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56)
56화. 빚 받아드립니다 (4)
“헨드락 기사단?”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언은 쑥스러운 듯 망토를 묶은 곰 모양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 원래 검은 곰 기사단이라는 명칭인데 아무도 못 알아듣고, 심지어 영주님도 헨드락 기사단이라고 불러서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하필이면 헨드락 기사단이 왜 여기 있어?’
헨드락 기사단이라면 이제 아이작이 르하르트와 함께 쳐들어갈 헨드락 영지의 기사단이다.
제법 높은 확률로 싸우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하필이면 아이작이 그 기사단을 구해 준 것이다.
‘이제 와서 때려눕힐 수도 없고.’
오언 렌리라 이름을 밝힌 기사는 아이작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성배기사 아이작 님 아니십니까?”
아이작은 잠깐 정체를 숨기고 모르는 척 할까 했지만, 결국 들킬 거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정체를 숨기기엔 성배기사가 너무 적고 눈에 띄는 행보를 해왔다.
“맞다.”
아이작은 담담히 인정했다. 그러자 기사들에게 화색이 번졌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약자를 구하기 위해 거침없이 뛰어드는 용기, 적에게도 일격을 한번 허락해주는 명예로운 기품, 단숨에 숨통을 끊는 실력, 무엇보다…….”
아이작은 감미롭게 자신을 칭송하는 칭찬을 듣다가 갑자기 오언이 말을 멈추자 그를 바라보았다. 오언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급히 멈춘 듯했다.
“무엇보다 뭐? 왜 말을 하다 말지?”
“아, 그게 음, 세속적인 표현인 듯하여…….”
“세속적?”
“사람들 말로는 천사가 빚어낸 듯한 고결한 아름다움이라고…….”
이놈의 외모란.
일부러 예쁜 캐릭터로 플레이하려고 네피림을 고른 거긴 했지만 역시 자주 듣던 칭찬이 아니다 보니 들을 때마다 낯설다. 그나마 여캐로 만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이작이 대답했다.
“상관없으니 마음껏 칭찬해도 좋다.”
“예, 실례되는 표현을 하여 죄송…… 예? 예?”
“그보다 검은 곰 기사단이 여긴 무슨 일이지?”
오언은 헨드락 기사단보다 검은 곰 기사단이라는 정식 명칭을 불러 주었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듯했다.
그는 자신 있게 영주인 카일 헨드락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말했다.
“예. 성배기사 아이작님을 영지로 모셔 오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아마 성배기사님의 숭고한 여정을 칭송하고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카일이 받은 명령은 ‘아이작을 데려와라’라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 내막은 제법 복잡했다.
헨드락 영지는 르하르트가 말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당장 가신인 기사들 봉급부터 밀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넓은 영토를 가진 영주가 설마 봉급을 떼먹기야 하겠느냐며, 봉급이 밀리면 따로 작은 봉토를 하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보기에는 달랐다.
‘파산 직전이군.’
보아하니 르하르트가 서둘러 봤자 카일의 구제는 글러 보였다.
르하르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헨드락 영지를 그나마 나쁘지 않은 값에 팔아먹는 것이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헨드락 영지 내부에서 먼저 가신들이 들고 일어나 자산을 털어먹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쨌든 카일은 이 상황에서 아이작을 찾았다.
아이작은 아마도 그 이유가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망하더라도 명분을 가지고 망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남겨서 재기할 발판을 만들기 위해.
‘그런데 먼저 도착한 건 르하르트였군.’
조금만 헨드락 기사단이 빨랐다면 아이작은 그들과 함께 헨드락 영지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르하르트에게 선불금─말 한 필이지만, 어쨌든 그걸 받은 상태였다.
사실, 아이작은 누굴 따라가도 나쁘지 않았다.
누굴 돕든 아이작은 그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카일 헨드락이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어차피 몰락할 것이니, 그때 아이작이 곁에 있다면 헨드락 영지의 살점을 가장 많이 뜯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카일 헨드락이 원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아이작은 이 새로운 유혹에 끌렸지만, 이내 접었다.
르하르트와 먼저 한 약속을 저버리고 파산한 귀족 편을 드는 것은 별로 명예롭지 못하다.
