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2
14화
동아시 아, 유럽,북미, 남미 등.
팔악팔선과 휘하의 길드에게는 각자 의 영역이 있었다.
조세 피난처도 비슷하다.
헤지 펀드 등의 월 스트리트의 엘리 트 자금은 케이맨 제도에.
역외 보험 및 재보험업계의 자금은 버뮤다에.
테러 리스트들과 콜롬비아 마약 밀매 업자들의 자금은 파나마와 네바다에.
라틴 아메리카의 지배 및 조직 범죄 자금은 플로리다 주에.
유럽 증권 회사들의 자금은 아일랜 드와 룩셈부르크에 .
아시아계 자금은 흥콩에.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 자금은 저지 섬,건지 섬,맨 섬과 같은 영국 왕실령의 섬과 스위스에.
물론 자금 규모가 클수록 여러 조세 피난처들을 중첩해서 사용한다. 하지
만 대개는 이용 용도에 따라서 조세 피난처들을 고르기 때문에 위의 틀에 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본인을 ‘악당’이라고 웃으며 소개한 늙은 중개업자 칼은 스위스를 추천했다.
한편 그의 사무실은 악당과는 어울 리지 않는 장소에 있었다.
180도의 전망을 자랑하는 사무실이 었다. 전면에서는 센트럴 파크가 훤히 보였고,그는 아름다운 광경을 등에 대고 있었다.
한때 나도 저 공원에서 붉은 머리가 매력적이었던 여자와 열렬한 연애를
했던 적도 있었다.
칼이 내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 며 말했다.
“사무실에서 보는 풍경은 내 두 번째 자랑 거리라네. 평화롭지 않나. 치열 한 곳이지만 센트럴 파크에서는 평화 를 찾을 수 있지. 그래서 스위스를 추 천하는 거야. 스위스가 유럽의 센트럴 파크가 아닌가.”
그가 설명을 계속했다.
“전통과 역사가 깊지. 스위스만큼이 나 세계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 도 드물고,3차 대전이 일어나도 스위 스는 그대로 중립국으로 있을걸. 뭐니
뭐니 해도 안전이 최고지.”
그러면서 그가 요구한 설립 대행 수 수료는 700만 달러 였다.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연 수수료는 500만달러.
“하루면 처리되네.”
돈은 문제될 것 없었다.
“제 고객분들께서는 맨 섬을 고집하 십니다.”
내가 태도를 고수하자,칼은 방향을 빠르게 바꿨다.
“원하시는 대로 하게. 나야 장기적인 신뢰를 쌓고자 노력하는 거 밖에 없 어.”
사실이었다.
세계 곳곳에 각양각색의 조세 피난 처들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가장 강력 한 비밀주의를 자랑하는 게 스위스였 다.
하지만 그것도 97년까지다.
이번 98년도에 뜻하지 않았던 방향 으로 홀로코스트 문제가 부각된다. 비 단 유대인 희생자들의 자금뿐만이 아 니었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나치의 비밀 자 금까지 언급되면서,스위스 은행들은 집중 공격을 받고 백기를 흔들고야 만 다.
그것이 그 많은 중개 사무소 중에 칼 의 사무실을 찾아온 진짜 이유였다.
98년 올해.
스위스 은행들이 백기를 흔들게 만 들었던 자료들이 이들 중개업자들에 게서 나왔다.
조나단은 틈만 나면 걱정하는 모습 을 보여 왔다.
우리가 역외로 빼돌린 수백억 불이 언젠가는 들통나,결국 수백 년짜리 형을 살게 될 거 라고 말이 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1%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 는 건 맞았다. 나는 그 1% 마저 지우 려 칼을 찾아온 것이었다.
우리의 역외 자금을 마지막에 다뤘 던 중개 업자가 바로 이자.
칼이기 때문이다.
내가 준비물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그가 부쩍 관심을 보였다.
그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조용히 잠그고 있었다.
그래도 틱 소리가 났고 칼은 무슨 일 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황하는 얼굴이 었다.
칼이 수화기를 들면서 소리치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가 비서로 추정되는 이름을 외쳐 댔지만 사무실에 있는 건 칼 혼자였 다.
괜히 점심시간을 고집해서 약속을 잡은 게 아니 었다.
“무섭게 왜 그러십니까.”
나는 뻔뻔하게 말하며 칼에게 다가 갔다.
제일 먼저 그가 쥐고 있는 수화기부 터 빼앗았다.
느리게 그러나 힘을 줘서.
그가 수화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스스로 수화기를 놓아 버렸 다.
그의 두 눈이 겁에 질려 있었다.
사람들이 시험의 장에서 몬스터를 직접 대면했을 때에도 이런 표정이 대 부분이었다.
찰나였지만 그는 내게서 몬스터를 본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자는 것뿐입니다. 누구 의 방해도 받지 말고. 더 은밀하게.”
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돌발적인 상황을 안 전하게 빠져 나갈 수 있는지.
그 계산만 따져 보고 있는 게 분명했 다.
내 눈을 피하고 있는 그의 시선은 사 무실 내부를 훑고 있었다.
때로는 책상 위 만년필에 꽂혔고.
때로는 컴퓨터 키보드에도 머물렀 다.
키보드야 그렇다 쳐도 만년필을 상 대의 목에 찔러 넣는 건 숙달된 기술 보다도 용기 가 필요한 일이 다.
그러다 문든 그의 시선이 내가 직전 에 올려놓았던 준비물에서 멈췄다.
100만 달러짜리 무기명 채권에 말이 다.
그제야 그의 입이 열렸다.
