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oneer Simon RAW novel - Chapter 179
대영지 승격 (1)
“그럴 수도 있지만 제국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곳은 카리스타 후작의 영지에 속하기도 하고 사이먼 교단이 사실상 장악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거기를 노리면 제국도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에카테리나 왕국에서 협정위반으로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면 그들도 침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3국의 정세 상 현재 에카테리나 왕국의 입김이 가장 강했다. 제국일지라도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확실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이상 행동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음, 하지만 사이먼 후작은 현재 영지를 개척한다고 트라칸 반도에 나가 있어 골란 황무지를 놓고 다투는 국지전에 나서지 않을 것인데 말이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골란 황무지를 개척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곳에 몇몇 부족이 살지만 몬스터가 많아 제대로 통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곳에서 광산을 개발하여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국이 어지간한 병력으로 와서는 패배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더구나 전신 사이먼을 추종하는 사이먼 교단은 기사나 고위 용병이 많이 가입한 상황으로 쉽지 않을 것입니다.”
토르가 3세는 알커스 백작의 말을 듣고서도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영지 승격
사이먼이 흑마탑을 멸망시키고 해가 두 번 바뀌었다. 사이먼이 사이먼 교단을 만들고 흑마탑을 궤멸시킬 때에, 사람들은 뭔가 계속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지만 고작 한 번 플라스콘 제국의 황도 로바니아에서 정체 불명의 마왕이 등장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이먼은 정령을 소환하여 정령계와의 연결을 했고 정령친화력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정령술을 전수하였다.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이 정령사가 되었다. 고작 하급정령과 계약하는 하급정령사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중 급이나 상급도 계약할 것이다.
또한 기존 신들의 역사를 담은 ‘가온의 서’를 발간하였다. 물론 그로 인해 사이먼이 로바니아에 갔을 때에 크로이엘 교단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크로이엘 교단이 로바니아에서 천사장을 강림시키는 무도한 행위를 한 탓에 신전은 제국에서마저 고립이 되고 말았다.
물론 강림한 존재가 신계의 천사장이거나 그것을 강림시킨 주체가 크로이엘 교단이라는 직접적인 물증은 없기에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 일을 저지른 크로이엘 교단은 외부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반면 크로이엘 교단과 대립하는 사이먼 교단은 ‘가온의 서’를 일종의 경전으로 삼아 종교의 기틀을 다지면서 세를 확장하여 크로이엘 교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2년 사이에 엄청난 숫자로 불어났다.
특히 경전으로 사용하는 ‘가온의 서 해설집’은 이면에 크로이엘 교단을 은근히 배척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거기에 사이먼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여러 가지 경전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내부에 종교적인 체계가 확립이 되어 갔다.
특히 ‘몰락의 서’라 이름이 붙여진 중간계 파괴의 실상은 참혹하기 짝이 없는 역사였고 마계와 천계가 행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멸망한 흑마탑이 주로 타깃이 되었지만 현재 존재하는 크로이엘 교단의 만행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크로이엘 교단이 등장한 것은 사실상 인류가 몰락의 시대를 헤쳐 나온 이후였기에 몰락의 시대 직전이나 몰락의 시대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꾸준한 전도로 인해 제국만이 아니라 로크 왕국이나 에카테리나 왕국에서도 신도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수도 없이 많은 집회소를 만들었다.
또한 제국을 위시한 3국 외에 다른 왕국에도 사도가 등장하여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흉상을 보급하고 목걸이를 배부하여 사이먼 교단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크로이엘을 추종하는 귀족들이 무력으로 탄압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여 오히려 그런 귀족과 무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이 사이먼 교단을 공격하다가 실종이 된 것을 알지만 먼저 선공을 취한 상황이라 당시의 정서에 의하면 처벌하기가 곤란한 면이 컸다. 그렇기에 사이먼 교단에서 그들을 응징한 것을 알지만 개입할 수가 없었다.
한편 크로이엘 교단은 신전에서 예배를 두 시간 가까이 하였지만 사이먼 교단은 그들과 달랐다. 집회소는 보통 수련을 하는 시설에 만들어졌고 예배도 수련을 하기 전의 사전 행사 정도로 간단했다.
예배나 집회를 할 때는 사이먼의 흉상을 마주보면서 간단한 체조 비슷한 동작만을 하였다. 흉상이 없다면 목걸이를 밖으로 꺼내 모두가 흉상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사이먼이 만든 일종의 마나체조 같은 것이었다.
