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479)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480화
예언의 악마 (1)
“끄응.”
다음 날.
강우는 아침 일찍 집 밖으로 나섰다.
기지개를 켜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결국 한 시간도 못 잤네.”
새벽 내내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크흠.
가볍게 헛기침을 흘렸다.
슬쩍 고개를 내렸다.
‘프랑소와… 이 자식, 힘냈구나.’
함께 전장을 헤쳐온 전우를 내려다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강우는 근처 편의점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한 박스 구입한 뒤, 수호의 전당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를 지나자 새하얀 복도가 보였다.
‘웬일로 시훈이가 마중을 안 나오네.’
수호의 전당에 갈 때면 귀신같이 기척을 감지한 김시훈이 쪼르르 달려왔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김시훈이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비웠나?’
에키드나와 할키온처럼 노스트리안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일에 동원된 것일 수도 있었다.
“흠.”
강우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레이라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들긴 후.
“레이라ㅆ… 크윽.”
집무실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에 강우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게 뭔 냄새야….’
왜 방에서 시체 썩은 냄새가 나는 거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아… 강우, 씨… 왔, 나요?”
눈두덩에 짙게 다크써클이 깔린 레이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탕, 탕, 탕.
그녀의 옆에는 김시훈이 앉아 기계처럼 서류를 읽고, 결재 도장을 찍고 있었다.
서류를 내려다보는 김시훈의 눈에서는 평소의 총명한 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집무실에서 흘러나오는 시큼한 땀 냄새와 우중충한 분위기.
대체 어떻게 쌓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높게 쌓아 올려진 서류의 산.
강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음… 아침 일찍부터 일하고 계셨네요.”
“…예? 아침? 지금이 아침인가요?”
레이라는 초점이 흐려진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후, 후후. 일주일 전부터 계속, 계속… 이곳에 있느라 아침인 줄도 몰랐네요.”
그녀는 가늘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 음.”
망가진 건가?
‘뭐, 리리스에게 들었을 때부터 대충 이럴 것 같다는 예상은 했지만.’
서울 복구 작업이 이토록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지금 여기서 반쯤 죽어 나가고 있는 레이라와 김시훈의 공이 가장 컸을 것이다.
‘뭔가 미안해지는데.’
자신 또한 지난 일주일간 김태현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레이라와 김시훈은 정신없이 바쁘다는 표현조차 모자랄 정도의 격무에 시달린 것 같았다.
‘게임 개발 날짜가 갑자기 석 달 앞으로 당겨진 개발자들을 보는 느낌인데.’
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가지고 온 에너지 드링크를 레이라와 김시훈에게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 예, 괜찮죠.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이니까요.”
레이라는 쾡한 눈빛으로 강우가 건네준 에너지 드링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푸하! 으… 그래도 좀 살 것 같네요.”
“좀 쉬면서 하세요.”
“…쉴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레이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패러사이트 습격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도시도 아닌 ‘서울’이 습격당했다는 점이었다.
격변의 날 이전이나, 그 이후나 서울은 인구 밀집도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
민간인 피해가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 자체는 습격 규모에 비해 굉장히 적었지만, 그만큼 부상자가 많았다.
“각국의 정치가들은 뭐 하고 있답니까?”
“그분들도 정신없이 일하고 있죠. 그래서 더 문제지만.”
레이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참사를 겪었던 한국이나, 참사를 겪지 않았던 다른 나라나 열심히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구호물자.
받아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더 받아내려고 하고 줘야 할 사람은 무슨 수를 써도 적게 주려 하니, 그사이에 끼어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가디언즈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작정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어느 한쪽 편을 들어주게 된다면 나중에 가서 문제가 커지게 될 것이다.
강우에게 있어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잡아먹는 것이 아닌, 양쪽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강우 씨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하시던 일은 끝나셨나요?”
레이라는 초롱초롱 희망에 불타는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런 지옥 같은 격무의 상황에서 강우가 가세해 준다면 업무량을 큰 폭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했다.
‘저, 적어도 샤워만이라도…!’
레이라는 꿀꺽 침을 삼키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음….”
그녀의 시선을 받은 강우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직은 태현이의 기억을 되찾는 데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런….”
레이라의 표정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강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절망이 서렸다.
강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어.’
사실 김태현의 기억을 되찾는 것은 이미 포기한 상황.
원래 이곳에 온 목적 또한 고생하고 있을 레이라와 김시훈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던 일이 끝나지 않았다 말한 이유는 극히 단순했다.
‘존나 하기 싫거든.’
차라리 악마가 우글거리는 것이 낫지 저러한 서류 지옥은 사양이었다.
초췌해진 레이라를 볼 때마다 마음속 한 편에 자리 잡은 양심이 굉장히 찔렸으나,
‘오늘 난 다른 이유가 있어서 여기에 온 거야.’
자기 최면에 가까운 말로 움찔거리는 양심을 보호했다.
마침 안 그래도 레이라의 업무를 도와준다는 목적 말고도 그녀를 찾아온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응응, 좋아. 그걸로 가자.’
강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레이라 씨를 찾아온 이유는 신계에 대한 일 때문입니다.”
“…신계요?”
“예.”
강우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사나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코빼기도 보이지 않나 해서요.”
