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187
188. 단 한 번을 위한(12)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의 빗금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 개인실인 것 같다. 다만,내가
있던 방은 아니었다.
킹사이즈의 침대와 새하얀 고급 시트.
곳곳에 호화로운 느낌의 목재 가구가 놓여있었다.
.……거참.’
일단,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다. 익시드의
후유증도 완벽하게 나았고.
몸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일어나셨습니까?”
하품을 하고 있자니,제복을 입은 여자가 방에 들어왔다.
유르넷이 었다.
하긴,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리 없다. “하루종일 잠만 자시더군요. 죽은 줄
알았습니다.”
“와 있었냐.”
“예,마스터가 오시기 전부터요.” 유르넷은 싱긋 웃으며 내게 물을
건넸다.
나는 물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벤트는 어떻게 됐지?”
“마스터가 쓰러지신 이후,폐회식이
열렸습니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났으니, 다들 원래의 대기실로 돌아갔지요. 이곳에 남은 것은 저희 니플헤임과 마스터 의 타오니 어뿐입 니 다.”
나는 창밖을 보았다.
해가 빌딩의 중턱에 걸려 있다.
저 멀리서,빛의 해일이 도시를 집
어삼키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 차원도시는 소멸합니다. 늦게 떠나면 저희도 휩쓸리겠지요.”
“그렇겠네.”
“아침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드시겠 습니까?”
“안 먹어. 입맛이 없다.”
침대 옆의 옷걸이에 갑옷과 외투가
걸려 있었다.
복장을 갖춰 입은 뒤,그 아래에 놓 여있는 칼집을 들어 올렸다.
카각.
긁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뽑힌 비프 로스트의 검날은 뚝 부러져 있었다.
비로소 아론과의 일을 실감할 수 있
었다.
“멋진 대결이었습니다. 리디기온도 감탄을 연발하더군요. 6성이 됐을 때가 기대된다면서.”
“….”
“마스터,역시 대단하십니다. 2관왕을 차지할 줄은. 지구도 뫼비우스도,마 스터의 이야기로 화제였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랭커들도 마스터에게 관 심을 기울이겠지요.”
“그건 귀찮은데.”
쓸데없는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으 니까.
뭐, 그들에게 계기를 준 것은 나였다.
익시드까지는 어떻게 넘어간다고 해도, 패검혼의 위력을 감출 수는 없다. 조 금만 눈썰미가 있는 마스터라면 내가 쓴 기술의 의미를 제대로 짚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무대 바깥에 설치되어있는 보호 장 벽을 뚫었으니 말이다.
’주목받기는 싫었지만…….’
패검혼을 쓰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가
없었지.
후회는 없다. 어차피 나중에는 벌어 질 일이었고.
“이건 어제 말한 것처럼 수리 좀 부 탁할게.”
“맡겨 주시길.”
나는 유르넷에게 검을 던졌다. 유르넷 옆의 공간이 열리더니 검을
쏙 집어삼켰다. 원래 비프로스트에는 자가 복구 기능이 있지만,기술이 기 술인 만큼 제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침실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바깥의 전경을 보면 호텔의 맨 꼭대기
층인 것 같다. 빛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신호등과 도로,각종 건물들을 집어삼 키는 증이었다.
“아론은?”
“옆방에 있습니다. 데려올까요?” “내버려 둬.”
할 말은 다 했다.
저 녀석과 다시 만난다면 타오니어 에서겠지.
아마 그때가 되면,내가 알던 아론 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마스터.”
“뭐냐.”
방을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유 르넷이 말을 걸어왔다.
“뮤덴이 아론의 귀화를 제안하더군요.”
“제안 정도가 아니라,의사가 확고 한 거 같습니다만. 두 발을 잘라서라도 안 내보겠다며 생떼를 부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어떻게 하긴. 집어치우라고 해.” “실례합니다만,저도 그 제안에 찬
성합니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유르넷이 눈을 감고 있었다.
“니플헤임 13층의 한 자리가 머지않아
비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무슨 뜻이냐.”
“뮤덴은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우 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이거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돌아오는 걸 막겠다고?”
“그렇진 않습니다. 적당한 때에 보 내줘야겠지요.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타오니어에서의 일이 끝난 다음이군요. 그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걸 택하지 않는다면…… 고민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니플헤임이 있을 거 같아?”