“갱에서 나왔나?”
천만에.
테러리스트든,갱이든,마약 밀매 업 자든.
중개업자 사무실에선 월 스트리트의 금융 매니저처럼 군다.
실제로도 중개업자 사무실에서 그들 과 마주쳐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기 란 쉽지 않은 일이다.
중개업자 칼이 만나 온 고객들은 딱 한 부류밖에 없었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큰돈을 이야기 하며 정중한 태도를 일관하는 자들.
건너편 은행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자들 말이다.
내가 실소를 머금자 칼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 었다.
수화기를 끊은 후 내가 특별한 행동 을 따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 다.
오히려 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차분히 앉아 있었다.
“갱 같은 저급한 자금도 취급합니 까?”
그제야 불안하게 흔들리던 칼의 두 눈도 제자리를 찾았다.
“원하는 걸 말해. 괜한 겁주지 말고.”
그는 나보다 약한 걸 인정 했다.
키도 나와 비등하고 체급도 나보다 뒤떨어지지 않지만, 은퇴를 앞둔 나이 때문일까.
내게 덤비는 걸 완전히 포기한 듯했 다.
나는 무기명 채권을 눈짓하며 말했 다.
“그건 당신의 컴퓨터를 이용하는 대 가입니다.”
칼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 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런 식으로는 곤란해.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그런 건 없 어. 우리는 고객들의 비밀을 최우선으 로 삼아……
나는 다시 일어났다.
동시에 잠깐이었지만 가라앉고 있던 실내의 분위기가 요동쳤다.
“스,스위스 은행처럼 !”
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컴퓨터를 사수하고야 말겠 다는 듯이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대고 한마디만 뱉었다.
“비켜.,,
서늘한 내 목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여의도 국회에서 몸싸움에 능한 정 치인들의 입지가 의외로 큰 것은 웃을 일이 아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의 폭력은 그만 큼이나 당혹스러우며 효과적이기 때 문이다.
소극적이나마.
칼은 이런 경우의 폭력에도 노출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물며 그의 사무실 안에서 벌어지
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 어도 컴퓨터를 사수해야 하지만 자리 를 비켰다.
그런 다음 하는 저항이라고는,먹히 지도 않는 거 짓말 따위 였다.
“비밀 번호는 비서가 관리하고 있네. 이렇게까지 하실 일이 아니야. 내 가 족들을 걸고 말하는데,찾고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란 말 이야.,,
멍청한 칼.
그는 분명히 목에 나이프를 들이댄 다면 비밀번호를 술술 불 인사였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보는 앞에서 준비해 온 씨디를 넣고 비밀번호를 풀었다. 몇 개의 소 스 덩어리들이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 는 능력자들처럼 작용했다.
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내가 암호를 풀었기 때문만은 아니 었다.
바탕 화면에 연도별로 만들어진 폴 더가 있었을 뿐더러,폴더 안에서는 또 고객들의 이름으로 자료가 세분화 되어 있었다.
“이…… 이건 모르는 일이야.”
나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와 함께 방구석을 가리 켰다.
그래도 버티고 있는 그에게 경고했 다.
“다 날려 버리길 원해? 찌그러져 있 어.,,
이쯤이면 내가 꽤나 정중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 다.
칼은 먼 책장 앞에서 섰다.
당장 잠긴 문을 열고 경찰을 부를 수 있겠지만 그는 그럴 수 없는 처지였 다.
경찰을 부르면 오히려 연방 경찰이 쏟아질 테니까.
그리고 검사들이 환장하는 리코법
(Rico: 공갈 매수 및 부패조직 처벌 법) 위반 증거 자료들을 쉽지 않게 찾 을 수 있겠지.
칼은 연방 경찰들로 가득 찬 사무실 광경을 떠올렸는지, 멀리서 떠는 목소 리로 말했다.
“뭘 찾는지 알려 주면 도와줄 테니 까. 그러니까 말만 해.”
그것도 웃기는 소리다.
말한다고 알까?
나도 그렇지만, 돈 있는 자들이 중개 업자들에게 대행을 맡길 때에는 허술 하지 않다.
녀석이 고객들의 이름으로 분류해
놓은 폴더는 백 프로의 확률로 이미 조세 피난처에 존재하고 있는 사업체 명들이 었다.
누가 실제 주인인지 모르는 업체들 의 이름.
칼은 자기가 뭘 다루고 있는지도 모 른다.
나 또한 천여 개에 육박하는 내 병정 들의 이름을 다 알지 못했다.
설사 홀로코스트 사건이 불거졌을 때, 나의 유령 회사들에 관한 자료들 이 당국에 넘어간다고 해도 다 들통 날 가능성은 전무 했다.
그래도 찌꺼기들이 남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치우지 않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태국 요리 먹자고 했잖아요.”
“그래도 맛있었잖아.”
문밖이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칼의 직원들이 점심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 었다.
칼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잠 긴 문을 열고 나갔다 돌아왔다.
사무실 밖 로비에서 전화벨이 울려
도 여기 방 안으로 연결되는 일은 없 었다.
이미 칼이 귀한 고객을 응접 중이라 고 언질을 해 두었기 때문이 었다.
관련 자료들을 지우고, 또 관련 자료 들을 지운 흔적들도 지웠다.
내가 모든 작업을 마치고 일어났을 때에는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동안 칼은 서 있고 서성이고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부턴 내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소중한 하루를 버렸어. 비밀주의는 개뿔.”
그 말을 끝으로 자리 에서 일어 났다.
칼 또한 완전히 지친 기색이면서도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말했다.
