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484)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485화
얼어붙은 신전 (1)
-너는 인마, 아무것도 아니야.
머릿속을 인두로 지진 듯, 조롱섞인 그 말이 선명히 새겨졌다.
바알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뺨을 긁었다.
찌직. 피부가 갈라지며 광대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흉측한 상처가 생겼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검은 핏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광기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비틀비틀. 몸이 흔들린다. 시야가 일그러진다. 호흡이 거칠다.
그 말이, 그 말만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 라고.”
까득, 까드득.
사납게 이를 간다. 박살난 이빨의 파편이 핏물과 섞여 턱을 타고 흐른다.
“내가, 먼저였어.”
광기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아니라, 내가 더 먼저였다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렸다.
바알은 푸른 화면 너머로 보이는 마왕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자리는, 그가 지니고 있는 것들은.
“내가, 가져야, 했던, 거라고.”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등골을 타고 타오르는 듯한 증오가 퍼졌다.
그 증오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바알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너는.”
그 증오를,
“아무 것도 아니야.”
‘열등감’이라 불리는 감정을 담아 씹어뱉듯 말했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검은 피로 손바닥을 적셨다.
바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몬.”
“예, 바알 님.”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어둠이 일렁였다.
검은 물감 한 방울을 물에 떨어트린 것처럼 어둠이 퍼지더니, 이내 한 곳에 뭉쳤다.
지팡이를 짚은 꼽추의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끝났어?”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 ‘종말의 날’에 대한 준비는 거의 끝났습니다.”
아몬은 깊게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에일레스에게도 정확한 날짜를 전했고, 구천지옥의 악마들도 모두 규합시켰습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둠가드를 놓친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요.”
“상관없어.”
바알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어차피 둠가드 따위, 대세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피라미에 불과했다.
그딴 아무 상관도 없는 것보다.
“아직 ‘잉그리움’의 정체는 들키지 않았겠지?”
“예.”
아몬은 주름진 입가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헤.
사납게 일그러져 있던 바알의 입가가 활짝 올라갔다.
“그래, 그러면 됐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것이 있는 이상, 자신의 승리는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히, 히히히.”
바알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강우를 노려보았다.
“지금 마음 것 비웃어둬.”
머지않아.
“넌 모든 걸 잃게 될 테니까.”
까드득.
바알은 순식간에 자라난 이빨들을 신경질적으로 갈았다.
“자.”
바알은 몸을 일으켰다.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말(終末)의 시작이다.”
넓게 벌린 팔 너머로,
드넓은 붉은 언덕 전체를 뒤덮고 있는 마(魔)의 군세가 괴성을 내질렀다.
* * *
-우우웅.
수호의 전당의 바닥에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한곳에 뭉치더니,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형님!”
강우가 다시 물질계에 현신하자, 그 기척을 감지한 김시훈이 쪼르르 그에게 달려왔다.
김시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우를 살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응.”
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신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선 레이라 씨를 좀 불러줘. 같이 설명하는 게 빠를 테니까.”
“예.”
김시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이라의 집무실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집무실로 달려가기 전에, 김시훈의 뒤를 따라 들어온 레이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강우 씨, 신계와 교신이 끊어진 이유는 알아내신 건가요?”
“예.”
강우는 신계에 있었던 일들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물론, 자신과 가이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바알 그 자식이….”
“…그래서 교신이 안 됐던 거군요.”
강우의 얘기를 들은 레이라와 김시훈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대체 바알의 목적이 뭘까요? 패러사이트의 습격을 틈타 신계를 습격했다면 대부분의 신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을 텐데….”
레이라는 강우가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강우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바알의 목적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그녀에게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하아. 외계의 습격에 바알까지… 정말…….”
레이라는 초조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희는… 이 세계를 지켜낼 수 있는 걸까요?”
걱정이 담긴 목소리.
강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킬 수 있습니다. 저희가 힘을 합친다면.”
싸구려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우 혼자서는 바알은 막을 수 있어도 그의 군세까지는 막기 힘들었고,
가디언즈는 바알의 군세까지는 어찌 상대할 수 있더라도 정작 바알과는 싸워 이길 방법이 없었다.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둘의 힘을 합칠 필요가 있었다.
“호호. 뭔가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네요.”
“말하고 보니 그러네요.”
“하지만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사이 히로인들에게는 음욕(淫慾)에 찬 손길이 향하게 되는데….”
그거 소년 만화 아닌데요.
“크, 크흠. 농담이에요. 호호. 요즘 너무 바빠서 히토… 스트레스를 풀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그만.”
평소에 무슨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푸시는지 몹시 궁금합니다만.
“호호호호.”
고상하게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하지 마시죠.
“아, 시훈 씨. 어서 돌아가서 마저 서류를 처리하죠.”
“…아, 예. 알겠습니다.”
레이라는 김시훈의 손을 잡아끌고는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강우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단….”