“물론입니다. 저희는 마스터도,이 세계도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 가능하면 오래오래,제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있으면 좋겠네요.”
유르넷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라니.
웃기는 소리를 하네.
“검이나 빌려줘. 수리하는 동안 쓸 게 없으니까.”
“현관 옆의 검을 가져가시면 됩니다.” 우산꽂이에 비프로스트와 똑같은
모양의 검이 들어있었다.
아이템을 살펴보니 A급이었다. 수
리될 동안의 예비로는 괜찮겠지. 나는 칼집을 벨트에 걸었다. “마스터.”
“또 왜?”
“저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웃고는 현관을 나섰다.
호텔 8층의 원래 방으로 돌아가니,
네 명의 멤버들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나의 말에 의하면 내가 실종된 직후, 니플헤임 측의 인원에게 나를 치료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대단하긴 하네요. 하루 만에 나을 상처가 아닌 것 같았는데.”
“일단 여길 떠야 돼. 뒤풀이는 대기 실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곧 차원도 시가 없어진다고 했어.”
“그럼요. 짐은 다 챙겼죠? 라디 언 니가 바로 앞에 비공정을 대기시켜놨 다고 했어요.”
다들 웅성거리며 방을 떠났다.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영웅들의 모습은 더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폐회식 뒤,반강제적으로 해산했다고 했으니.
“그나저나,오빠 사람 맞아요? 배틀 로얄 영상 봤어요. 다 때려잡고 다니 던데. 거기다 그 몸으로 개인전까지 가서 우승까지.”
“그러게. 독으로 빌빌대고 있던 누 구와는 다르게 말이야.”
“에이,언니도 잘해줬는데.”
제나와 에디스가 시시덕거리면서 앞서나갔다.
그 뒤에는 키샤샤가 육포를 우물거
리고 있었고,제일 마지막에는 벨키스 트가 똥 씹은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나는 픽 웃었다.
“개인전에 못 나간 게 그렇게 불만 이냐?”
“별로 그렇진 않소. 내 눈이 썩었다 는 게 유감일 뿐이지. 타오니어가 우 승하려면 선배가 나가는 게 정답이었소. 내가 나갔다면……:
벨키스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처럼.
“한 가지 묻고 싶소만.”
“말해.”
“그 기술에 선배의 패검혼이 뚫린 게
확실하오?”
“그뿐이면 다행이겠지.”
“세상 모르는 일이군.”
벨키스트는 흥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눈썰미가 좋아.
벨키스트는 아론의 기술을 어느 정도 간파한 것 같다.
호텔의 입구 바깥으로 나오자,주차 장에 서 있는 캐피탈리즘 호가 보였다.
비공정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 오더니 계단을 내려보냈다. 우리가 갑 판에 올라타자 비공정은 천천히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암케나는……;
아직 접속해 있었다.
사흘 가까이,하루종일 게임을 켜놓고
있다.
훌륭한 게임 폐인이었다.
〈월드 레이드 페스타!〉
[서브 이벤트 종료 및 보상 지급 안내] [월드 레이드 페스타의 서브 이벤트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참가해주신 마 스터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벤트 보상 및 순위에 대한 안내를….]
도시 전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는 위를 보았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한 숫자의 비공정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중형 비 공정부터 대형 빌딩과 맞먹는 규모의 초대형 비공선까지.
어림잡아 수백 대. 그러나 저 선단은 전체 규모의 일부에 불과했다.
‘메인 이벤트의 시작인가.’
서브 이벤트가 끝남과 동시에,이번
이벤트의 메인 메뉴인 월드 레이드가 시작된다.
저들은 레이드 몬스터가 나타난 지 점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수백 대의 비공정이 일제히 내는 소음에 귀가 먹먹했다.
“우리도,저기 낄 수 있는 거냐?”
“지금은 안돼.”
나는 키샤샤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지금은 말이지.’
아직 암케나와 나는 쪼렙이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은 사정이 다를 것 이다.
이번에 우리가 한 것은 시즌 이벤트의 맛보기도 되지 않았다.
2서버에서 내로라하는 수백 명의 램커들이 모여 견제하고,협력하며 초 고위 몬스터와 싸우는 월드 레이드는 픽 미 업의 수많은 컨텐츠 중의 백미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크라고.’
