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292)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293화
함정 카드 (2)
“뭐, 뭐야. 대, 대체 무슨….”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
점액질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있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 누구냣!?”
다급히 무기를 찾는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지팡이 끝이 푸른색으로 빛나며 새하얀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흐응.”
어두운 방 너머, 여인의 교태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항거할 수 없는 색기에 사타구니가 반응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이슨 헤멧. 미국 출신 월드 랭커 중 하나로 예전에 김시훈 씨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꼴사납게 패배한 놈이었네요.”
“크읏!”
지팡이를 든 사내, 제이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검룡 김시훈과의 결투.
전 세계로 방송된 그 결투에서 패배한 이후 자신은 온갖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이야 검룡하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강한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검룡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겪으며,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디언즈에 가입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를 잡았는데.
“대, 대체 어떻게.”
자신이 계획을 눈치챘단 말인가.
아니, 단순히 눈치를 챈 것만이 아니다.
마치 함정을 파 놓고 그 속에 몸을 숨긴 포식자처럼, 은밀히 숨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감이 방심하는 그 순간을.
[간단하잖아.]통신 구슬을 통해, 강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렌시아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만들었어.]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발렌시아는, 멕시코와 콜롬비아 등 격변의 날 이후 망해 버린 국가의 영토를 꿀꺽 집어삼킬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다.
그런데 건설에 도움만 주고 이렇게 망가지도록 내버려 둔다고?
[치안이 안 좋은 게 아니지.]안 좋아지도록 방치한 것이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예를 들어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강해진 가디언즈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든가. 뭐, 이유야 얼마든지 있겠지. 그레이스 맥커빈이 미국인 출신이라고 해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은 이상 가디언즈가 지나치게 커지는 건 막고 싶었을 테니까.]함정을 파 놓고 기다렸다.
욕망을 마음껏 해방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그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 원주민이라는 먹잇감을 무방비하게 도시에 풀어놨다.
아마 일을 부추기기 위해 몇몇 플레이어들을 시켜 바람잡이의 역할도 맡게 했을 것이다.
“어,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헛소리를….”
[원래 이해할 수 없는 대부분의 일은 말이야, 이렇게 됐을 때 어떤 새끼 배가 가장 부른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법이거든.]새뮤얼 헤이든이 지니고 있던 폭발 장치는 가짜였다.
즉, 그도 다른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의미.
그렇다면 그 다른 누군가는 왜 가짜 폭발 장치로 협박하도록 속였을까?
‘애초에 목적이.’
테러가 아닌, ‘테러가 일어났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면.
앞뒤가 맞았다.
거기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집단을 추려보면, 아니 애초에 이 도시를 만드는데 누가 가장 큰 투자를 했는지 생각하면 답은 하나였다.
[뭐, 가디언즈의 잘못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야.]그들이 가디언즈에 소속된 플레이어에게 부패와 타락을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강제하지 않더라도, 부추기는 것만으로 인간은 너무도 쉽게 부패한다.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밑바닥은 의외로 가깝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훌륭한 사냥개를 키우려면 철저하게 교육시켰어야 했는데 말이야.]쯧,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제이슨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어, 어차피 영상은 내 손 안에 있다. 이게 퍼지면….”
긴장에 찬 숨을 토해내며 쥐어짜듯 말했다.
하지만.
-찔꺼억.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깜빡 잊고 있던 소리가 더욱 커졌다.
제이슨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리며 다급히 몸을 돌렸다.
“프로즌 노바!”
제이슨이 손에 쥔 지팡이에서 강력한 서릿바람이 휘몰아쳤다.
지팡이 끝에 달린 푸른 보석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떠올랐다.
“호호호.”
여인의 야릇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찔꺼억. 끈적거리는 액체가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뭐, 뭐야.”
제이슨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목소리만 듣고 눈부신 미녀가 나타날 거라 예상했지만,
정작 방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끔찍하게 생긴 녹색 촉수였다.
“웁!”
제이슨은 코를 찌르는 악취에 입을 막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했던 그였지만, 뭔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녹색 촉수는 기이할 정도로 역겹게 느껴졌다.
방구석에서 흐물거리며 나타난 녹색 촉수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비록 제가 전투 능력 자체는 떨어지지만.”
18개의 붉은 눈이 제이슨을 향했다.
뱀처럼 긴 혓바닥이 입술을 핥았다.
“고작 월드 랭커 하나쯤을 상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리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녹색 촉수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고작 월드 랭커, 라고?”
제이슨은 입술을 짓씹었다.
김시훈에게 처참히 패배한 이후, 무수히 들었던 조롱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빌어먹을 괴물년이…!”
후우우웅!
섬뜩한 서릿바람이 몰아쳤다.
수 미터 크기로 몸을 키운 얼음 창이 리리스를 향해 쏘아졌다.
-카드드득!
녹색 촉수와 얼음 창이 허공에 얽혔다.
“이익!”
