만으로도 권속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이현은 귀환길에 화기를 챙기기로 하고 오토바이를 계속 몰았다.
“저긴가 봐요.”
티타니아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울창한 밀림이 보였다.
군부대 구역도 산속에 있던 터라 숲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밀림을 구성하고 있는 건 뾰족뾰족한 침엽수가 아니라 정글 특유의 열대우림이었다.
“길이 험하네.”
더는 오토바이가 가지 못할 길이라 이현은 티타니아와 함께 밀림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기로 했다.
울창한 밀림은 이현의 몸통만 한 나무뿌리나 빽빽한 덩굴과 나뭇가지 때문에 지나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티타니아, 빙의.”
“넵.”
이현이 꺼낸 중식도에 티타니아가 빙의했다.
그러자 중식도는 파골대도를 넘어 정글도의 형태를 한 거대한 칼로 변했다.
무지갯빛을 띠며 빛나는 칼날을 보며 이현이 혀를 내둘렀다.
“이것도 S급이네.”
“그럼요, 제가 빙의한 칼인데요!”
“그래, 너 잘났다.”
피식 웃은 이현은 그런 S급 아티팩트를 적의 머리를 쪼개는 것이 아닌 길을 뚫는 용도로 사용했다.
가볍게 휘두르기만 해도 칼날이 스쳐 간 곳의 덩굴과 나뭇가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이현은 편하게 정글 속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무렵, 이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저긴가 본데?”
아주 희미한 사기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이현에게 느껴졌다.
티타니아도 그 사기를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도의 기운과 비슷해요.”
이현은 칼을 휘두르는 속도를 올리며 사기의 근원지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은 밀림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탁 트인 공터를 마주했다.
“저거네.”
공터 한가운데 자리한 제단을 본 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기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현은 티타니아가 빠져나와 원래 형태로 돌아온 중식도를 허리춤에 꽂으며 제단으로 다가갔다.
“이건 보통 오래된 게 아닌데요?”
제단을 살피던 티타니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제단은 최소 3천 년, 길게는 5천 년도 더 전에 생겨난 시설이었다.
“그리스 신들이 벌레 신의 무리에 겁먹고 도망친 게 대충 기원전 12세기쯤이었어. 그것보다도 더 오래됐다는 거지?”
“네. 그럴 거예요.”
그녀의 대답에 이현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그 말인즉슨, 그리스 신들이 도망쳤을 때보다 더 전에 이미 지구는 벌레 신의 영향을 받은 행성이었다는 소리였다.
‘에이, 설마…….’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기에 고개를 젓는 이현이었지만, 눈앞의 증거는 그의 희망을 깨부쉈다.
“하, 인류 문명이 지내 온 시간 대부분 동안 이런 폭탄을 안고 있었다니.”
지구에서 벌레 신의 권속들이 난리를 피우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특히나 사도의 알까지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현이 허탈해하는 동안 티타니아는 제단에 그려진 부조를 해석하고 있었다.
“음, 빛의 거인에게 패해서 알로 돌아간 사도 샤이 규라흐가 지구에 떨어지고, ……여긴 안 보이네.”
티타니아는 훼손된 부분을 건너뛰고 다시 해석을 이어갔다.
“사도의 알에 영향을 받은 지구의 인간들이 사기에 매료되어 샤이 규라흐를 신으로 숭배했네요. 이 이후는 온통 벌레를 찬양하는 내용이에요.”
“찬양할 게 따로 있지. 암만 이집트에선 전갈도 신의 동물로 생각한다지만.”
이현은 사도와 권속들의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암만 봐도 신으로 숭배할 외형은 아니었다.
“결국, 성이경이란 여자가 따로 벌레 신 쪽 진영이랑 만난 건 아니었네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이현은 최악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샤이 규라흐의 알은 우연히 이경의 던전에 포함되었지만, 또 얼마나 많은 벌레신의 흔적이 지구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지구에 돌아가면 저것들부터 없애야…… 누구냐!”
그때, 제단 뒤편의 숲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이현이 재빨리 스팀건을 꺼내 조준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경이 자신을 속인 걸까?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제정신이 아닌 이경이 거짓을 말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나와. 안 그러면.”
이현이 스팀건에 규격 외의 힘을 불어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소리가 났던 곳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항복! 항복이야!”
그리고 이현과 티타니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며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쇼구즈?”
크라쉬의 던전 도우미였던 부정형의 생명체, 쇼구즈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