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ntom thief Kim Seok-doo RAW novel - Chapter 58
61화 슬레이어 (1)
적룡파 빌딩 중에서도 가장 고층에 위치한 석두의 개인 사무실.
그곳에서 석두는 술잔을 기울인 채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노 회장의 제안.
분명 그것은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레이나는 위험한 존재다. 지금은 비록 정신체만 따로 활동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정신체조차도 상당히 강하다.
그런데 만약 레이나의 본체가 숙면기에서 깨어나게 된다면…….
인류에게 그다지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터.
레이나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의해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다.
만약 레이나가 그날 하루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면 인류는 멸망하게 된다.
이 얼마나 황당한 멸망 시나리오란 말인가.
운석 낙하로 인한 것도 아니고, 핵전쟁으로 멸망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어느 한 드래곤의 기분을 맞춰주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 세계에 존재하는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노 회장의 말을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게 된다.
물론 노 회장의 모든 말들이 전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도 충분히 품고 있어야 한다.
석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레이나가 물론 기분파 드래곤이긴 하지만, 레이나가 있기에 슬레이어와 같은 특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집단이 섣불리 활동을 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슬레이어와 같은 집단이 한두 군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들은 아군이 아니다.
레이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나게 되면, 이들이 오히려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세상 바깥으로 나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드래곤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인간이다.
차라리 드래곤이란 위험성을 내포하며 지내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어렵군…….’
오래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노 회장이 슬레이어라는 집단에 속해 있고, 드래곤의 보물을 훔친 자들 중 한 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만약 여기서 석두가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면, 분명 석두 역시 커다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슬레이어의 입장에서 레이나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는 석두를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석두에게 일급비밀 정보들을 흘리면서까지 자신들의 편으로 꾀하기 위한 노력을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석두가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기라도 한다면, 슬레이어의 입장에선 그저 난감해질 뿐이다.
석두는 레이나의 레어를 턴 도적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여기서 만약 석두가 레이나에게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한다면, 슬레이어에게 분명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석두를 제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빌딩 바깥으로 나와 집으로 향하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석두.
그와 동시에 슬며시 주변을 둘러본다.
‘…벌써 감시의 눈이 붙었나.’
현재 시각은 거의 자정이 다 넘어가는 중이다.
어두컴컴한 주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석두를 지켜보는 자들의 눈이 꽤나 많이 도사리고 있다.
‘행동 하나는 빠르구만.’
적룡파보다도 우수해 보이는 인재들이 석두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태도 충분히 예상한 바이다.
노 회장으로부터 일급 기밀을 들었을 당시, 분명 감시의 눈이 붙을 거란 예상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좋겠지.’
스스로 그런 결심을 하면서 집으로 향하기 위해 택시를 잡고자 큰길가로 나아간다.
그 순간.
“뭐야, 집에 가려고?”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석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리따운 외형을 뽐내는 한 명의 여성, 레이나가 석두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심심해서 술이나 한잔할까 생각해서 왔지. 그런데… 벌써 이미 마신 거 같네.”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거든.”
“그런 기분이라면 진작 날 불러주지. 마침 나도 오늘은 술이 땡기는 날이었거든.”
“무슨 날이길래 그러지?”
레이나가 술이 다 땡긴다고 하다니.
물론 특이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밤늦게 석두를 찾아올 정도라면 정말 술이 많이 고프긴 한 모양인가 보다.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피식 웃음을 토한 레이나가 가볍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준다.
“오늘이 내 레어가 털린 날이거든.”
“…….”
“그래서 술 좀 얻어 마실까 해서 왔어.”
레어가 털린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레이나.
물론 레이나의 입장에선 상당히 분통 터지고 속이 상할 일일 게 틀림없다.
그러나 드래곤은 시간을 달리는 존재다.
많은 시간을 보내온 탓에 과거의 일은 쉽사리 시간이라는 이름의 약으로 치료를 시켜 버린다.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만큼 기분이 많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이나가 자신의 도난당한 보물들을 포기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한 잔 더 할래? 오늘은 내가 살게.”
“…….”
가급적이면 집으로 가서 좀 쉬려고 생각했던 석두였으나, 오히려 이번 기회에 레이나로부터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조용한 가게를 알고 있다. 그쪽으로 가지.”
“가게보다는 네 사무실이 더 좋을 거 같은데.”
“…그럼 그쪽으로 가자.”
“오케이.”
기분 좋게 대답하는 레이나.
반면, 석두는 마법으로 체내에 쌓인 알코올을 자연스럽게 중화시키면서 재차 술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마련해 둔다.
* * *
적룡빌딩 로비에 접어들자, 석두의 모습을 확인한 경비원이 허리를 숙이며 재차 인사한다.
“아이고, 대표님. 놓고 가신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네.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 신경 쓰지 마시길.”
“예, 알겠습니다.”
경비원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엘리베이터 앞에 마주선다.
저 경비원 역시 슬레이어에서 심어놓은 첩자일 가능성이 크다.
주변이 전부 다 의심스럽다.
노 회장으로부터 숨겨진 진실의 내역을 들으니 더더욱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 자리에서 노 회장의 비밀을 들을 당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상을 하곤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역시 힘들긴 마찬가지다.
