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Gil seung woo RAW novel - Chapter 4
5화 까불지 마
학교를 다니다보면 눈에 띄는 여자가 있기 마련이다. 아연이는 그런 후배였다. 복학 후 1년 동안 같이 학교를 다녔지만 늘 그녀의 곁에는 남자들이 득실거렸고 난 그 수많은 경쟁력을 뚫고 그녀와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기에는 자신감과 의욕이 떨어졌다. 이렇게 전화번호라도 알게 된 건 마지막 학기에 조별과제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5명의 조원이 모여 각자 찍은 사진을 합쳐 좋은 결과를 뽑아는 콜라보 미션이었는데·· 누구나 그렇듯 조별 과제는 쓰라진 추억만을 남긴 채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하는 시늉이라도 했던 나를 좋게 봤는지 아연이는 가끔, 아주 가끔 내게 연락을 하곤 했다.
“선배? 뭐해요? 제 말 들리죠?”
“아? 응. 그 사진 내 꺼 맞아.”
“정말요?! 웬일이야? 선배 이 정도로 잘 찍었어요? 같이 학교 생활하면서도 선배 실력이 이정도 인 줄 몰랐어요. 아니 왜 내 기억엔 선배 사진이 없지? 그리고 기사 보니까 스포츠 오션이던데 거기 들어가신 거예요?”
그래, 몰랐겠지. 나조차도 어제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 놀랄 정도인데. 그리고 학교 때는 엄청 못 찍었거든.
“아니, 들어간 건 아니야. 프리랜서인데 그곳에서 연락이 와서 사진 넘긴 거야.”
“먼저 컨택이 들어왔다고요?! 와 앞으로 선배 엄청 잘나가시는 거 아니에요? 지금도 포털 메인에 사진이 걸려있는데.”
“하하, 우연히 찍은 사진이야.”
“우리 언제 밥이나 먹어요. 아니다. 선배 이번 주에 시간 언제 되요?”
잘 찍은 사진의 위력을 슬슬 깨닫고 있다. 난 사진 몇 장으로 꽤 많은 돈과 꽤 예쁜 여자와의 데이트를 손에 넣었다. 앞으로 더욱 좋은 날이 날 기다릴지도 몰라.
***
다음날 나는 다시 야구장을 찾았다. 어제는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었기 때문에 내 사진은 이틀 연속 화제성을 유지했고 난 보너스 포인트를 두둑하게 모아둔 채 이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른 특성은 사진을 좀 찍어본 후 결정할 생각이다. 앞으로 10경기도 남지 않은, 플레이오프 탈락 확정의 홈구장의 분위기는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오늘은 상위권 경쟁을 하고 있는 팀과 맞붙어서 관중이 꽤 있는 편이었다. 더불어 프레스석도 기자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오늘 연락 온 기자님 말로는 내 자리는 A-7이라고 했다. 내가 좌석에 자리를 잡자 뒤에 계신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스포츠 오션? 수습기자에요?”
“아, 프리랜서입니다.”
“야구 인기가 죽긴 많이 죽은 모양이네. 프리랜서가 다 나오고. 혼자 왔어요?”
“네, 혼자··.”
“아싸, 그럼 옆에 비겠네. 그럼 좀 실례 좀 하겠어요.”
아저씨는 신난 얼굴로 내 옆으로 이동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 아저씨가 오려던 자리에 누군가 왔기 때문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우뚝한 콧날 아래 얇은 입술이 벌어지며 말했다.
“스포츠 오션 수습기자 진영호라고 합니다. 거기 제자리인 것 같은데요.”
“와 스포츠 오션 너무하네. 초짜 애들 두 명 쓸 거면 우리한테 한 장 양보하지. 어이 거기 둘, 시야 방해하지 말고 우리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제대로 해라.”
‘부산 일보’라고 적힌 프레스증을 지닌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내 뒤쪽에 자리 잡았다.
“누구시죠?”
진영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 어제부터 스포츠 오션 프리랜서로 일하게 된 길승우라고 합니다.”