“……가져가.”
내가 준비해 온 무기명 채권에 대한 말이었다.
그 백만 달러는 그냥 책정한 게 아니 다. 그가 한 건당 버는 돈이 그쯤일 것 이다.
“넣어둬. 오늘로 끝이 아니잖아.”
“무슨……
“정 부담스럽다면 계약금으로 두지. 맨 섬에 투자 회사 설립을 끝내 놔.” 이들 중개업자들은 다 자료를 남긴 다.
그 때마다 이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여기를 사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회귀 전이었다면 빌딩을 통째로 폭 파시켜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속한 세계가 백팔십도 로 바뀌었다. 여기에서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내가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아 버리 자, 칼은 내 눈치를 보면서 아스피린 을 물 없이 삼켰다. 그래도 두통이 가
시지 않는지 그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 다.
“밖에 직원들이 있어.”
그러니까 허튼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소리지만, 목소리에는 그만한 힘이 들 어 있지도 않았다.
“제인을 불러왔으면 좋겠는데.” 벽면에 걸려있는 업체 명패를 가리 키며 말했다.
「칼 & 제인 법률 회계 사무소」
눈치챘겠지만 칼은 변호사고 동업자 인 제인은 회계사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은 법무 법인과 회계 법인들이 집약되어 있는 뒷골목 에 위치해 있다.
인테리어로 배치된 책장에는 법률 및 회계 서적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정체는 조세 포 탈 대행업체.
그 기원은 벽면에 자랑스럽게 붙여 놓은 이력대로 칼의 조부 대까지 올라 간다.
무려 서부 개척 시대까지.
“원하는 대로 했잖아. 대체 마음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거야.”
“여기를 사야겠어.”
순간 칼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러면서도 늙은 얼굴에 점점 활력 이 도는 게, 그는 천생 장사꾼이 었다.
믿기는가.
이십 평 남짓에 직원이라곤 여섯 명 밖에 없는 이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연 일억 달러의 수익이 발생한다는 게? 하지만 미 당국에 납세하는 것은 일 절 없다.
사무실은 뉴욕의 중심에 있지만,서 류상에 있는 그들의 본체는 케이맨 제
도에 있었다.
그래서 금융 당국의 조사는 물론이 거니와 어떤 집계에도 빠져 있었다.
칼이 신신당부했다.
그의 아내 제인에게는 본인을 대했 던 것 같이 하지 말라고.
약속하지 않으면 동업자이기도 한 그의 아내를 호출하는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하지만 쓸데없는 우려였다.
나는 그의 아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공격적인 태도를 단번에 바꿨다.
무척 뻔뻔한 일이지만, 이 대행업체 에 대한 욕심이 커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나 못지않게 뻔뻔했다. 우리는 그의 아내 앞에서 어색할지언정 정중 한 가면을 유지 했다.
그의 아내는 숫자 더미 서류들이 아 니라 갓 구워 낸 쿠키 상자를 들고 있 을 것만 같은,중년의 백인 여자였다.
그녀는 거래가 성사되면 다시 젊었 을 적의 몸매를 되찾겠다고 말했다.
다름 아닌 케이맨 제도에서 말이다.
나는 이들 엘리트 부부의 얼굴에서, 야자수에 둘러싸인 대저택에서 선탠 하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부부의 나이는 50대 후반.
이쯤 은퇴하고 왕족 같이 살 만한 나 이.
여자가 말했다.
“이번 거래에 다른 회계 법인을 끼고 싶지 않아요. 그게 우리의 입장입니 다. 왜인지는 아시겠죠?”
한 번에 수억,수십억 불이 오고 가 는 거래는 거래 당사자와 당사자들이 고용한 회계 법인들 사이에서 전쟁이 치러진다.
하지만 여자는 사전에 그런 싸움은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나도 환영했다.
우리가 거래하고 있는 건 ‘비밀을 다
루는 방법과 인프라’니까.
괜한 회계 법인들을 고용해서 내부 비밀들을 다 까발릴 필요가 있을까.
조세 포탈 대행업체를 인수하기는 했어도.
부모님께 위험한 거짓말을 하면서까 지 뉴욕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 었다.
하나는 금융 제국의 기사들을 모집 하는 것.
나만의 오 총사.
내게는 그들을 영입할 만한 자본금 이 있었고,더 미뤄서는 안 되는 일이 었다.
그들이 두각을 보이기 전에 낚아채 야 한다. 성공 못 한 자신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을 때. 독립 헤지 펀드를 창립하기 전에.
질리언 다음의 두 번째 기사는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찾았다.
이름은 흔하디흔한 제시카.
하지만 그녀의 능력만큼은 흔하지 않다.
학벌도 좋지 않고 집안도 구리면서, 금융의 천상계에는 오로지 남성만 진
입할 수 있다는 월가의 고전적인 법칙 을 깨트린 여자다.
월가의 하찮은 병졸.
뉴욕 증권 거래소의 일개 전화 서기 인 그녀를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푸드 트럭을 기웃거리고 있는 무리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 다.
그녀뿐만이 아니라,나머지 다섯 번 째 기사까지 아직은 성공하지 않은 인 사들이었다.
다섯 중에 성공한 인사는 질리언 혼 자뿐.
김청수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질리언
밑에서 종자로 훈련받아야 할 것이다.
일정들을 꾸준히 소화해 나갔다.
뉴욕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엔 계획했던 질리언을 포함한 넷을 영 입 했다.
내 발걸음은 자연히 월가의 뒷골목 으로 향했다.
뉴욕에 온 두 번째 이유 때문이 었다.
