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70)
Subject Here – 270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같이 (5)
발트제메르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등대지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교황청 성좌를 둘러싼 사람들마저도 그랬다.
등대지기의 기운에 짓눌린 교황이 아직 황제 파문을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황의 청구가 있기도 전에, 등대지기는 황제의 파문을 선언했다.
마치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 왔던 것처럼.
저벅. 그때 테라스 밖에서 쏟아지는 빛살을 뚫고, 로헨 추기경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간신히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인 데라 헤만 성기사단장을 제치고, 등대지기 앞에 엎드려 있는 호르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은 지상을 향하고 있었다.
천상에서 지상을 굽어보는 자의 시선이었다.
“드디어 리히트 조약이 파기되었군.”
“로헨……?”
로헨은 차가운 눈으로 교황을 내려다보았다.
“욕심도 많고 겁도 많으니 자기가 맡은 역할도 모르는구나. 네 효용은 여기까지다. 이제 제국은 다시 빛의 법전이 다스리게 될 것이다.”
***
발트제메르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한기를 느꼈다. 그의 뇌가 삐걱대며 등대지기의 선언을 곱씹었지만, 등대지기는 좀 더 직관적인 형태로 그의 뜻을 전달했다.
“끄아아아악!”
발트제메르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눈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 목소리는 카틴 주교의 목소리를 닮아있었다. 살과 뼈가 타들어 가는 냄새, 그을리며 내지르는 비명만큼은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발트제메르는 미약하게나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등대지기…….”
그가 뭐라 말을 하려 했을 때,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가벼워졌다.
툭, 투툭.
발트제메르는 자신의 머리를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옷을 입거나 마차에 타고 내릴 때마다 걸리적거려 죽겠다던 그 뿔.
그러나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아도 그 누구보다 완벽한 권위와 상징성을 품고 있던 사슴뿔이 머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발트제메르는 단 한 번도 그 뿔이 귀중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뿔에 의존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팔다리를 잃은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나를…….”
발트제메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그를 짓누르던 빛과 열기가 사라졌다. 어느새 하늘 위에서 그들을 짓누를 듯 드리워져 있던 등대지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의 눈이 멀어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등대지기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버린 건가?”
모두가 혼란에 빠진 와중에 발트제메르는 ‘왜?’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등대지기가 나타났을 때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복종하겠다고 했다. 어리석고 무능한 교황 대신, 자신이 더 유능한 대리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교만이 발트제메르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황제는 교단을 장악하여 제국을 완전히 손에 넣으려 했으나, 천사들은 그 반대로 교단을 통해 황제를 파문하고 제국을 손에 넣었다.
이전까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천상과 지상의 권력을 분리하기로 한 리히트 조약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 제국은 300여 년 전, 리히트 조약 이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리고 발트제메르는 리히트 조약을 파기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당했다.
모든 것은 그가 등대지기 앞에서 스스로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은 덕분이었다. 차라리 병사를 들이쳐 성도를 공격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Subject Here – “누, 눈이 보인다!”
병사들의 환희가 들려왔다.
멀어 버린 줄 알았던 눈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고, 타들어 간다고 착각했던 몸은 멀쩡했다.
하지만 너무 밝은 빛이 사라진 덕분에 대낮인데도 주변은 밤처럼 어두워 보였고, 너무 더운 열이 사라진 탓에 그들은 늦여름 태양 속에서도 한기를 느꼈다. 그들은 미칠 듯한 허무함에 휩싸여, 그 부족한 열기를 충족시킬 대상을 찾았다.
“이단!”
발트제메르는 불현듯 한 병사가 자신을 향해 감히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불손한 행동에 뭐라 하기도 전에 분노와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병장기를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단자 발트제메르를 불태워라!”
그 고함을 듣고서야 발트제메르는 의미를 깨달았다.
파문.
방금 전까지 게르토니아 제국의 황제였던 발트제메르는 바르바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국에서도 비문명인과 짐승 어딘가 중간쯤으로 취급당하는 그런 바르바리가.
“폐하! 폐하!”
얼마 안 되는 근위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측근들이 힘겹게 몰려오는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저 멀리서 불에 새카맣게 그을린 시체는 카틴 주교 같았다.
불쌍한 사람. 평생을 빛의 법전에 헌신했음에도 그저 경고를 위한 장작으로 소비되었다.
“이 반역자 버러지들…….”
에셀허트 근위 기사단 단장이 고함을 내지르며 거침없이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았고, 병사들은 광기에 젖어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에셀허트의 늙은 몸뚱이에 수십 개의 병장기가 빽빽이 박혔다. 몸에 박힌 창 때문에 그는 쓰러지지도 못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지금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난다고, 델리아? 어디로?’
그는 이제 폐하도 아니다. 그리고 교황에 맞섰던 바르바리를 대체 누가 받든단 말인가.
리옹 후작은 발트제메르의 멱살을 쥐고 끌고 가려다가 뒤에서 달려온 병사의 창에 허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때 누군가 거칠게 발트제메르의 무릎 뒤쪽을 찔렀다. 발트제메르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몇 번인가 더 날카로운 금속이 몸 안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옷이 강제로 찢어지고 신발도 벗겨져 나갔다.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 교황 성하께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를 구원하기 위한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병사들을 거칠게 밀치며 다가온 사람은 디트리히 브란트 공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다른 병사들과 함께 발트제메르를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곤 말 위에 발트제메르를 짐짝처럼 실었다.