“네에. 어제부터 일하셨다고요? 나이가··.”
“24살입니다.”
“아 전 29살입니다. 죄송한데 사전에 연락을 받지 않아서요. 오늘 경기 같이 찍나 봐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한참 어린데 말 놓으세요.”
“아·· 그래도 되나?”
“네, 그럼요.”
“그나저나 프리랜서? 난 우리 회사 소속 프리랜서는 처음 봐서. 어디 학교 출신이야? 학교에서 힘 좀 썼나봐.”
“네? 전 제광대 나왔습니다.”
“··뭐? 아, 미안 처음 듣는 학교라.”
그렇겠지. 우리 학교는 충청남도 도내에서 가장 작은 청양군에 신설된 학교로 내가 사진학과 1기 입학생이다. 군대 때문에 1기 졸업생은 되지 못했지.
“뭐, 열심히 해봐.”
대학 소리를 듣자마자 날 무시하는 티가 역력했다. 근데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경우는 많이 당해봐서 상처도 되지 않는다. 오늘은 홈페이지 사연 공모 이벤트 당첨자가 시구를 했는데 일반인 아저씨라 기자들 역시 소소하게 몇 장을 찍는 선에서 끝났다. 난 내심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기는 서울 드래곤스가 4회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며 일찌감치 승부가 났다. 난 경기 장면 몇 장을 찍었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지지는 못했다. 아이템이라도 써야 스포츠 오션에 면목을 설 것 같아 조회 수 초과로 얻은 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등급 상승과 조회수 초과로 얻은 아이템이었다. 아이템을 쓰자 예상대로 치어리더들이 있는 자리 하나가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내 수준으로는 저 분들을 찍는 것이 최선인가 보다. 난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고 프레스석을 떠났다.
그리고 그날 찍은 내 치어리더 사진은 포털 사이트 4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다.
– 요즘 서울 드래곤스에서 유일하게 밥값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이분입니까?
– 솨라 있네!!!
– 요즘 스포츠 오션 치어리더 특집인가?
– 드래곤스가 엉망이니 시선을 돌린 듯.
– 부산 팬인데 내년에 이분 영입이 시급합니다.
– 우리팀의 유일한 유망주를 가지고 가시려고 하다니!
다음 날도 난 야구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수습기자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난 꾸벅 인사를 하고 카메라를 꺼내는데 진영호가 말을 걸었다.
“넌 야구 사진은 안 찍냐?”
“네?”
“그냥 치어리더 있는 곳으로 가지. 어제 사진 보니까 그곳에서 많이도 찍어더만. 그럴 거면 여긴 왜 오냐?”
“저기 이보세요.”
“너 이곳에서 무슨 사진을 찍고 싶은 거냐? 치어리더 애들 특성 신체 부각시켜서 찍은 사진이 인기 있으니까 사진 잘 찍는 줄 알고 착각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하는 거야. 왜 어제도 중간에 치어리더 있는 곳으로 가버리더구만.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아! 오늘 시구 하는 걸그룹 찍으려고 있는 거구나.”
아니 무슨 사람이 저런지 모르겠다.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시 카메라를 챙기자 그 놈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니 사진은 옛날 썬데이 나잇 같은 잡지에 딱 어울려.”
더 이상 자리에 있지 못하겠다. 난 화난 가슴을 부여잡고 카메라를 챙겨 그곳을 나왔다. 뭐 저런 개차반같은 놈이 다 있나 모르겠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사진을 찍고야 말겠어. 난 그 녀석을 한 번 노려보고는 자리를 떴다.
***
그 날 저녁, 중구 태평로 스포츠 오션 본사의 회의실엔 진영호와 윤성호 기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윤기자는 진영호가 쓴 기사를 하나하나 지적했다. 지적이 끝난 후 진영호는 조심스럽게 윤성호 기자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대체 그 프리랜서는 왜 쓰는 겁니까?”
“응? 아, 길승우씨.”
“보니까 3류대 나오고 사진도 별 볼일 없던데 왜 쓰시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요.”