월가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배회하 고,허리춤에 권총을 보이듯이 껴 놓 은 갱과 약에 취한 매춘부가 존재하는 그런 뒷골목이 없다.
우리들이 ‘뒷골목’이라 불렀던 장소 도 높은 빌딩이 해를 가리고,성공한
엘리트들이 들락거리는 반듯한 곳이 었다.
그러나 거기에 운집해 있는 업체들 때문에 뒷골목이라 불렸다.
하나는 앞서 인수한 대행업체와 동 류인 업체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간 조사원들 의 사무소다.
사립 탑정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알 려져 있지만,그들이 하는 일은 밀실 살인 사건에서 살인범을 찾아내는 게 아니다.
특히.
월가에 터를 잡은 그들은 투자자들
을 위한 실사와 보험 회사들의 의뢰를 전담한다.
내가 애용했던 업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깨끗한 간판을 찾아다 녔다.
깨끗한 간판은 최근에 개업했다는 증거면서,최근까지 실무진에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뜻.
시 경찰국이나 연방 경찰국의 일원 혹은 군인으로 말이 다.
내 경험에 따르면.
미 민간 조사원의 능률이란 우리나 라 전관예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판뿐만 아니라 내부 집기들까지도 깨끗했다. 잘 찾아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상담원은 내 얼굴을 보더니 복장부 터 빠르게 훌었다.
고급 재킷과 바지 그리고 구두까지, 비록 어린 동양계라고 해도,내 행색 만큼은 월가에서 잘나가는 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저희와 거래하신 적이 있으신가
요?”
“없습니다.”
나는 일반 고객들과 똑같이 상담 테 이블로 안내받았다.
상담원이 그들 ZOPI 그룹의 홍보 책 자를 내밀었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80명의 수사 관이 얼마나 뛰어나고 전문적인지, 또 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인 그룹인지에 대한 페이지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상담원은 내게 맞을 거라 생각한 페 이지를 직접 찾아서 보여 줬다.
투자 심사 건에 대한 성공 사례들이 었다.
그중 유명 식품 회사의 창립자와 미 성년자들 간의 동성 스캔들을 주요 사
례로 다루고 있었다.
업체의 조사로 창립자 파트너들의 금전적 피해를 최소화시켰다는 게 주 내용이다.
“실사 때문에 나온 게 아닙 니다.”
준비해 뒀던 가짜 명함을 꺼냈다.
사실 더 이상은 가짜라고 할 수 없었 다.
명함 속에서 가짜라고는 이름 하나 뿐,케이맨 제도에 존재하는 신탁 회 사는 바로 어제 자에 설립이 끝난 두 개 업체 중에 하나였다.
하나는 대행업체를 인수하는 데 쓰 였고, 다른 하나는 지금처럼 신분 세
탁용이다.
상담원은 명함에 적힌 회사 이름을 골똘히 쳐다보며 물었다.
“신탁 관리자시군요. 찾으시는 조사 관이 있으십니까?”
“파트너 급이시고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면,어느 분이든 상관없습니다.”
“따라오세요.”
조사관이 악수를 청한 손에는 흉터 가 가득했다. 살짝 드러난 팔 상부에 도 부대 문신을 지운 흔적이 남아 있
었다.
짧은 헤어스타일에 다부진 인상 그 리고 뚝심 있는 눈빛.
그는 얼마 전까지 군에 있었던 게 틀 림 없었다.
“존 클락입니다.”
그가 뭔가를 직감했다는 듯,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에단입니다.”
“우리는 신탁 회사의 일도 많이 처리 하고 있습니 다. 보통은 수혜자를 찾는 일이죠.”
“그럼 잘 찾아왔군요. 저도 같은 이 유로 찾아왔습니 다.”
사설 업체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합법을 추구한다. 실종자 조사를 맡길 때에도 가족 관계를 증명해야 하고, 지명 수배자 추적에도 당 형사 사건의 관계자임을 증명 해야 한다.
그러나 신탁 자금의 수혜자를 찾는 건만큼은 철두철미하지 않다.
흐지부지하게 처리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신탁 자금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신 탁 관리자와 수혜자 그리고 예치자 간 의 비밀.
그래. 마치 스위스 은행들처럼.
이미 동종의 의뢰들을 해 왔던 그였 기에,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바비. 수혜자의 이름입니다.”
조사관은 이름과 사회보장번호 그리 고 기록된 주소지 따위를 기다리고 있 었다.
그러나 그런 게 있을 리가.
“현재 나이는 12세에서 15세. 뉴욕 에 거주하고 있을 겁니다.”
그 뒤로 내 말이 더 이어지지 않자, 조사관은 어색한 미소를 지 었다.
“몇 가지 특징적인 외모가 있긴 합니 다. 하지만 그 외 정보는…… 솔직히
말씀드리죠. 부끄러운 일이지만 분실 되었습니다.”
“음. 공고를 내시는 게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그건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조사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 덕 거렸다.
“우리의 바비는 예치자와는 어떤 관 계죠?”
“미안합니다. 저희 쪽에선 제공할 수 있는 게 더 없습니다.”
“에단. 열둘에서 열다섯까지의 바비 가 뉴욕에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습니 까?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것도 확실
하지 않지요? 뉴욕에 거주하고 있을 거란 건 어떻게 추정했습니까?”
“브루클린 태생입니다. 맞습니다. 현 재 뉴욕에 없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버몬트,매사추세츠, 뉴저지,코네 티컷,펜실베니아. 뉴욕 주와 맞닿은 주만 다섯 개입니다.”
