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어둠 속에 묻힌 것들 (1)
단순히 이곳을 지키고 관리하라는 명령을 들은 리빙 아머들에게 공포라는 이질적인 감정이 스며들었다. 아이작은 눈을 번뜩이며 거칠게 갑옷을 찢어발겼다. 영혼의 한 줌조차 남기지 않고 포식해 버리는 촉수의 모습에 리빙 아머들은 영적인 충격을 받았다.
일어섰던 열 몇 구의 리빙 아머들은 순식간에 혼이 튕겨 나가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결속이 약해서 다행이군.’
아이작이 일부러 신성력을 불어넣어 효과를 크게 한 것도 있지만, 애당초 이 리빙 아머들이 그다지 정성 들여 만든 게 아닌 탓도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성찬례 특성이 발동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하급 군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촉수를 꺼내서 화려하게 죽여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 ‘어두운 성찬례’ 효과를 받았을 에이단을 돌아보았다. 그가 일부러 이런 ‘쇼’를 보인 것은 에이단 때문이기도 했다.
망령들처럼 도망도 가지 못하고 겁에 질려 꼼짝 못 하는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서.
역시나 에이단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이었다.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꿈꾸는 자시여…….”
“뭐?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에이단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에이단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후다닥 일어섰다. 하지만 에이단의 눈에는 공포 대신 동경과 경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는 아이작이 기대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때 아이작은 어두운 성찬례의 다른 효과를 떠올렸다.
‘성찬을 목격한 적은 공포 혹은 혼돈 상태에 빠지지만, 당신의 추종자들은 종교적 황홀경에 빠집니다…… 였던가?’
기가 막히지만 에이단은 아이작을 ‘추종’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작은 대체 언제부터 이놈이 자신을 추종했던 건가 잠깐 고민했다.
“그, 그 방금 그것은 무엇입니까?”
에이단은 차마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작은 뭔지 알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것도.
에이단은 자신을 원래 추종했던 게 아니다. 어두운 성찬례를 보고서야 추종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촉수를.
소금 의회는 메이저 신앙치고는 특이하게도 촉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소금 의회의 천사 중 일부가 바다 생물…… 정확히는 두족류의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의 촉수는 언뜻 보기에 문어발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훨씬 끔찍하게 생기긴 했지만.
아이작은 에이단의 생각을 눈치채자마자 바로 중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내가 섬기는 신의 기적이지.”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니셨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들려줄 수가 없겠군.”
아이작은 권위로 에이단을 찍어눌렀다.
네필림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에이단을 입 다물게 하는 동시에 모든 설득력을 부여했다. 이미 어두운 성찬례의 영향을 받은 에이단은 아이작의 정체에 대해 열심히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빈 성물을 만들면 어떻게든 소금 의회 성물로 만드실 수 있다고 하신 거였군요. 빛의 법전 안에서 몸을 숨기고 계신 것도 그들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뭔가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이작은 일일이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복수자라고 생각한다. 또한 누군가는 천사로, 누군가는 경건한 성배기사로, 누군가는 부패한 교단을 끝장낼 혁명가로까지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는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사람까지 나타났지만, 아이작은 그 누구에게도 일부러 맞춰서 자신을 포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아서 착각해서 이용해 먹기 편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들의 착각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지들이 먼저 착각한 건데 내가 왜 책임을 지나? 속은 놈이 나쁜 거지.’
***
아이작은 폐광에 숨겨진 병장기들을 확인했다. 병장기 상태는 놀랄 만큼 깨끗했다.
리빙 아머들이 열심히 관리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동굴 구조상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설계한 건지 폐광치고는 습도가 낮은데다 산소가 다소 희박했다. 거기에 언데드가 뿜어내는 한기가 더해지자 최적의 무기 창고가 된 것이다.
‘역시 화로 장인이 만든 무기는 아니군.’
내심 기대했지만 병장기들은 당연히 화로 장인이 만든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병기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손을 대 만들기를 원하지, 군용품을 대량 생산하는 것은 싫어했다.