나는 암케나의 조작 화면을 보았다.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매 합니다.]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매 합니다.]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매 합니다.]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매 합니다.]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 매…….]암케나는 선물 상점에서 군마 조각 상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네 5성 티켓을 누가 가져다줬는데. 허구한 날 미니 게임에서 삽질만 하는 마스터를 우승시키느라 허리가 휘는 줄 알았다.
[4성급 차원도시의 랭킹 내역입니다.] [1 등 : 암케나(타오니어) Point] – 132,221[2등 : 로키(니플헤임) Point] [3등 : 꾸덕…….] – 85,234
니플헤임이 2등이라.
그것도 4성급 차원도시에서.
이미지 하락은 피할 수 없겠지만,
뭐 괜찮다.
어차피 유명세 같은 건 게임에 별 쓸모가 없으니까.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매 합니다.]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매 합니다.] [5,000골드로 ‘군마 조각상’을 구 매…….]나는 갑판의 철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캐피탈리즘 호는 이벤트 도시를 떠 나 차원 도약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 었다. 저 뒤편으로 레이드를 떠나는 비공정 선단이 멀어져갔다.
어디 보자,뭘 얻었나.
나는 암케나가 획득한 아이템 목록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반짝이는 무지개빛 티켓이었다.
전체 1등 보상으로 얻은 5성 확정 소환권.
태생 5성이라면 뭐가 나오든 평타 이상은 치는 만큼,파티 구성에 큰 도 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비공정 설계도.
이건 상위 비공정을 만드는데 필수 적인 아이템이었다.
그 외에도 고급 승급석이나 각종 희 귀 재료 등, 쉽게 얻을 수 없는 아이 템이 한가득 쌓여있다. 추가 확장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강림석이지.’
나는 품에서 보석 상자를 꺼냈다.
배틀 로얄의 우승 경품인 최상급 강 림석.
내게는 5성 소환권보다 중요하고, 꼭 필요했던 물건이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지만.’ 이 강림석으로 특수 던전을 개방한 뒤,
그 임무를 클리어해이만 각인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실패 확률도 존재하며,그 대 가는 오염 또는 사망이었다.
실패하면 끝난다는 거지.
일단 자세한 계획은 돌아가서 세우
기로 했다.
나의 앞을 결정할 만한 일이었으니. 그 녀석이 돌아왔을 때,약한 모습을
보여주긴 싫다.
뒤처지면 쪽팔리잖아.
부우우웅.
마침내 차원도시가 시야에서 사라 졌다.
캐피탈리즘 호의 갑판. 에디스와 키 샤샤는 선내로 들어갔고,가만히 있던 벨키스트도 훈련을 하겠다며 그 뒤를 쫓았다.
“끄응.”
내 앞에서,제나가 매듭진 비닐봉지를 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이거. 안 풀리네요. 어떻게 묶 은 거야.”
“줘 봐.”
편의점에서나 볼 법한 검정 비닐봉 지였다.
나는 제나에게 비닐봉지를 건네받 아 꽉 조여진 매듭을 풀어나갔다.
내용물이 꽤나 묵직했다.
“이건 뭔데?”
“거기 음식이 맛있더라구요. 가져가도 괜찮다고 해서 받아온 거예요. 오빠랑 같이 먹으려구 그러죠. 아침 안 먹었 잖아요.”
나는 봉투를 풀어서 제나에게 주었다.
“나이스 캡!”
제나는 휘파람을 불더니,봉투 안의 내용물을 늘어놓았다.
“제가 추천하는 첫 번째! 정말 놀랐 다니까요. 세상에 이런 맛이 있을 줄 이야. 혹시 들어봤어요? 상큼한 맛과 달콤한 맛의 조화가 일품인!”
제나가 우유 팩을 갑판에 놓았다.
색깔은 밝은 청록색.
“민트초……”
“너나 먹어.”
“네? 아니,이거 엄청 맛있는……
“너 먹으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너 많이 드시고. 다음은 뭐냐?”
“아,있죠. 보면 놀랄걸요. 짜잔!”
제나가 꺼낸 음식은 일회용 플라스
틱 접시 위에 랩으로 싸여 있었다. “탕수육이라는 음식이에요. 되게 웃긴
이름이죠?”
제나는 포장을 술술 풀더니 포크를 내 앞에 놓았다.
이건 먹을 만하지. 마침 배도 출출 하고.
“소스는?”
제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탕수육 소스가 담긴 그릇을 꺼냈다.
그리고 탕수육에 붓기 시작했다.
‘이런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