“저희라고 이 의뢰가 터무니없다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요는 비 용이 문제 아닙니까?”
조사관은 상담원에게 건네받았던 명 함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아니에요. 골드런 신탁의 요구는,
북미 대륙 전체를 조사해 달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 말입 니다. 여기는 월가입니다. 존. 혹시 제 가 다른 분과 상담해야 합니까?” 조사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 만 이내 서두른 대답이 나왔다.
“조사 비용이 수혜금을 초과할 거란 뜻에서 말한 겁니다.”
즉,네 회사에 그 정도의 양심이 있 냐는 거였다. 나는 답답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수혜금이 얼만지 모르니까 그런 말 씀을 할 수 있으신 겁니다. 비용은 신 경 쓰지 마시고,최대 인력으로 진행 시 켜 주십시오. 파트너 업체들과 협 력 하시는 조건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어 쩌면 북미 대륙 전체를 들쑤시는 일 아닙니까.”
“진심은 아니시겠죠?”
“물론 진심입니다. 단축된 시간에 따 른 인센티브는 당연, 업계 최고 수준 의 성공 보수도 보장하겠습니다. 계약 서만 준비해 주시죠.”
터무니없는 의뢰에, 추정할 수도 없 는 비용까지 감당하겠다니.
조사관은 할 말을 잃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바 비를 찾아낼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 까?”
북미의 민간 조사원 업체들을 다 인 수하는 한이 있더 라도 말이 다.
그아이.
아니,그 새끼가 팔악의 리더. 일악 (―惡)으로 불리게 되니까.
현재 네 가지 작업을 병행 중이다.
1. 던전이 봉인되어 있는 야산의 벌 목 작업.
2. 조나단 인베스트먼트의 확장.
3. 영국령 맨 섬에 150억 달러짜리 신(新) 투자 회사 설립.
4. 그 새끼,일악 추적. 및 김청수 찾
기.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교정을 끝낸 이 원고는 바로 두 번째. 조나단 인베스트먼트의 확장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협상은 긍정 적 이 었어. 하지만 ANC 와 블루 록에서는 금융 위원회의 승인 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 우리도 마찬가지고.”
“나도 들려 줄 건들이 여럿 있는데. 그래.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노트북부터 꺼냈다.
그때 뒤통수가 따가운 것은 조나단
의 시선 때문이 었다.
조나단은 내 어투가 확연하게 달라 진 걸 눈치챘다.
영어에도 존댓말처럼,격식 있고 예 의 있는 표현들이 따로 존재한다. 지 금까지는 조나단에게 그런 표현을 써 왔었다.
“자. 이것부터 빠르게 봐.”
원고를 띄우고 노트북을 건넸다.
멍해져 있던 조나단의 얼굴에 슬그 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뭘 그렇게 멍청히 있어. 모니터를 보라니까.”
그제야 조나단의 고개가 내 얼굴에
서 노트북으로 돌아갔다.
“이건 뭐야?”
“ANC와 블루 록이 금융 위원회 승 인을 언급하고 나왔다는 건 쪽팔린 일 이야. 대놓고 말하는 거잖아. 네가 초 대박을 친 건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 고.”
“내가 아니라 너야. 썬. 그래서 이 건…… 아…… 원고군. 네가 쓴 거 야?”
“일단 보고 나서 얘기하자.”
크게 관심을 보인 조나단이 원고를 훑기 시작했다.
흑흑 넘어가던 스크롤이 점점 느려
졌다.
그는 모니터 속의 원고와 나를 번갈 아 쳐다보면서 또 똑같은 물음을 던졌 다.
“이건 자서전이 아니야. 투자 학습서 지. 열세 살짜리 머리 어디에서 이런 게 나올 수 있는 거야. 추세를 예측 할 수는 있었겠지. 그래서 포지션을 독점 했던 것까지도 그렇다 쳐. 천재들의 뇌 속을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그걸 해석해 주는 과정 말이다…… 환장하 겠군. 학위 없잖아,너. 있어?”
대답할 가치가 없는 물음. 조나단도 바로 혼자 수긍했다.
“용케도 복수를 계획 중이었네. 대박 이다. 이거 한 방이면 다 나가떨어질 거야. 누구도 허튼소리 못 하게 될 거 라고. 썬!”
조나단이 과장되게 떠벌리고 있어 도, 결국엔 결과론이다.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내 기억 속에 는 남아 있는 서적들의 이론들을 쑤셔 박았다. 그러니 그럴싸한 거다.
미래를 알아야만 할 수 있는 투자 방 법을 신의 영역에서 한 단계 낮은 천 재 투자가의 영 역으로 다운 그레이드 시켰다.
“잘 봐. 화자는 내가 아니야. 서문도
비워 뒀지. 거기에 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왜 매니저가 됐고 월가에는 어떻게 입성했는지를 넣어.”
휙휙.
내 말에 조나단이 고개를 거칠게 저 었다. 완강한 거부였다.
예상하던 바다. 내가 물었다.
“음양(陰陽)이라고 알아?”
“어느 정도는.”
“음양은 어느 하나만이 존재할 수는 없어.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만물이 형통하지. 너와 내가 그렇게 되자고.”
“나는 네가 양으로 세상에 나오길 바 라지만. 하아. 안 되는 일이지.”
“그래. 실랑이는 오늘로 끝이야. 내 공로를 훔쳐 간다고 생각 하지 마. 내 가 못하니까,네가 대신해 주는 거뿐 이야.”