‘그렇다고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 쪽 무기는 아닌데.’
이 정도 질의 병장기를 대량 생산하려면 반드시 국가나 교단이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병장기 양식 특성상 빛의 법전 쪽도,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 쪽도 아니었다. 소금 의회에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없다.
‘그럼 올칸 규율인가?’
동방의 오크 유목민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신앙이 개입한 셈이지만 아이작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병장기들을 죄다 녹일 수도 없으니 써먹긴 써먹어야 할 텐데, 게르토니아 제국과 분쟁이 많은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 쪽의 무기라면 바로 들킬 것이다.
올칸 규율은 백제국에서 너무 멀어서 그냥 특이한 무기 정도로 취급될 확률이 높았다.
병장기를 살펴보는 동안 에이단은 끊임없이 아이작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자신이 본 게 진짜인지를 포함하여, 아이작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는 듯했다.
‘……솔직히 이해 못 할 건 아니군.’
소금 의회 신도들은 소금 사막 아래 묻힌 자신의 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소금 사막을 깨부수고 신의 부활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그 단서라도 쥔 사람이 나타났다면 아이작이라도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 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이단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보다 무엇을 답해 줄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아이작은 리빙 아머가 빠져나간 갑옷의 안쪽을 살펴보다가 주술 촉매를 발견했다. 아이작은 그 촉매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나 궁금해져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순간, 망령의 미세한 파편이라도 남은 건지 촉매의 힘 때문인지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작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만큼 미약한 힘이었지만, 번뜩이는 잔상이 그의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이런 개…….”
아이작은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서 간신히 다리에 힘을 줬다.
그의 각막에 남은 잔상은 다름 아닌 노란 옷을 입은 남자였다.
아이작의 악몽 속에 끊임없이 나타났던 데 더해, 사후세계가 범람해 왔을 때 그를 향해 손짓하던 의문의 남자.
잔상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아이작은 쉽사리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빌어먹을 것이 대체 뭐길래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싶어졌다.
문득 아이작은 칼센 밀터가 꿈인지 망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환상 속에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현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소금 상인에게 물어봐.’
소금 상인이 에이단을 가리킨다는 것은 명확했다. 소금 의회 신도의 속성을 정확히 짚은 별명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적절하게 길들이고 나면 물어보려고 했었다고.’
“괜찮으십니까, 아이작 님?”
에이단은 아이작이 멍하니 있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신성한 것이 아니라 촉수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 실망할 테지만, 굳이 일찌감치 실망시킬 필요는 없으리라.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그 불사 교단 주교와 싸웠을 때 후유증이 좀 도진 것 같군.”
“불사 교단 주교…… 아아, 그 흔적을 봤습니다. 우르반수스의 문을 열어젖혔더군요. 일시적이라지만 그런 일에 휘말리셨다니, 후유증을 앓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르반수스.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정확한 명칭이다.
고어(古語), 내지는 신들의 말이지만, 천사나 신수들 입장에서는 엄연히 자신들이 기거하는 세계라 사후세계라는 명칭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아이작은 에이단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아는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소금 의회 신도는 대부분 신학에 해박하다. 뭐가 성물인지 구분할 지식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그중에서도 특정 직업군, 소금 의회의 성물과 유산을 찾아 헤매는 자들, 일명 ‘고고학자’들은 탁월할 정도로 신학에 해박했다.
에이단 베어베크는 바로 그런 고고학자 중 하나였다.
***
“그러고 보니 강한 신성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사후세계와 연결되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힘에 오염되거나 타락하는 자들도 있지요. 아이작 님도 부디 주의하십시오.”
아이작은 에이단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이 세계를 게임으로만 접했을 때, 아이작은 사후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모든 신앙에 사후세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솔직히 죽어도 새로 플레이하면 그만인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니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천국에 가기 위해 기꺼이 수도원에서 구도하고 전쟁터에 목숨을 던지는가 하면,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서 아예 사회적 최하층인 바르바리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로 가족과 주군을 배신하고 이단 신앙에 투신하여 천사가 되는 자들도 있었다.