그리고 명예는 둘째치더라도, 아이작이야말로 헨드락 영지를 이번 기회에 한 뙈기라도 떼먹으려는 하이에나 중 한 명이었다.
“좋다. 가지.”
하지만 아이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선택지를 버릴 필요는 없다.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일찌감치 헨드락 기사단을 적대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르하르트 영지에 도착하게 되면 결판이 날 테니까.
오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며, 명예로운 성배기사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아이작보다 나이가 몇 살은 더 많을 게 분명한데도 오언은 정중함을 넘어 존경을 보이는 태도로 인사했다.
아이작이 이룬 업적보다는 성배기사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이 그의 존경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 시대 아이들은 히어로 영화를 보는 대신 성기사들의 영웅담을 들으면서 자랐을 테니까.
***
트롤에게 낭패를 당하는 졸전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사단은 기사단이었다.
아이작이 움직이자마자 그들은 호위 대형을 형성하면서 제식 행군을 시작했다. 능숙하게 말을 모는 것을 보아하니 실력은 고만고만해도 높은 분을 잘 모시는 것 하나는 잘하는 것 같았다.
“저들과 함께 움직이시려구요?”
헤사벨은 불만족, 아니,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조잡한 실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저 실력으로 기사를 자처하다니 놀랍기만 하군요.”
그녀의 시선은 가끔 기사들과 마주쳤는데, 기사들이 아이작 곁에 있는 놀라운 외모의 헤사벨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사벨은 아름다움을 따지는 붉은 성배 클럽의 신도답게 후드를 눌러써도 가려지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작도 눈길이 가는 외모지만, 아무래도 같은 남자보다는 여자한테 관심이 갈 테니까. 대놓고 누구냐고 묻지는 못해도 호기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일행이 많으면 유리하지. 먹을 것도 구하기 쉽고, 안전하고, 불침번 같은 것도 설 필요 없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낮에는 어렵겠지만, 밤이 된다면 저 기사들이 불침번을 몇 명 세워둬도 저한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겁니다.”
아이작도 내심 동의했다.
사실 먹을 것은 촉수로 짐승을 포식하면 되고, 안전은 말할 것도 없다. 불침번조차도 밤에는 아예 잠들 필요가 없는 헤사벨이 있다. 그녀가 아니어도 산속 어디선가 따라오고 있는 지힐렛에게 경계를 세워도 되고.
하지만 굳이 떼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의 이런 예민한 반응이 더 의아했다.
“뭐 때문에 그래?”
“그저 격이 맞지 않는 자들이 고까워서…….”
“정 불만이면 휴대용 도시락이라고 생각해.”
“……예.”
아이작은 헤사벨이 뭐가 불만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실력이야 형편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함께 다닐 때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제법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웬 통나무들로 길이 꽉 막혀 있는 상황이라던가 말이다.
한나절쯤 길을 걸었을 무렵,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멈춰서 눈앞을 응시했다. 옆을 돌아보자 오언도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웬 통나무들이 한가득 쌓여 길을 막고 있었다.
“오전에 올 때에는 이런 게 없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길은 좁은 계곡 사이로 나 있었는데 통나무는 꼼꼼하게 쌓여 있어서 말 탄 사람들이 우회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토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니 산사태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범인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발로 나타났으니까.
“오오오오오!”
웬 트롤들이 네 마리가 나무 사이사이에 서서 아이작 일행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저마다 굵직한 나무토막을 대고 으르렁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 길을 막은 후 함정으로 써먹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면 소리만 칠 게 아니라 공격을 해야지…… 무슨?’
“저 새끼들이…….”
아이작이 트롤의 지능을 의심할 때 기사 하나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칼을 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작은 이번에는 기사의 지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뭘 어쩌려고? 아까 평지의 트롤 하나도 못 잡아서 비실거렸는데 비탈 위까지 뛰어 올라가서 잡으려고?
다행히 기사가 뛰어 올라가기 전에 오언이 제지했다.