“성년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내 가 되찾아 가야 하는 순간이 분명히 오니까.”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는 몇 년의 영 국 유학과뉴욕에서의 매니저 기간 도 중에 멀어졌다. 그 뒤부터는 동기와 동료만 있었고,각성자로 살아가면서 부터는 동료만 남았다.
각성자들 사이는 친구란 있을 수 없 는 관계였다. 조나단과 나도 그랬다.
우리는 철저하게 동료였다.
몬스터 시체 등의 전리품과 포인트 를 나눴지, 우정을 나누지는 않았다. 여기서도 그 관계가 유지될 거라 생각 했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그때의 조나단이 아니었다.
그의 성품은 척박한 월가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약하고 인정 있고.
녀석이 동업자에서 친구가 되자고 했을 때.
나는 생각했었다.
그래.
한명쯤은 사치를 부려도 되지 않을
4–.
어제.
조나단이 원고를 가지고 뉴욕으로 돌아갔던 날에는 들어왔을 때만큼 시 끄럽지 않았다.
그를 마중 나왔던 영접 인사들은 물 론 정•재계 인사들이 새 대통령의 취 임식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나단이 출국했다는 사실은 이튿날 일간지에 조그닿게 다뤄졌다.
그날 아침 이메일 함에는 뉴욕에서 들어오는 바비들의 사진이 쌓이고 있 었고,새로운 경영자가 된 칼과 제인 의 조수들이 보내 온 인사 메일도, 영 국에 넘어간 질리언의 진척 보고서도 있었다.
하지만 요 근래 가장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정작 늦고 있었다.
〈 사장님. 아직 멀었습니까?〉
<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번 주에 눈이 내려서 말이죠. 현장에는 언제 나오실 수
있으십니까? 아주 깨끗하게 빡빡 밀었습 니다. 분명히 흡족하실 겁니다.〉
전일의 명의로 렌트한 차를 몰고 나 갔다.
지금 시절에 교통경찰들이 요구하는 면허증이란 만 원짜리 한 장이라서, 큰 사고만 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야산은 최 사장이 호언장담한대로 흉물처럼 변해 있었다.
능선을 타며 이어지는 다른 산과 언 덕들은 푸른 그대로였기에,벌거벗은
야산이 눈에 확 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나마 3층짜리 마을 회관의 공사가 먼저 끝나 있어서 다행이 었다.
갓 지어진 회관을 지나쳐 골목골목 들어갔다.
그러다 산 초입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최 사장을 발견했다.
“좋네요. 잔금은 내일 입금하겠습니 다.,,
벌거숭이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추가 공사는 언제쯤……
“그 건은 규모가 훨씬 큽니다. 사장 님 업체도 리스트에 올려 보긴 하겠습
니다만 통과되기 어 려울 겁 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바위 하나 못 보셨습니 까? 독수리 부리처럼 톡 튀어 나왔고 둘레는 대략 10미터 정도로 큼니다. 특이한 바위라 눈에 띄 었을 텐데요.” 최 사장은 잠깐 기다리는 말을 남기 고 인부들에게 뛰어갔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중년의 인부와 함께였다.
야산 전체를 뒤지고 다닐 수고를 덜 었다.
인부와 나는 최 사장의 트럭으로 산 의 중턱까지 올라갔다. 그런 다음 인
부의 기 억을 따라 함께 움직 였다.
땅에 힘이 없어서 무너지는 구간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가시나무들이 얽 혀 있는 것보다는 이동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윽고 인부가 가리키기도 전에, 독 수리 부리 바위가 시선에 들어왔다.
확실했다.
잡풀과 나무들을 다 날려 버린 이후 에야 제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저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 까. 저 바 위 밑을 지나가며 가졌던 생각들이 아 직도 뚜렷하다.
저 바위를 무너트리면 도망 갈 기회7} 생기지 않을 까? 그런데 내 능력치로 저 바위를 무너트릴 수는 있나? 젠장. 젠 장. 마지막 장의 안배를 제대로 누리기 만 했더라도 이깟 군인,민간인들 따위
아니,감각 대신 근력 위주로 뜨기만 했더라도…….
군인들의 삼엄한 인솔 아래 던전으 로 끌려가던, 그 때의 내가 눈앞에 있 는 것만 같다.
일단 최 사장과 인부를 돌려보냈다. 그런 다음 당시 에 군인들이 닦아 놓았
던 길을 바위를 중심으로 그려 보기 시작했다.
던전 입구는 동북쪽으로 이백 미터 정도.
그 일대 어딘가에 봉인을 해제시킬 수 있는 포인트가 있을 것이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금만큼은 약을 삼킨 것처럼 온 몸 에 활력이 돌았다.
성큼성큼 크던 보폭도 어느 샌가 팀 박질로 변했다.
무너질 게 예상되는 약한 지반은 밟 기도 전에 시선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바로 이 느낌이다 싶었
다.
회귀 전에 가능했던 강력한 직감에 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해도, 미약하 나마 내가 각성자였다는 사실을 자각 하게 만든다.
가파른 이백 미터를 단숨에 주파한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다.
주변 어디에 포인트가 있다.
나는 우연히 던전을 발견했었던 각 성자들처럼 포인트 반경으로 들어가 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러면 던전이 제 존재를 스스로 알
려 올 것이다.
주변을 배회했다.
이윽고 그토록 기다려 왔던 빛이 순 간 번지는 시점이 있었다.
번지는 속도만큼.
날아가는 속도도 눈 깜짝할 사이였 다.
다시금 돌아온 환한 시야.
그 중심에서 또렷한 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위에 덧씌워지는 문장!