인생은 짧고 사후세계는 길다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사후세계가 어떻게 현실로 건너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타락시킨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아이작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일 같았기 때문이었다.
“강한 신성력을 발휘하면 사후세계와 연결된다고?”
“예. 신성력은 우르반수스에서 내려오는 힘. 그 힘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경계가 옅어질 수밖에 없죠. 천사들이 사후세계에서 주로 기거하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이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어쩐지 최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소금 의회의 고고학자는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나?”
에이단은 잠시 생각하다가 뭔가 비유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님은 독생자(獨生子)십니까?”
“뭐라고?”
“어, 음. 홀로 태어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 어떤 조상이나 가문, 인연을 빌리지 않고도 태어난 존재요.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죠. 실제로 그런 존재는 없으니까.”
에이단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아이작 님은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우르반수스가 시키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요.”
“나는 딱히 밥 먹을 때 장엄한 빛이 숟가락을 들라고 명령하거나 걸을 때마다 오른발을 내밀고 그다음 왼발을 내밀라고 속삭이는 현상 같은 건 겪은 적 없는데.”
“하지만 숟가락을 쓰는 법이나 걷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지요. 세상의 모든 산 것들은 과거에 영향을 받습니다. 정확히는 이미 죽은 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죠. 당신이 먹고 자고 걷는 방식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 만든 방식입니다.”
아이작이 처음 떠올린 것은 집단무의식이나 신체에 새겨진 기억인 DNA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개념을 가져올 필요도 없었다.
평범한 문화, 도덕, 예절, 규범 따위가 모두 세밀하게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것들의 총합이 우르반수스라고?”
“예. 그래서 정확한 표현으로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우르반수스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사후세계라고 하면 단지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를 말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가진 기적이 강해질수록 내 자유 의지라는 것은 점점 희박해지고 사후세계의 의지가 나를 대신한다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는 그것을 참 신앙인이 되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성자라거나 혹은…… 천사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앙에 갓 입문한 사람은 스스로의 본질을 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신앙은 그에게 큰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한 힘과 더 높은 지위를 얻으면 가해지는 압력이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당사자는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사후세계의 의식과 개인이 일체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에이단은 설명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에이단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답변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건 신앙인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집단에서도 일어나는 일 아닌가?”
개인이 집단에 소속되면 그 집단에 물드는 일은 흔한 일이다. 굳이 사후세계니 신이니 천사니 하는 거창한 개념까지 끌고 오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에이단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사실 이 모든 것이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그 역시도 기록과 책으로 공부한 학자에 불과하다. 우르반수스나 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아이작이 자주 겪고 있는 악몽 같은 것은 에이단의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후세계, 아니 우르반수스의 어딘가인 것이다.
우르반수스의 악의와 집착이 아이작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그때 에이단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알 두아자드가 남긴 흔적이 기묘하긴 했지요.”
“기묘하다? 어떻게?”
“보통 우르반수스의 문을 열면 그 개방자와 관련된 사후세계가 나타나기 마련이죠. 알 두아자드는 불사 교단이었으니 당연히 흑제국과 같은 환경이 나타났을 겁니다. 동토와 망령들로 오염된 생물들, 뭐 그런 거요. 하지만…….”
초반에는 분명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출몰하는 망령들과 얼어 죽은 식물들. 하지만 직후 드러나기 시작한 세계는 그와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온갖 것들이 녹아내리고 뒤틀린 세계.
“아이작 님의 능력이 닿은 덕분에 ‘정상화’된 세계는 멀쩡해졌지만, 땅속은 아니더군요. 그건 분명히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달랐지?”
“죽은 풀 아래 흰 모래가 가득했습니다.”
아이작은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단어가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전 인류의 1/3을 지워 버렸던 악명 높은 사건.
백사병(白死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