도인술 같은 마나체조는 흉상이나 목걸이의 흉상에 깃든 사이먼의 권능에 공명하여 신도들의 마나에 일깨웠다. 그렇게 하여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몸에 깃든 좋지 않은 기운을 정화시켜 주도록 했다.
물론 필요하다면 간단히 교리나 경전을 낭독하기도 했지만 형식에 치우치기보다 그저 마음속으로 전신 사이먼의 가호가 모두에게 내리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하여 수련을 하거나 일을 할 때에 몸의 상태를 활기차게 만들어 주고 기분이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신도들은 습관적으로 전신 사이먼을 생각하면서 마나체조를 하였고 그런 예배가 일상생활 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한편 이전부터 제국은 군사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흑마탑의 멸망이나 천사장의 강림이 있고 난 이후에 침략주의적인 정책을 상당부분 축소하고 내실을 다지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조건 설욕을 하려는 의지가 강해 산적한 여러 가지 문제를 외면했지만 냉정을 찾게 되면서 그런 문제까지 관심을 보였다.
사실 이는 사이먼을 의식한 정책이었다. 사이먼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일의 중심에 사이먼이 있다고 전제하고 무리한 침략정책으로 사이먼과 대결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역시 로크 왕국이나 에카테리나 왕국도 전쟁을 대비하여 각종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방어 위주의 방향으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들도 은연중에 이 일의 중심에 사이먼이 있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온건한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런 외부적인 움직임과는 별도로 사이먼의 엘칸토르 영지에서는 이주민을 받아들여 정착시키는 일이 착착 진행되었고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알레그로스 평원의 절반에 대한 개발은 차분하게 진행이 되었다. 물론 중간에 몇몇 무모한 자들의 영지개척 시도가 있었지만 그들은 가을이 되면서 엄청난 피해만 입고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영지 개척이 실패하자 도와주지 않고 방치했다고 난동을 피웠고 결국 사이먼에게 제압이 되어 징벌을 당한 자도 있었다. 그런 자들의 행위는 사이먼을 주시하는 자들에게 모두 알려져 끝까지 사이먼을 음해하려는 자는 만인의 지탄을 받기까지 했다.
오지의 영지에서 있던 일이라 왕도 사비올라에서는 모를 것이라 생각하여 돌아온 후에 이상한 소문을 냈지만 사이먼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세력이 워낙 많은 탓에 결국은 진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니 그런 시도를 한 자는 귀족모독죄로 역으로 재차 징벌을 당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들이 행한 중상모략의 내용은 사이먼이 방해를 했다는 것은 기본이었고 엘칸토르 영지의 기사나 영지병이 몰래 개척단을 습격했다는 내용은 보통이었고 심지어는 사이먼이 흑마법을 사용하여 몬스터 웨이브를 유발하거나 밤에 몰래 나타나서 무지막지하게 살인을 자행했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엘그란데 강을 경계로 하여 평원의 남쪽 지역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지만 개척을 하겠다고 내려간 자들은 결국 겨울이 되어 몰려온 몬스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되자 이상한 논리로 사이먼을 원망하는 자들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거짓으로 사이먼을 음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한 논리로 비난을 했다.
사이먼이 충분히 몬스터 토벌을 할 수 있는데 자신들이 개척할 곳의 몬스터를 토벌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개척을 못하게 하려고 미개척지의 몬스터를 그대로 둔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사이먼이 몬스터를 토벌하면 자신들의 개척이 성공했을 텐데 몬스터 토벌을 하지 않아 실패했다고 비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에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했지만 그런 비난은 끊이지가 않았다.
한편 사이먼은 엘칸토르 영지의 영주로서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영주성을 마침내 완공시켰다. 영주성에는 영주관을 비롯하여 관공서, 기사단, 귀족과 기사들이 살 저택, 워프게이트를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사실 그간 사이먼은 곳곳에 머물 수 있는 장원을 두고 적당히 머물렀지만 이제 영주관이 생겼기에 부모를 비롯하여 가족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사용하던 장원은 일종의 별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동생인 앤더슨도 1년 전에 귀족가의 영애와 결혼을 하였고 영주성에 있는 저택에 같이 살게 되었다. 물론 결혼을 하기 전에 마침내 반쪽짜리지만 마스터가 되기도 했다. 마스터가 된 후에야 결혼할 결심을 하여 결혼시킬 수 있었다.