[ 업적 달성 효과로 특성 ‘탐험자’를 획득 하였습니다. ]끝이 아니다!
[ 축하합니다. 최초로 던전을 발견 하였 습니다.]온다!
[ 최초 발견 보상으로 ‘첼린저 박스’를 획 득하였습니다.]동테도 은테도 금테도 아니 었다.
플레티넘 등급의 영롱함도,그 아래 박스들의 특징들을 한데 머금고 있는 마스터 등급도 아니 었다.
눈부신 광휘를 두르고 있는 박스 하 나가 떴다.
내게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 자신을 열어 달라고!
심장이 쿵 한 번 뛰었을 때가 신호였 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자 속에서 나올락 말락 장난치고 있는 저 빛무리를 향해서.
떠라!
이선의 스킬 !
떠라! 떠!
첫 번째 첼린저 박스에서는 회귀의 기회가 떴고,두 번 째 박스에서는 팔 선 중 서열 여섯 번째 녀석의 스킬이
떴었다.
팔악 팔선 중 어떤 녀석의 것이라도 상관없다. 놈들의 것들은 각 분야에서 정점에 있었다.
[첼린저 박스가 개봉됩니다.]무엇이냐. 세 번째 첼린저 박스에서 나오는 건!
상자 안에 뭉쳐 있던 빛들이 일거에 쏟아져 나왔다.
화악 –
너무도 눈이 부셨지만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것만 같았던 빛 들이 사실은,한데 응집되어 가슴 쪽 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새 줄기로 변한 빛이 열린 상자 와 내 가슴을 잇고 있는 것이 다.
광선(光宣)이 사라지자마자 점퍼를 던져 버렸다. 웃옷도 움켜쥐었다.
급한 마음이 도리어 방해가 되었다.
‘江: ᄃ: ᄃ:
기一그t:t.
하지만 옷이 늘어나는 소리 따위는 신경 쓸 바도 아니 었다.
고개를 최대한 숙이자, 가슴 정중앙 에서 약간 위로 그것이 보였다.
아아.
보이기로는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문신일 뿐인데,나는 감격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브론즈에서 골드 상자까지 인장이 뜨는 확률은 상위 박스들에 비하면 비 교적 높다.
하지만 플래티넘 상자와 다이아 상 자를 거쳐 마스터 상자까지 오면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게 바로 인장이 었다.
인장!
하물며 첼린저 상자에서 뜬 인장이
었기에 그 가치는 절대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본 적은 물론이고 들어 본 적도 없었 다.
그런데 자그마치 ‘부활’이란 꼬리표 를 달고 있지 않은가!
상태 창을 열어서 인장 정보를 확인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의 효능을!
그래도 확인해 보긴 해야겠지.
[ 부활 (인장)효과: 1회에 한해, 죽은 자가 다시 생명 을 얻습니다.
등급: s]
“됐어……
인장은 민간인들의 세계에서도 특별 했다.
인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단 각성자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
도!
특유의 성질 때문에 마켓에서도 거 래가 가능할 뿐더 러 시세가 대단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이제 나는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살리는 게 가능 해졌다는 뜻이다.
유난히 감격에 사무쳤던 건 과거의
고난들이 떠올라서 가 아니 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천,수만 번의 사냥.
사선을 쉼 없이 넘은 각성자도 한 번 마주하기 힘든 게 첼린저 박스다.
과거에 나도 이걸 얻기 위해서 수천 리터의 피를 흘렸고 잔인하리만큼 긴 인내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고작 땅을 디딘 것만으로 얻은 것에 대해,지난 고통들이 억울한 게 아니 다.
첼린저 박스에서 부활의 인장이 튀 어나온 순간.
바로 그때.
우리 부모님부터 생각났기 때문이었 다.
[ 던전을 개방하시겠습니까? ]거부했다.
각성자들이 존재하고 군 당국도 준 비된 시절이 아니었다.
산 아래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운 명과 직결되는 일이란 말이다.
사실,화성 야산의 던전은 F 등급이 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
만.
나의 유령 회사들이 다 까발려질 가 능성이 존재했었던 게 맞듯이 개방된 던전에서 몬스터가 기어 나올 위험 가 능성도 존재한다.
던전 등급이 높아질수록 배가 되고.
여기로 오면서 급하게 사온 낚싯줄 이 있었다. 정확히 백 미터인 낚싯줄 네 개로 구역을 표시한 다음, 핸드폰 을 꺼냈다.
심호흡 몇 번으로 들뜬 마음을 삭인 뒤였다.
〈어디십니까?〉
< 이제 막 로타리 진입하려고 하는데요. 돌아갈까요?〉
〈 바로 차 돌리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최 사장이 낚싯줄 안으 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메시지도 뜨지 않겠지.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기색이 보인다 면 그가 사전 각성자라는 뜻이 겠지만, 사전 각성자는 무척이나 희귀한 존재 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300평 조금 넘을 것 같네요. 건물
올리시려면 땅깎기 들어가셔야 할 테 고,어디에 올리실 거예요? 규모는 어 떻게?”
그가 엄청난 의욕을 보이며 물었다.
“회사에서 요구하고 있는 작업은 최 사장님께서도 해 본 적이 없을 겁니 다. 최 사장님께서 하실 수 있으실지 그게 좀.”
“말씀해 보세요.”
“땅은 손대지 않습니다. 표시한 구역 그대로 벽을 올려서 건물을 세워야 합 니다.”
“바닥이 없이요? 아…… 음…… 됩 니다. 안 되는 게 뭐 있습니까.”