제이슨은 있는 힘껏 마력을 쏟아부었다.
바닥에서, 벽에서, 천장에서 얼음송곳이 튀어나와 촉수 괴물에게 쏘아졌다.
“괴물년이라니, 참 실례되는 인간이군요.”
18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나 아름답다 칭송받아왔던 그녀에게, 괴물이라니.
너무도 이질적인 표현이다.
리리스는 짙은 노기(怒氣)를 띄우며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나며 녹색 촉수가 길게 뻗어나갔다.
-퓨숙!
촉수의 끝에서 노란 고름이 퍼져 나오며 장막처럼 뿜어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던 얼음송곳이 고름에 닿자마자 연기를 피어 올리며 증발했다.
“우욱!!”
제이슨이 입을 틀어막았다.
무시무시한 악취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우웨에에에엑!!”
참지 못한 제이슨이 바닥에 쓰러져 속을 게워냈다.
리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미향(迷香)의 효과가 너무 강했나요?”
보통의 악마라면 맡기만 해도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극한의 미향이 인간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마법사가 캐스팅조차 포기한 채 구토를 쏟아내고 있다면 그 뒤는 볼 것도 없었다.
리리스는 짙은 미소를 입가에 띠며 제이슨을 향해 걸어갔다.
“크윽!”
제이슨은 품속에서 또 다른 통신 구슬을 꺼냈다.
다급히 마력을 불어 넣은 후 소리쳤다.
“습격! 습격이다! 지금 당장 연구실로 튀어와!!”
그가 거주하는 건물에는 미국 쪽에서 붙여둔 플레이어들이 외부의 습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연구실까지 침입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가세한다면 최소한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터.
-치지지지직.
하지만 그런 기대를 배신하듯, 통신 구슬에서는 망가진 라디오에서나 들릴 법한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노이즈에 섞여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악!!
-뭐, 뭐야 이 괴물은!!
-사, 살려….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
살점과 근육이 찢겨나가는 섬뜩한 소리가 통신 구슬을 통해 흘러나왔다.
-리리스.
들어본 적 없는, 낮게 깔린 목소리가 통신 구슬을 통해 흘러나왔다.
맹수와도 같은 사나운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쪽은 다 정리가 끝났다.
“호호. 알았어.”
리리스라고 불린 촉수 괴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의 입가가 비틀어 올라갔다. 귀까지 찢어진 입술이 더 없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쪽도 곧, 끝날 거야.”
리리스의 눈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 계열 마법이 발동했다.
“아, 으.”
붉은 빛을 정면으로 받은 제이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 목을 움켜쥐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아, 아아아!!”
땡그랑. 손에 쥔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바지 사이가 축축하게 젖었다.
“오, 오지 마!!”
“호호호.”
촉수 괴물이 천천히 걸어온다.
찔꺽. 찔꺽. 투명한 점액질이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리리스가 손을 뻗었다.
제이슨의 뺨을 타고 녹색 촉수가 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히, 히익!”
“걱정하지 마세요.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기다란 혓바닥이 입술을 핥았다.
“당신에게는 물어 볼 게 많거든요.”
“커헉! 컥! 끼잇!”
촉수에 휘감긴 제이슨의 몸이 발작을 일으키듯 튀어 올랐다.
사지를 파르르 떨더니 눈을 뒤집어 까며 그대로 기절했다.
“하아. 참 너무 예쁜 것도 죄라니까.”
리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면 이래서 안 좋았다.
보자마자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할 정도니 심문을 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
[…….]연구실에 설치된 영상 속에서 강우가 어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리리스는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눈치채곤 방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마음속에는 마왕님밖에 없으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후훗, 그러니까 질투하실 필요 없어요.”
리리스는 황홀하다는 듯 연구실의 영상을 쓰다듬었다.
[씨발!]강우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이자를 심문해서 이번 일에 연루된 인간이 누구누구였는지 알아낼게요.”
[…그래, 부탁해.]영상이 끊어졌다.
리리스는 두 뺨에 손을 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아, 정말 귀여우시다니까.”
질투하는 강우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참기가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콱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
“뭐… 전에 여행가서 잔뜩 맛보긴 했으니.”
당분간은 참을 만하다.
“그러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제이슨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자자,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깨우듯,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으으.”
제이슨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끼아아아아아아악!!!”
악몽이 시작됐다.
* * *
서울 63빌딩.
이제는 다른 빌딩들에 밀려 최고라는 타이틀은 내준지 오래된 그 빌딩의 옥상에, 푸른색 균열이 나타났다.
-쩌저적!
허공이 찢어지듯 균열이 점차 벌어졌다.
“하아, 하아.”
열망(熱望)에 찬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균열 속에서 나온 존재는 다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코를 벌렁거리며 입가를 비틀었다.
“아, 아아! 드디어! 드디어!”
온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리던 그 존재가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검은 깃털이, 63빌딩 옥상에서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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