가늘게 눈을 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시스템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지금처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당한다면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방법을 모르겠다는 게 문제인데….”
강우는 팔짱을 낀 채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다리를 떨었다.
애초에 그도 플레이어인 이상 시스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강우는 가늘게 눈을 떴다.
머릿속에 번뜩임이 스쳤다.
강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차연주를 자신의 화신으로 만들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브, 라고 했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 보고 있는 거 알고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띠링.
[율법의 보조 제어 시스템 ‘Eve’는 자의적인 판단이 불가합니다.]“얼씨구, 전에는 뭐 개새끼라면서요?”
[그건 플레이어의 오강우의 행동을 분석한 결과, 가장 적합한 칭호기에 자동적으로 부여된 것입니다.]“뭐요?”
이년이?
“이대로 내 행동이 모두 감시당한다면 안 그래도 없는 승산이 더 희박해지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눈앞에 떠오른 푸른색 메시지창이 흔들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현재 ‘Eve’의 권한으로는 일시적인 정보의 차단만이 가능합니다.]“정확히 얼마 정도?”
[49일입니다.]“그 정도면 괜찮아.”
어차피 바알과의 결전은 코앞에 닥쳐 온 상황.
일시적이나마 그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단, 플레이어 오강우가 초월격 신격에 도달할 시 영구적인 정보차단이 가능합니다.]“흠….”
‘초월급 신격이라.’
강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구적으로 바알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뭐, 어떻게 얻는지를 알아야 얻던가 하지.’
강우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단순히 포식을 많이 하는 걸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마해를 그의 몸 안에 지니고 있는 이상, 마기의 양이 부족해서 초월급 신격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해의 마기는 말 그대로 무한(無限)의 영역에 닿아 있으니까.
“쯧.”
강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일단 집으로 돌아갈까.’
더 이상 여기서 고민을 이어가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혼자서 수련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는 건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
그에게 직접 육체를 움직이는 수련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방에 결계를 치고, 내부의 기운을 다스리는 수련을 하는 것이 그나마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강우는 수호의 전당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띡, 띠딕.
지문 인식으로 현관문을 연 강우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임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한설아를 찾았다.
그때.
-투두두두두두!
“강우!!”
거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울리더니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폴짝 뛰어올라 강우의 목에 매달렸다.
“어이쿠.”
강우는 에키드나의 몸을 두 팔로 받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흐응! 흐응!”
에키드나는 특유의 콧소리를 뿜어내며 강우의 목에 얼굴을 부비부비 문댔다.
“어~엄청 보고 싶었어, 강우!”
에키드나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외쳤다.
“앙.”
얼굴을 문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강우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강우는 간지럽다는 듯 몸을 떨었다.
에키드나를 안은 채 거실로 이동한 강우는 그녀를 소파 위에 내려놨다.
“설아는?”
“연주가 도와달라고 해서 잠깐 나갔어. 그… 광휘교? 그 사람들 치료해 주면서 신앙심을 키우겠데.”
“오, 알아서 잘하고 있구만.”
역시 ‘오빠~앙’의 효과는 뛰어나군.
“에키드나 너는? 리리스 따라서 노스트리안에 대해 조사하러 간 거 아니었어?”
“흐응! 강우한테 보고할 게 따로 있어서 왔어!”
“보고할 거?”
강우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에키드나는 소파에 앉은 강우에게 다시 한 번 폴짝 달라붙으며 뺨을 비볐다.
“조금만 있다가 말할래.”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강우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에키드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최근에 같이 못 있어주기는 했지.’
한설아처럼 집착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에키드나는 강우에 대한 의존증이 꽤나 심했다.
“나, 엄청 열심히 찾아다녔어, 강우.”
칭찬을 해달라는 듯 머리를 쓱 내민다.
“그래, 그래. 잘했어.”
강우는 그녀의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흐응, 흐응! 조금만 더 하면 마스터 승격전인데 그것도 포기했다구!”
“마스터 승격전?”
뭔 소리야 그게.
“연주가 알려준 게임!”
“아, 그거. 연주는 브론즈던데.”
“푸훕. 브론즈?”
에키드나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지어졌다.
“연주 혹시 손가락이 세 개뿐이야?”
“…음. 일단 브론즈가 어떤 수준인지는 잘 알겠다.”
강우는 낄낄 웃으며 잠시 에키드나와 시간을 보냈다.
“자, 그럼.”
강우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에키드나의 겨드랑이를 잡아 떨어트려 놓았다.
“우으.”
에키드나는 아쉽다는 듯 볼을 부풀렸지만,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시간이 없다는 것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북극해 쪽에 있는 게이트에서 던전을 하나 발견했어.”
“던전?”
강우는 가늘게 눈을 떴다.
‘혹시 던전 이름이 리리스와 마왕님의 사랑스러운 보금자리, 뭐 이런 거 아니지?’
그러면 나 안 간다.