“문제는 벽입니다. 회사에서는 최대 한 강력한 걸 바라고 있습니다. 두께 와 높이가 적어도 5미터는 되는, 강화 콘크리트로 말이죠.”
순간적으로 최 사장은 말을 잃었다. 국경 장벽에나 쓰는 물건을 여기에 쓰 겠다니 말이다.
“건물 다음으로, 산 둘레를 따라서 2 중으로 콘크리트 벽을 올릴 예정입니 다. 밑동에는 마지막으로 철망을 두르 고 감시 카메라 설치해서 주민들의 접 근을 막고요. 말씀드렸다시피 규모가 많이 큽니다.”
“왜…… 요?”
“예?”
“용도가 무엇이길래…… 혹시 말이 죠. 혹시…… 높은 쪽에서 내려온 오 더인가요?”
“그런 거였다면 최 사장님께 가겠습 니까. 자세한 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처지라.”
“허가 났습니까? 위험 시설 같은 데 허가가 날지.”
“아무래도 그렇죠. 회사에서도 관련 법안을 검토 중입니다.”
“무엇이든 저는 자신 있습니다. 선생 님! 시켜만 주시면,아 진짜 시켜만 주 십시오. 선생님께 폐 끼치는 거 하나
없게 하겠습니다. 이 최철민이 일생을 다 걸고 작품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 다.,,
“계획은 있으십니까?”
그 순간.
최 사장이 울먹이듯이 온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친구들뿐인 놈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자고 나면 꼴까닥 넘어 가는 데가 어디 한두 군데입니까. 대 후나 대현 숨통이 끊어질랑 말랑 하는 데, 우리 같은 동네 가게 수준들은 어 찌겠습니까.”
여기서 말을 자르면,그는 원통한 귀 신이 되어 구천을 헤멜 기세였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그렇지 아까 운 친구들 많습니다. 대후 대현 급은 아니더라도요. 기회만 났으면 아파트 도 세우고 공장도 지을 녀석들. 쎄가 빠졌다 아닙니까. 선생님께서 도와주 시기만 하면 그 친구들 제대로 모아 보겠습니다.”
“이번 공사도 비슷하게 진행하셨죠? 하지만 다음 공사는 규모가 너무 큽니 다. 하도급들끼리 뭉쳐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제가 머리 하겠다 아닙니
까.”
“몸집 크게 키워서 들어오시겠다는 거죠? 사장님, 그러다 중간에 일 틀어 지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그 원망 제가 어떻게 감당해요.”
“죽이 되든 떡이 되든 시켜만 주시면 요. 엎어져도 절대 원망 안 하고,죽을 때가지 은혜 갚으면서 살겠습니다. 진 심입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시는 대현, 대후. 이 러다가 무너지고 있는 거 아시죠?”
“하모요!”
“사장님이 제 아버지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
“예.”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겠습니다. 의욕도 알겠습니다. 동료분들 업체들 을 부채 껴서 인수하시겠다는 건데, 요즘 금리가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사람 피 말라 죽이기 십상입니다. 버 티기 힘드십니다. 일 어긋나면 수십 억대 빚 더미에 깔린단 말입니다.”
최 사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 절박해졌다.
회귀한 이후로는 처음 보는 눈빛이 었다. 1포인트 하나에, F급 몬스터 하 나에 매달렸던 녀석들에게나 보던 눈
빛이니까.
이번만 진행할 공사가 아니긴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기존의 건설 회 사를 인수해서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대형 건설 업체일수록, 체계가 잡혀 있어서 비밀이 존속하기 힘든 법이다.
그런데…… 하!
아무래도 이런저런 핑계를 생각하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약한가 보다. 원래 이렇지 않았는 디1—.
아버 지를 연상케 하는 사람들.
특히 정리 해고당하신 이후로 내 옆
에서 때론 선생님처럼, 때론 친구처럼 계셨던 우리 아버지.
문득 최 사장의 운전석에 끼어 있던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는 겁니까?”
“책임지겠습니다.”
“음…… 그럼 이렇게 하죠.”
“예?”
“제가 아는 외국계 업체가 있습니다. 제가 중간에서 다리 놔 드리고 부채 상한선까지의 투자금도 물어 오겠습 니다.”
최 사장은 순간 끊을 놓아 버린 것처 럼, 내게 달려들었다.
나를 와락 안아 버리는 그에게서 칙 칙한 흙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를 떼어 놓을 순 없었다. 그가 예전처럼 눈시울만 붉힌 게 아니 라,나를 안은 채로 흐느껴 버렸기 때 문이었다.
그의 체중이 내게로 점점 실렸다. 나 는 그것이 그의 삶의 무게로 느껴졌 다.
젠장.
아버지께서 정리 해고당하시던 날. 어머니를 껴안고 이렇게 우셨지.
“최 사장님.”
“죄송…… 합니다.”
“얘기가 다 끝난 게 아닙니다. 그 외 국계 업체에서는 투자 대가로 51% 이 상의 지분을 요구할 겁니다. 경영권을 보장받지 못하실 거 라는 거죠. 받아들 이고 말고는 최 사장님께 달렸습니 다. 물론 그것도 최 사장님께서 인수하실 업체들이 투자 회사의 기준을 통과해 야 가능하겠지만요.”
“기 회 주신 것만으로도……
“잘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일주 공사 가 일주 건설이 되는 걸 저도 보고 싶 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장님.”
“예! 죽을 때까지 은혜 갚겠습니다.
참말입니다! 참말……
결국 최 사장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끅끅대는데,그 가 원하는 대로 눈물이 멎지 않는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