사이먼은 드디어 영지의 인구가 80만을 돌파하고 영지군이 마침내 1만에 도달하자 선제후인 대영주가 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용병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있지만 정식 영지병은 1만 정도에 불과했다.
우선 대영주 다섯을 설득하여 서명을 받고 왕국의 재무성에 대영지 자격을 심사하는 절차를 요청하였다. 영지가 면세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지만 면세에도 적지 않은 예외가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평상시에도 재무성과는 연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 하나가 몬스터 사냥과 관련된 세금이었다. 사체 자체는 세금이 없지만 사체를 가공할 경우에 상당한 금액의 세금을 왕국 재무성에 납부해야 했다.
대영지가 되면 사전에 받은 면세 혜택이 기간에 상관없이 사라지기에 굳이 대영지가 되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독립영지로 그대로 있으면 면세혜택보다 다른 부분에서 손해가 적지 않기에 신청하기로 했다.
일단 독립영지의 경우에는 휘하의 관리나 기사들에게 작위를 수여할 수가 없었다. 대영지가 되면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작위를 부여할 수가 있었다. 작위에 따라 숫자가 정해진 것도 있고 일부는 조건만 정해진 것도 있었다.
대영지의 조건은 이미 오래 전에 대부분 갖춘 상황이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고 간단한 심사만 한 후에 바로 통과가 되었다. 인구 50만이 되면 대부분 통과할 수 있는 조건이니 80만이 넘은 상황이라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재무성 심사를 통과한 후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왕실과 대영주들이 모인 제후회의의 대영지 인준이었다. 제후회의는 왕실이 아홉 개의 대영지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나머지 33개의 대영주가 존재했다.
이 회의에 참석할 권한을 얻고 계승 작위인 백작 이상의 작위를 받는 것을 승인받아야 했다. 재무성의 대신이 자격 심사결과를 보고한 후에 대영지의 자격에 관하여 논의를 하고 승인 여부에 대한 표결을 하여 대영주 42석중에 2/3 이상인 29명의 찬성을 얻어야 가결이 되었다.
제후회의는 보통 5일간 개최가 되었는데 첫날 안건이 상정되었고 마지막 날 오전에 안건에 대한 투표를 하여 의결하였다. 엘칸토르 영지에 대한 대영지 인준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결국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대영지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결의가 되자마자 바로 국왕인 아일라 2세로부터 사이먼이 계승 작위인 백작을 수여 받았으며 엘칸토르 영지는 백작령으로 선포가 되었다. 또한 마침내 폐회 직전에 제후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제후로 인정받아 폐회식에 참석할 수가 있게 되었다.
마침내 에카테리나 왕국의 34번째 대영지로 엘칸토르 영지가 등록이 되었다. 사이먼은 작위를 받은 지 10여 년 만에 계승 작위인 백작을 수여받았고 마침내 대영지를 가진 제후가 되었다.
아울러 대영지의 영주가 된 사이먼은 휘하의 귀족들에게 작위를 수여할 수가 있게 되었고 휘하에 서임할 수 있는 기사의 수도 사실상 무한에 가깝게 늘어났다.
또한 대영주가 되었기에 아버지 크라인에게 자작의 작위를 수여하게 되었고 동생인 앤더슨은 남작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이는 사이먼이 대영지의 영주가 되었기에 당연히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아울러 앤티론 백작가에 있는 시조묘에 들러서 묘 앞에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조치를 취한 후에 내성에 저택을 장만할 수가 있게 되었고 마침내 승작연을 거행하기까지 했다. 저택은 왕실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를 양도받았다.
물론 승작연은 왕실에서 먼저 축하연을 열어주었고 다시 날을 잡아서 사이먼이 승작연을 열었다. 이 두 가지 연회는 제후회의에 참석하는 대영주들이 대부분 참석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이먼은 이런 것이 번거롭게 생각이 되었지만 관례이기에 따라야 했다. 이 자리에는 단승작위인 남작부터 모든 귀족이 참여할 수가 있었다. 실로 대대적인 축하연회를 왕실과 사이먼이 개최해야 했다.
작위를 수여받은 후 한 달 후에 왕실에서 3일간 축하 연회를 개최하였고 다시 3일 후에 사이먼이 3일간 연회를 개최하였다.
왕국에서 대영지가 새로 생긴 것은 무려 50년 만이기에 더욱 더 행사가 특별했다. 왕국의 크기가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이기에 모두가 축하를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