“내가 교황 성하께 직접 이단자를 바치겠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듯하니, 우리가 이 이단자에게 농락당했음을 설득한다면 교황 성하께서도 우리 군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영리하군, 디트리히. 그게 브란트 가문을 존속할 방법이지.’
발트제메르는 속으로 감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말을 출발시키더니 리히트하임으로 달리는 대신 반대편을 향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병사들 사이에서 분노의 고함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한 박자 늦게 뒤에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활을 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트제메르는 디트리히의 등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이 어리석은 자야. 우리는 서로 이용할 뿐인 관계 아니었나? 갑자기 충성심이 어디서 이렇게 우러나왔지?’
“당신은 여기서 죽어선 안 됩니다.”
디트리히는 으르렁거리듯이 발트제메르를 향해 속삭였다.
“천사가 나타나자마자 단숨에 지상 최고의 권력자를 이유를 말하지도, 변명을 듣지도 않고 말 몇 마디로 고꾸라뜨리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세상에 이 말도 안 되는 불합리를 보고도 외면하라구요? 그건…….”
퍽, 퍼퍽! 화살 몇 대가 날아와 디트리히의 등에 꽂혔다. 디트리히의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는 고삐를 놓지 않았다.
디트리히의 등이 뿜어져 나오는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그건, 그건…… 내 딸이 살아갈 세상에도 못 할 짓입니다. 이제 당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아셨을 테니, 이제부터라도…….”
다각, 다각, 다각! 그 순간, 빠르게 달려온 말 한 마리가 단숨에 디트리히의 등과 말을 동시에 꿰어 버렸다. 디트리히는 숨을 길게 토해 내다가 그대로 말과 함께 고꾸라졌다.
발트제메르는 낙마의 충격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Subject Here –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는 디트리히의 등에 꽂혀 있던 창을 달리면서 잡아채고는, 곧장 말에서 뛰어내려 발트제메르를 겨냥했다.
“펠트런…….”
제국 기사단장, 펠트런.
제국의 정보를 쥐고 황제의 은밀한 손으로 활약해 왔던 그가 이제는 발트제메르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다. 옛 주군을 겨냥하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그다지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다른 기사들이 달려오자 그가 턱짓했다.
“묶어라. 교황 성하 앞에서 가능한 처참해 보여야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다.”
“예.”
기사들은 발트제메르를 내려다보며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하지만 뿔을 잃어버린 발트제메르는 예전만큼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펠트런은 발트제메르의 머리채를 쥐고 들어 올리는 척하며 속삭였다.
“수치는 짧지만, 복수는 깁니다. 교황은 교만한 자니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는 안색을 살피는 척 턱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발트제메르의 입 안에 물렸다. 그의 손끝에서 술과 비슷한 시큼한 피 맛이 느껴졌다. 동시에 발트제메르는 낙마의 충격이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발트제메르는 이게 붉은 성배의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그토록 신뢰해 왔던 측근 중의 측근, 제국의 정보를 장악해 왔던 제국 기사단장이 붉은 성배의 은밀한 손가락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펠트런이 어째서 황제를 살려 두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따질 기력조차 없었다. 펠트런은 발트제메르의 안색을 살피는 척하며 손가락을 빼내고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죽을 안색은 아니군. 끌고 가라. 튼튼한 놈이니 죽진 않을 거다.”
기사들 손에 묶인 발트제메르는 비척대며 일어났다. 기사들은 말 뒤에 묶여 있는 발트제메르를 한번 살펴보고는, 다시 리히트하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발트제메르는 몇 걸음 말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상처 입은 무릎으로는 오래 걸을 수 없었다. 이내 그는 절뚝거리다가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기사는 봐주는 것 없이 그대로 발트메제르를 끌고 갔다.
펠트런은 끌려가는 발트제메르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작은 숲이 우거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숲을 주시하던 펠트런에게 기사들이 다가왔다.
“이단과 야합한 이 흉적들의 시체도 교황 성하께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펠트런의 손에 죽은 디트리히를 가리킨 말이었다. 펠트런은 담담히 말했다.
“놔둬.”
“예? 하지만…….”
“들개와 새매가 뜯어 먹게 둬라. 이단에게 엄중한 장례를 치러줄 시간은 없다.”
기사들은 다소 의아해했으나 도망치는 황제를 포획한 펠트런의 지시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은 곧 시체를 두고 사라졌다.
펠트런은 숲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리히트하임을 향해 달려갔다.
환희와 공포가 함께 타오르는 성도 리히트하임을 향해.
***
교황, 호르마 크무엘은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리히트하임을 둘러싼 십만의 군세가 함성을 내지르던 게 방금 전이었고, 성도 안의 사제와 성기사들마저 그로부터 돌아선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리히트하임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모두 그를 향해 눈도 못 마주친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호르마는 그것이 결코 자신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머리 위에 군림하는 천상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르마 본인조차도 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눈앞에 있는 사내만큼은 아닐 것이다.
“이단자를 대령했습니다, 교황 성하!”
발트제메르를 끌고 온 기사가 자신의 무고함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려는 듯 열정적으로 말했다.
발트제메르의 꼴은 처참했다.
거의 질질 끌려오다시피 한 그의 옷은 갈기갈기 찢겨 알몸이나 다름없었고, 신발도 없는 맨발이었다. 상징이었던 뿔은 사라지고, 흙먼지투성이에, 오면서 오물이라도 얻어맞은 것인지 악취가 풍겼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정점에서 통치하던 사내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