그 때 우상진 부장이 회의실을 열고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흐음, 그래서 사진학과 최고의 대학을 나온 우리 수습기자님께서 속이 뒤틀렸나보군.”
“네? 아니 그게 아니라.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요.”
윤기자는 진영호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늦고 말았다. 부장은 수습기자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해줄까? 그 이유에 대해서 기분 좋게 말해줄까 나쁘게 말해줄까.”
“네?”
“우리가 자네를 뽑은 건 자네 사진에 가능성이 느껴져서 뽑은 게 아니야. 저어기 위쪽에서 자네 좀 잘 좀 부탁한다는 명령 아닌 명령이 내려와서 뽑은 거지.”
“하지만 적어도 전 이곳에 뽑힐 만한 스팩은 갖췄다고 봅니다.”
“뭐 일단 사진 얘기부터 할까? 그 친구가 찍은 사진. 야하지. 그래서 뭐? 자네는 같은 조건에서 그런 사진 찍을 수나 있어? 반쯤 벗은 여자 사진이야 연예부서에서 하루에 수백 장이 쏟아져. 그런 사진을 제치고 그 친구는 조회수가 나와.”
“하지만 야구장이지 않습니까. 야구장이면 야구장답게 선수들의 경기 장면에 집중해야지요!”
윤성호 기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 회의실에는 둘만 남았다. 부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진영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까불지 마.”
“네?”
“네가 찍은 사진 전부 다가 쓰레기야. 하나도 쓸 만한 사진이 없다고. 그 친구는 4일 동안 야구에 관련된 사진 중 2컷이 메인컷이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운이 좋아서 그런 장면을 찍은 겁니다.”
“기자라면 운도 실력인 걸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녀석이군. 네 녀석이 말하는 쓰레기가 오늘 찍은 사진이다. 방금 전 기사 올렸어. 어때?”
“이건 경기 중 사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항의하는 사진인데.”
“초반부에 결정 난 승부, 뒤로 갈수록 두 팀 다 의욕은 없었지. 오늘 홈런 3방을 때린 부산 마린스의 4번 타자 안대후 선수에게 빈볼이 들어갔어. 누가 봐도 고의지. 그래서 이 장면이 오늘 경기 중에서 야구팬들에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면이다. 사이트 들어가 보면 경기장면 캡쳐한 파일이 돌아다니고 있어. 이 장면을 제대로 찍은 건 전 언론사 중에서 우리뿐이다. 네 녀석이 찍은 경기 장면 100장보다 이 한 장이 더 가치 있어.”
“그리고 자네도 두 번째 사진을 찍을 때는 같이 있지 않았나? 자네는 뭘 찍었지?”
“이 사진이야 그렇지만 그 녀석이 찍은 치어리더 사진을 보십시오. 완전 저급하지 않습니까. 우리 신문 품격이 있지··”
“품격? 지랄한다. 언제부터 스포츠 신문에 품격이 있었냐? 야, 우리 신문이 왜 지금까지 버티면서 구독수 1위를 하고 있는 줄 알아? 대놓고 황색언론으로 나가서야. 연예인 가십, 스캔들과 각종 성적인 이슈들로 독자들을 자극시켜서 얻어낸 영광이지. 그런데 푸움격?”
“··”
“빽으로 들어왔으면 닥치고 하라는 일이나 해. 사진 수준 운운하지 말고. 그렇게 수준 운운하고 싶으면 여기가 아니라 예술 계통으로 갔어야지.”
부장이 생각보다 화난 것 같자 진영호는 말을 멈췄다. 그런 그를 보고 부장은 말했다.
“앞으로는 야구장 안가도 돼.”
“하지만!”
“왜? 아버지한테 일러서 날 자르게? 그 양반 자리로는 나 못 건드려. 다시는 야구장에 얼씬도 하지 마. 넌 아마 최고로 저급한 사진들을 찍게 될 거다. 형편없는 놈. 수습 주제에 질투로 아무것도 못 보는 놈이라니.”
부장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회의실 안에는 얼이 빠진 진영호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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