“트롤들이 해코지를 한 것 같군. 원래 이 길목에 트롤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오언이 민망한 듯 변명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여기는 깊은 산도 아닌 사람 다니는 길목이다. 트롤의 피나 가죽이 제법 고가로 거래되는 데다, 사제 한 명만 있으면 잡기 쉽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산속에 숨어서 이동하고 있는 지힐렛에게 의지를 투사했다. 이미 위협이 등장한 순간부터 은밀하게 이동했던 지힐렛은 트롤을 즉시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끄어어어어!”
곧 트롤 한 마리가 쑥 숲속의 어둠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트롤이 어떤 꼴을 당한 건지 비탈 아래서는 볼 수 없었다.
지힐렛은 성역이 아닌 곳에서도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 한두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먼저 기습한다면 트롤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트롤의 비명에 기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다른 트롤들 역시 뒤늦게 이변을 알아차렸다. 약간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은 이내 숲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우, 우오오오!”
이내 놈들은 굴러떨어지다시피 하며 비탈길로 뛰어내렸다.
“고, 공격이다!”
기사들은 그것을 뒤늦게 기습을 개시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서둘러 칼을 뽑았다.
아이작은 굴러떨어진 트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일어나기 전에 재빨리 목을 칼로 찔렀다. 심판의 검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트롤의 목을 태워 버렸다.
나머지도 금방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아이작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검은 곰 기사단의 실력을 좀 봐도 될까, 오언?”
“아, 예! 무, 물론입니다!”
뒤치다꺼리는 사양이다. 그보다 아이작은 왜 트롤 무리가 난리인지가 더 궁금했다.
오언을 위시한 기사들은 지휘를 따라 용감하게 칼을 들고 트롤 두 마리와 싸웠다.
아까 한 마리한테 일방적으로 당하던 꼴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헨드락 기사단은 의외로 잘 싸웠다. 이곳은 비탈진 곳도 아니고 트롤들이 무기로 쓸 통나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트롤들은 겁에 질려서 싸우기보다 도망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상처를 태우지는 못 해도 기사들은 착실하게 트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역시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데…….’
물론 일반 용병이나 경비병에 비하면 우수한 수준이다. 하지만 성기사단과 비교하면 처참하다. 헨드락 기사단이 서너 개 있어도 로튼해머의 성기사단에 맞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당연하지만 검술은 성기사단뿐만 아니라 일반 기사들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헨드락 기사단 중 누구도 상급 검술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형편없는 사람들만 뽑아서 온 건지, 아니면 이게 원래 지방 기사단의 실정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오언이 좀 낫군. 좀 몸을 사리는 느낌이 강하지만…….’
오언은 다소 소극적이기는 해도 한번 칼을 휘두르면 확실하게 상처를 입혔다. 제법 매서움도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그나마 상급검술에 발을 들이밀 만한 사람이 있다면 오언뿐이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봐라. 쟤네가 없었으면 네가 저 트롤들을 치우고 있었을걸?”
물론 헤사벨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붉은 성배 클럽에서는 굳이 트롤을 해치지 않습니다. 충분히 길들일 수 있으니까요.”
“길들여?”
“예. 붉은 성배 클럽은 트롤을 귀한 영물로 여기니까요.”
“영물? 아아, 피 때문에.”
아이작은 헤사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이작은 플레이할 때 거의 신경 쓰지 않았지만, 붉은 성배 클럽은 트롤을 유용한 가축이자 경비견 정도로 여겼다.
말은 안 통하지만 말귀를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피도 굉장히 유용하다. 그 재생력 또한 경이로운 수준이다. 생명력과 피를 숭배하다시피 하는 붉은 성배 클럽이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잠깐…… 붉은 성배 클럽이라.’
아이작은 뭔가 미묘한 지점이 마음에 걸렸다.
붉은 성배 클럽은 트롤을 길들이고 아낀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많은 트롤들이 출몰하고 있다.
배후가 있는 게 분명했다.
‘헤사벨…… 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헤사벨 때문에 날파리가 꼬인 모양이군.’
성기사나 사제가 배교해도 온갖 저주와 추적자들이 따라붙는데, 공작가 후계자를 그냥 배교하게 둘 리가 없다.
아이작은 배후가 누구일지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