석두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 레이나가 옅은 웃음을 자아낸다.
“성실한 경비원이네.”
“그러게.”
별다른 의미 없이 대답하는 석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달하자, 레이나와 함께 올라타 그대로 최상층까지 향한다.
어두운 복도 끝에 도달한 석두가 비밀번호를 누르며 자신만의 개인 사무실을 개방한다.
들어오자마자 불을 켜는 순간, 내부가 환하게 밝혀진다.
“술은 어떤 걸로 할 거지?”
냉장고 쪽에 손을 뻗으며 묻는 석두였으나, 레이나가 그의 말을 자른다.
“괜찮아. 오늘은 내가 직접 가져온 술을 마실 거니까.”
“술을 가져왔다고?”
“오래 전에 공수해 둔 술인데, 마침 꺼내 마시기 적당한 거 같아서 레어에서 하나 가져왔어.”
“드래곤의 술이라…….”
지금까지 마셔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레이나가 직접 담근 술이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자, 여기.”
터엉.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이윽고 책상 위에 꽤나 큰 유리병 하나를 올려놓는 레이나.
“꽤나 독한 거니까 희석시켜서 마셔야 돼.”
“너는 그대로 마실 건가?”
“나야 술 가지고 취하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그렇군.”
레이나는 술에 취한 모습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애초에 드래곤이 술에 취할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여하튼 레이나의 조언대로 다수의 얼음들을 가져오는 석두.
술잔으로 사용할 컵 두 잔을 각각 레이나와 자신의 바로 앞에 내려놓는다.
이윽고 음료를 채운 뒤.
“자, 건배!”
“건배.”
레이나의 선창에 따라 석두 역시 후창하면서 마주 잔을 부딪친다.
짠!
경쾌한 유리컵들의 마찰음과 동시에 술 한 모금을 음미해 본다.
“오…….”
“맛이 어때?”
“나쁘진 않군.”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
지금까지 석두가 마셔본 술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술이라고 자부할 만큼 맛이 있다.
맛뿐만이 아니라 음료에 포함되어 있는 풍미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진하게 우러나오는 깊은 풍미가 석두의 미각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레이나가 사전에 경고한 그대로 알코올의 농도가 상당히 강하다.
한 모금만으로도 목이 살짝 따가울 지경인데, 이것을 한 잔 그대로 들이켠다면 아마 이 상태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질지도 모른다.
술을 즐기고 싶을 뿐이지, 취하고 싶은 기분으로 술을 마신 적이 없는 석두이기에 적당히 자신의 할당량을 스스로 조절하며 레이나와 술잔을 기울인다.
반면.
레이나는 딱히 술에 대한 리미트가 걸려 있지 않은 모양인지 연신 잔을 기울이며 벌컥벌컥 마셔댄다.
고와 보이는 외형과는 다르게 술을 마시는 스타일은 상남자가 따로 없다.
“푸하!!”
또다시 술 한 잔을 원샷한 레이나가 깊은 탄식을 자아낸다.
“인간이란 참으로 불상하네. 이런 술도 제대로 못 마시고. 너무 나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참 곤란하단 말이야.”
“네가 너무 강한 거겠지.”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
이들은 인간에 비해 월등한 신체와 우수한 마법 능력을 지니고 있다.
레이나도 드래곤이다.
인류가 상대하기에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
“…예전에 내가 너한테 물어봤었던 거 같은데.”
석두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입을 연다.
“너 이외의 드래곤이 또 있는지에 대한 질문… 혹시 기억하나.”
“응, 물론.”
“아직도 너 이외의 드래곤을 본 적이 없나?”
“뭐… 최근에는 본 적이 없지만, 어디선가 각자 잘 살고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예전에는 그래도 한두 녀석 정도는 본 기억이 나는데, 4천 년 전부터는 본 적이 없어. 죽기라도 한 걸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정말 인간계에 서식하고 있는 드래곤은 레이나 하나뿐일까.
혹시 다른 드래곤이 있지 않을까.
석두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직 석두가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다.
그저 레이나의 지시에 의해 이거 훔쳐 와라, 저거 훔쳐 와라 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모든 일이 그치고 있으니 말이다.
석두도 이제는 이 드래곤 레어 도난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다.
이제는 슬슬 자신도 뭔가 알아갈 단계가 되지 않았나 싶다.
“드래곤이 레어를 턴 범인에 대한 흔적은 아직도 잡지 못했나?”
“글쎄. 최근 벌어진 일도 아니니까 단서를 포착하는 데에 좀 애를 먹고 있긴 해. 하지만 뭐… 계속 꼬리를 밟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잡을 수 있겠지. 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슬레이어에 관한 사실을 아직까지 레이나에게 알릴 수는 없다.
레이나가 언제 인간계를 멸망시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슬레이어마저 없다면…….
레이나를 제압할 수 있는 존재가 있기나 한 것일까?
다른 드래곤이 존재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 다른 드래곤이 레이나의 폭주를 막아줄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장담하기 힘들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정말 나약한 존재로군.’
다시 한 번 술잔을 기울이며 졸지에 신세 한탄을 하게 되는 석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