“아….”
레이라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생각을 못 했었네요.”
신들을 속박하고 있던 율법의 제약은 이미 풀린 상황.
패러사이트의 습격에서 신들이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악신들의 현신을 통제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정말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오지 않았다면 다행이지만.’
강우는 눈썹을 좁혔다.
‘최악의 경우에는….’
신계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패러사이트가 지구를 습격하고 있는 와중에도 코빼기도 비치지 못했을 정도로 큰일이.
“잠시만요. 가이아 님에게 연락을 시도해보겠습니다.”
레이라도 가벼운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어째서.”
레이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우는 쯧, 혀를 찼다.
‘역시.’
올림푸스 신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패러사이트의 습격을 방관하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가이아 님과… 연락이 닿지 않아요.”
레이라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강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씨발.’
패러사이트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굵은 가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크윽!”
“저, 저 괴물을 막앗!!”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굵은 가지 위에 거대한 궁전이 있었다.
궁전의 이름은 울림푸스.
지구의 인간들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알려진 신화의 존재들이 있는 장소였다.
-화르르륵!
경외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올림푸스 궁전은 지금은 화마에 집어 삼켜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궁전의 잔해 위에,
“헤헤.”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어딘가 멍하게 느껴지는 눈빛을 지닌 소년은 해맑은 웃음을 흘리며 올림푸스의 신들을 내려다보았다.
탁.
소년이 가볍게 발을 구르자, 허공에 녹아들 듯 몸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한 소년이 우라노스의 앞에 나타났다.
“크윽!”
우라노스가 다급히 몸을 뒤로 빼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소년의 손이 움직였다.
“얌전히 있어.”
“커헉!”
우라노스의 배를 거칠게 후려쳤다.
단 한방에, 우라노스의 신격의 보호가 찢어발겨 졌다.
강렬한 충격을 받은 우라노스의 몸이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히히. 그럼, 잘 먹겠습니다~”
소년은 쩌억 입을 벌렸다.
뱀의 그것처럼 흉측하게 벌어진 입이 우라노스의 머리를 씹어 삼키려고 할 때,
“그 더러운 손을 치우거라!!”
갈색 머리칼을 지닌 여신의 호통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거대한 충격파가 소년의 몸을 후려쳤다.
소년의 몸이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끄응, 뭐 하는 거야, 아줌마.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들지 않는다는 말 못 들어봤어?”
소년은 짜증스럽다는 듯 여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칼의 여신, 가이아는 사나운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바알. 네놈이 감히….”
“히히히.”
바알은 어깨를 들썩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너무 화내면 이마에 주름 잡혀, 아줌마.”
“…….”
“그리고 사실 짜증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소녀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입술을 핥았다.
“외계(外界)의 존재가 어떤 맛인지 어엄~청 궁금했는데 그걸 양보하고 여기에 온 거니까.”
“그게 무슨 말….”
“헤헤헤. 무슨 말인지 궁금해?”
소년은 씨익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너희들이 그놈에게 속고 있는 꼬라지가 너무 웃겨서 먹을 걸 포기하고 여기로 온 거라고.”
“…….”
가이아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속았다고…?”
“헤헤. 응! 속아도 아주 제대로 속았지!”
바알은 해맑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언제까지 속나 궁금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보다.”
활짝 웃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딘가 멍하게 느껴졌던 눈빛에 광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진실을 알려주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히히, 모든 진실이 다 까발려지면 그놈은 어떻게 나올까? 응? 또 무슨 방법으로 속이려고 할까?”
광기에 찬 소년의 눈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한 번은 어떻게 넘어가겠지? 하지만 두 번째는? 세 번째는? 무슨 수로 넘어갈까? 응?”
“아까부터 무슨 말을….”
“히, 히히히!! 상상해 봐! 기대되지 않아? 그 거만하고 싸가지 없는 놈이 모든 진실이 까발려진 채 좌절하는 모습이!!”
바알은 양팔을 활짝 벌리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내가 널 찾아온 이유야.”
“…….”
가이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알을 바라보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말의 맥락도 없고, 논리도 없다.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필터 없이 주절거리는 느낌.
가이아는 바알이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니? 응?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
바알은 귀 아래까지 입가를 찢으며,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가이아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전신에서 신성을 뿜으며 전투를 준비했다.
“과연 이걸 보고도… 제정신이 아닌 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딱.
바알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푸른 창이 가이아의 눈앞에 떠올랐다.
플레이어들이 ‘시스템’이라 부르는 존재.
티탄의 율법으로 만들어진 화면이었다.
-공포를 느끼고 싶다고?
화면에 보이는 것은,
그녀가 마음속 깊이 신뢰하고 있는 권속의 모습.
“나, 나의 아이야!”
자신의 권속은 외계에서 습격한 기생(寄生)의 왕과 대치하고 있었다.
“크읏.”
그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일방적으로 바알에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그래, 질릴 정도로 느끼게 해줄게.
화면 너머로 보이는 강우의 입가에,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광기에 가득 찬 미소가 지어진 것이 보였다.
‘악마’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비틀린 미소가.
“…나의, 아이야?”
가이아는 떨리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광휘(光輝)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개문(開門).
마해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